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2. 유학사상의 발전

2. 유학사상의 발전

 고려 문종대는 고려 유학사상 새로운 활력을 일으킨 시기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崔冲에 의한 私學의 설립과 이에 뒤따른 이른바 私學徒의 출현이다. 그 동안 국자감 등에 의한 官學 중심의 유학교육에 더하여 사학이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하게 된 것이다.519)본장은 金忠烈,≪高麗儒學史≫(高麗大出版部, 1984) 및 경희대 전통문화연구소 편,≪崔冲硏究論叢≫(1984) 가운데 尹絲淳,<朱子學以前의 性理學導入問題>와 李乙浩,<韓國儒學史上 崔冲의 位置>등을 참고하였다.

 최충의 유학교육은 樂聖·大中·誠明·敬業·造道·率性·進德·大和·待聘의 9齋로 편성한 전문강좌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의 교과과정을 보면 9經과 3史를 중심으로 詩賦와 詞章을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9경이란≪주역≫·≪상서≫·≪모시≫·≪예기≫·≪주례≫·≪의례≫·≪춘추좌전≫·≪공양전≫·≪곡량전≫이며, 3사란≪사기≫·≪한서≫·≪후한서≫를 말한다. 논자에 따라서는≪의례≫대신≪효경≫을 드는 경우도 있다.

 최충이 관직을 떠난 문종 9년을 기점으로 하여 설립된 私學 12徒에 의한 유학교육은 그 설립자나 교사가 과거의 고시관을 거친 知貢擧 출신이며, 동시에 대부분 과거출신으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사학은 당시 과거를 위한 효율적인 교육기관으로 등장하여 관학인 국자감보다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사학에서 가르친 교과목을 보면 종래의 국자감의 교과나 별로 다른 점이 없다. 다만 교육방법 내지 교수방법에 있어서 매우 능률적인 교육이 이루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 중기의 사학 교육에서, 특히 崔公徒의 9재의 이름 18자 가운데 聖(악성)·中(대중)·誠(성명)·敬(경업)·道(조도)·性(솔성)·德(진덕)·和(태화)·禮(대빙) 등 9자는≪中庸≫의 根本義를 뽑아낸 것으로서, 최충이 지향한 학문의 방향은 오로지 철두철미≪중용≫에 근거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9경 3사에 앞서≪중용≫의 대의를 천명함으로써 유가의 윤리적 인간학을 새롭게 정립하였다는 것이나520)李乙浩, 위의 글, 278∼282쪽. 9경 중심의 교육이 治國之術로서의 經史 교육이라면, 최충의 9재교육은 治國之道로서 경사를 체득하고 실천하게 했다는 점에서 새로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9재의 명칭에 대한 이해를 성리학에 기초한 中庸·大學 중시 경향과 연관지어 주자학 이전의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경향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 성리학적 사색은 중국의 이 분야 학문별로 큰 시차 없이 거의 함께 발맞추어 전개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521)尹絲淳, 앞의 글, 163∼166쪽. 따라서 우리나라 성리학은 주자학 이전의 북송 성리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학 12도의 번영은 예종과 인종에 의한 관학진흥책으로 대응되었다. 예종 4년의 7齋는 周易·尙書·毛詩·周禮·戴禮·春秋·武學齋로서 무학재 외에 6재는 모두 경서를 교육하였으며, 여기서는 戴禮가 새로이 강좌과목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기타 과목들은 전통적인 경전 교과인 것이다.

 다시 인종 때에 와서 京師6學이 정비되었다. 경사6학의 교육은 신분에 따른 교육제도상의 구분으로서 그 교과내용은 종전의 국자감 교육과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예종에서 인종대에 이르기까지 중흥기를 맞이한 고려 유학은 다시 宮廷講經으로 그 열기를 더하게 되었다.

 궁정강경은 예종 11년 궁중에 淸讌閣을 짓고 學士들로 하여금 경서를 강론하게 하면서 본격화된 것이다. 그러나 곧 다시 寶文閣을 세워 궁중 강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실상 궁중강경의 시작은 예종 11년 당시 知制誥 崔瀹의 상서가 큰 계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당 문종이 재상의 말을 들어 감성에 흐르기 쉬운 詩學士를 멀리 하였다는 고사를 들어 제왕은 儒臣들의 經術을 통하여 化民成俗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예종에게 간언한 바 있었고, 그 뒤 얼마되지 않아 청연각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연각을 세우기 이전에 궁중의 강경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예종 원년부터 의종 16년까지 60여 년간 궁중에서 이루어진 강경의 횟수가 49회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 때에 시·서·예·역을 강론하였는데≪서경≫이 22회,≪예기≫가 11회,≪주역≫9회,≪시≫5회,≪老子≫1회,≪唐鑑≫이 1회로 되어 있다.

 ≪서경≫을 편목별로 보면 洪範이 6회, 說命이 6회, 無逸이 4회, 舜典과 大禹謨가 2회, 堯典·皐陶謨·益稷·太甲 등이 각각 1회이다.

 ≪예기≫에 대한 강론은≪중용≫이 4회,<月令>이 6회, 기타가 3회로 되어 있다.≪중용≫은 心性과 誠明을 깊이 있게 다룬 책으로 유교의 도의를 체득하는데 근본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수용되기에 앞서 이미≪중용≫이 4서 중에서 특히 중요시된 것은 주목할 일이다. 즉 경학을 존중하는 당시의 학풍은 이미 유학을 철학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생각되는 것이다. 동시에≪중용≫강론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최충의 9재교육에서 윤리학이나 인간학을 강조하여 치국의 도로서 지향하였던 학풍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주역≫강의도 매우 열기를 띠어 文言·繫辭에 대한 것보다 本經의 卦辭를 주로 하였으므로, 의리에 대해서는 크게 활발하지 못한 편이었다.≪시≫에 대한 강의는 金富佾이 거의 도맡아 하였다. 이것은 인종 이후에 시작되고 있어, 이 때부터 학풍이 전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 당시에 강의에 참여한 학자는 朴景仁, 高先柔, 池昌洽, 朴昇中, 金緣(仁存), 胡宗旦, 洪灌, 金富佾·金富軾·金富轍 3형제, 韓安仁, 李永, 鄭克永, 林存, 鄭沆, 鄭知常, 尹彦頣, 鄭襲明 등 20여 명이다.

 예종·인종·의종 3대 60여 년에 걸쳐 성행하였던 尊經講學의 학풍은 당시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고, 이에 상응하는 학문적 성과를 저술로서 남기게 하였다. 즉 김부식의≪三國史記≫, 윤언이의≪易解≫, 崔允儀의≪古今詳定禮≫, 김인존의≪論語新義≫등이 저술되었다. 그러나≪삼국사기≫외에는 전하고 있지 않아, 그 내용의 면목을 잘 알 수 없다.

 이 시기에 유학이 극성기를 이루었음은, 史臣이 예종을 평가한 ■文에도 잘 드러난다. 즉 왕은 타고난 자질이 명철하고 勵精求治했으며, 학교를 개설하여 선비를 길러내고 淸讌·寶文 두 文閣을 세워 날마다 문신들과 6경을 강론하여 예악적인 풍속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종·인종 양대는 유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했던 학술사상 빛나는 시기였다. 그런데 예종대의 崇經的 학풍은 인종대에 와서 詞章風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의종대에 가서는 너무 문약으로 흐르게 되어 마침내 무신을 경멸하는 풍조를 자아내었다.

 고려 중기 유학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예종·인종 양대에 걸쳐≪서경≫,≪예기≫,≪역≫,≪시≫가 가장 중요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시된 것은≪서경≫과≪예기≫로 생각된다. 이들 두 경전의 강론이 단연 많은 강경횟수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랫 동안 학교 교과목으로 중요시되어 오던≪춘추≫에 대해 궁중강경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주목된다.

 5경 가운데≪서경≫과≪예기≫가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동시대의 국가·사회적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가장 많은 강의를 행한≪서경≫의 경우 홍범이 6회, 열명이 6회, 무일이 4회로 으뜸을 이루고 있다. 홍범이란 殷의 賢者인 箕子가 周 武王의 요청에 따라 전해준 정치의 근본이 되는 원칙인데,≪서경≫에서도 王道를 설정한 가장 중요한 편목이라 할 수 있다. 즉 王者는 천명을 받아 이를 정치에 구현하는 존재로서, 무릇 천과 인민 사이에서 天道를 실천하여 인민들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치자인 天子가 천명을 어기고 인민의 복리를 실현할 수 없을 때에는 天意가 자연현상의 여러 가지 災異로 나타나, 天譴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서경≫의 홍범은「君主天命說」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홍범이 당시에 중요시되었던 것은 고려의 정치이념과 깊은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서경≫의 說命篇은 傅說이라는 재상이 등용될 때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盤庚으로부터 3대 후에 高宗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뛰어난 천자였다. 그는 즉위한 처음에는 자기 스스로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아무런 새로운 시책을 펴지 않았다. 백성들과 신하들은 왕이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는다고 염려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심사숙고한 끝에 자기의 계획을 잘 세우고 부열이라는 현인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이 부열의 보필에 의해 나라가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은나라 중흥의 명군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 부열을 기용한 때의 전말을 쓴 것이 이<열명>편이다.522)金冠植 역,≪書經≫(玄岩社, 1967), 236∼255쪽. 따라서<열명>편은 치자가 현자를 기용하여 나라를 번창하게 발전시켜 名君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는 방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군주와 이를 보필하는 신하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요지로서 이해할 수 있다. 고려 중기 유교사상에서 추구하는 정치이념이 군신의 협력하에서 이상적인 정치가 성취될 수 있다는 고전적인 이상을 추구하려 한 노력을 엿볼 수가 있다.

 다음에 중요시된 것은≪예기≫이다.≪예기≫가운데 가장 많은 강론이 이루어진<月令>편은 어떠한 것인가.<월령>은 춘하추동을 다시 孟·仲·季의 3단계로 나누어, 달에 따라 태양의 위치, 昏旦의 中星, 그 달에 배당할 帝·神·虫·音·律·數·味·息·祀祭 등을 기록하고 계절을 맞이하는 방법, 각 달에 내려야 할 政令을 기술하고 있다. 또 월령을 위배하였을 때에 닥칠 재해에 이르기까지 기술하고 있다.<월령>이 또한 치자의 중요한 관심거리가 된 것은 역시 유교정치이념과 직결되기 때문이라 보인다.<월령>편에는 군주의 연중 행동방향 즉 정치와 그의 일상생활의 자세한 행동규범이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달의 월령을 그 달에 행하지 않고 다른 달로 넘긴다면 天譴에 의한 재이를 초래한다는 5행설적 천명설이 또한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따라서 군주는 결국 천명의 실현자이다. 그러므로 천명에 따른 政令에 비추어 일상생활을 영위하여야한다는 것이다. 동시에<월령>편에 보이는 천자의 존재는≪서경≫홍범에 실린 五行·五事·庶徵·咎徵說과 함께 王道論의 구체적 실상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예기≫의<월령>과 함께 이 시기부터≪중용≫이 점차 당시 치자들의 지적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뒤 고려시대 성리학의 수용 이전에 이미 고려 지성계가 심성과 성명을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유학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제시한 바 있다.

 다음은≪효경≫이 신라 이래로 중요한 교과목으로서 고려시대에도 계속된 점이다.≪효경≫은 이미 중국에서 戰國 말기 이전에 그 존재가 확인되는데 유가의 효사상을 담은 핵심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있어서≪효경≫은 명경업이나 제술업의 과거 시험과목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 때의 國子監學式에는≪논어≫와 함께 필수과목으로 편성되었으며, 최충의 9재의 교과목 중 9경 속에≪효경≫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효경≫에는 ‘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이라는 구절이 있다. 효가 충으로 이행한다 하여 효는 단순히 가족윤리로 그치지 아니하고, 마침내 군주에 대한 충이라는 정치윤리로 발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사상은 유교국가에 있어서 핵심적인 윤리사상으로 자리잡아 법률·예제 등 사회질서 속에 실천윤리로서 구현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초기 이래 유학은 5경을 중심으로 교육과 과거에 적용되어 왔으며, 중기 이후에도 고려의 유학사상은 그 주류가 5경 내지는 9경이라 하여 經學이 계속 중요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도록 이러한 유교 경전 가운데서도 특히≪서경≫과≪예기≫가 매우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처럼≪서경≫과≪예기≫가 중요시되었던 원인으로서는 당대 유교정치윤리의 정립과 구현이라고 하는 정치이념상의 과제 가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서경≫에는 유교이념에 따른 치자의 왕도론이 시종 그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예기≫에는 유교정치 하의 군주들이 실천하여야 할 행동규범이 자세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왕자의 행동 실천에 있어 중요한 규범이 되는 경전인 것이다.

 한편≪효경≫도 신라 이래 중요한 교과내용으로 전승되어 고려시대에도 국자감학식이나 9재 교과에서 교과내용으로 편성되어 필수과목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효가 충으로 이행한다는≪효경≫의 사상이 더욱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 초기·중기까지의 유교사상의 정립·발전과정을 살펴볼 때, 이것이 당대 정치이념으로서 또한 정치규범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함으로써 구체적·실천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교사상은 고려시대에 있어서 하나의 추상적인 학문적 대상만은 결코 아니었으며, 그 시대를 영위하는 지배적인 원리로서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 전기 유학의 특성을 고려할 때에 이 시기 유학 사상의 전개과정을 천착하는 작업은 당시 사회를 지탱하는 구체적인 원리로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실천적으로는 예나 법의 내면적 구조 속에서 파헤쳐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려 전기 유학의 실천적 구조와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대에 구조화되었던 천문·5행사상과 효사상의 전개 그리고≪고려사≫예지에 수록된 5례의 의미와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李熙德>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