•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1. 유학사상의 정립

1. 유학사상의 정립

 성종 때에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國子監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미 태조 때에 開京에는 학교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태조 때에 西京에 학교를 설치한 사례로 미루어 짐작된다. 이 때 개경에 세운 학교는 신라시대 國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귀순한 신라의 지식인들, 특히 6두품계의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새 왕조 고려의 유학 교육기관이 개설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명칭도 신라의 국학을 답습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당시의 교과내용도 역시 신라 국학의 교과를 그대로 채용하였을 것이다. 신라 국학의 교과목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禮記≫·≪周易≫·≪尙書≫·≪左傳≫·≪毛詩≫·≪論語≫·≪孝經≫등의 경서와≪文選≫이 주가 되고 算學·三史·諸子百家書가 부가되었다. 이것은 원시유학의 근본이 되는 仁·義·孝·悌·忠·信이 기본을 이루고, 다음은 한대부터 내려오던 5경이 전공과목이었으며, 그 밖에 문장을 익히는 대표서인≪문선≫이나 역사서가 교양과목으로 추가되었을 것이다.518)金忠烈,≪高麗儒學史≫(高麗大出版部, 1984), 55쪽.

 그것은, 광종 9년에 과거제를 실시하면서 製述業에서는 試·賦·策을 시험과목으로 하였으며 明經業에서는 易·書·詩·春秋 등의 경전이 試題로 채택된 것을 보면, 신라시대 국학의 교과목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성종 11년 국자감의 창건으로 고려의 유학 교육은 새로운 기원을 맞이하였다. 이 때의 국자감 창건은 종래의 국학이 국자감으로서 발전적으로 개편된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국자감의 교과내용을 보면 經學 분야로는≪周易≫·≪尙書≫·≪周禮≫·≪禮記≫·≪毛詩≫·≪春秋左氏博≫·≪公羊傳≫·≪穀梁傳≫·≪孝經≫·≪論語≫등이었다. 신라의 국학에서 볼 수 없는≪주례≫·≪춘추공양전≫·≪곡량전≫등이 들어 있으며, 그 밖에 時務策·書·≪國語≫·≪說文≫·≪字林≫·≪三倉≫·≪爾雅≫등 새로운 실용적인 교과목이 추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국자감의 창설과 함께 종래 국학의 교육내용에서 더욱 확충된 교육이 운영되었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과거시험에 있어 고시과목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광종 이후에 달라진 과목을 보면 제술업에 있어서 禮經과 經義라고 하여 새로이 경학이 더 부과되었으며, 명경업에 있어서는≪주역≫·≪상서≫·≪모시≫·≪예기≫·≪춘추≫의 5경만이 고시과목으로 설정되고 있다.

 물론 이 밖에 醫卜, 地理, 律書, 算學, 三禮(禮記·周禮·儀禮), 三傳(春秋左傳·公羊傳·穀梁傳) 등의 雜業이 추가되어 고려사회에 필요한 실무적인 분야와 이에 따른 시험과목이 정비된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한편 지방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이미 성종 때부터 鄕校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적어도 인종대에 향교의 존재를 확인할 수가 있다. 성종 때에 12주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향교 교육에 있어 경학이 교과목으로 편성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지방의 향교 교육의 보편화를 꾀하였으리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구체적 내용을 짐작할 수 없다.

 위에서 고려시대 초기의 유학의 전개과정을 주로 교육제도상에 있어서의 교과내용과 과거시험에 있어서 시험과목 등을 검토하는 한편 유교의 학문적, 사회적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논어≫나≪효경≫등은 계속 교육과정에서 필수과목으로 존속되었으며, 경전교육에 있어서는 종래의≪춘추좌전≫에서 ≪공양전≫이나≪곡량전≫등이 더 확충되고 있어 ≪춘추≫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주례≫·≪의례≫·≪예기≫의 3례가 중요시되었음도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여러가지 제도와 문물을 중국식으르 정비하는 본격적인 작업이 진전되었는데, 이 시기에 있어 특히≪공양전≫이나≪곡량전≫이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은 새 국가체제 정비와 어떠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3례의 문제는 당시 중국의 새로운 유교적 禮制秩序의 정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高麗史≫禮志의 방대한 禮制 내용을 보면 고려는 중국적 제국질서와 맞먹는 예 구조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예제를 구축 정비하기 위하여 관리 등용에 있어 3례의 실천적 지식을 갖춘 인재를 등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라 보인다.

<李熙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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