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3. 유학사상의 실천적 전개
  • 1) 오행설과 천인합일설
  • (2) 유교정치이념과 월령

(2) 유교정치이념과 월령

 고려시대에는 성종대에 접어들어 유교사상에 있어≪예기≫월령의 사상적 전개가 두드러져 가고 있었다.525)李熙德,<高麗初期의 天文·五行說과 儒敎政治思想>(앞의 책), 39∼60쪽.≪예기≫는 고려 이전에도 5경의 하나로서 교과내용이나 관리채용 시험에서 중요한 경전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나, 그 구체적인 사상적 전개과정은 자못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국자감의 설치나 과거제의 본격적인 정비와 함께≪예기≫는 5경 중에서도 특히≪서경≫과 함께 중요시되었다. 그리고≪예기≫는 私學의 성립과 발전, 관학의 진흥과 더불어 궁정강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궁정 강학의 경우≪서경≫다음가는 비중을 보이고 있고 특히≪예기≫월령의 강좌 횟수가 다수를 나타내기도 한다.≪예기≫월령편의 내용은 왕자로서 1년 열두 달의 시절 변화에 순응하여 지켜야 할 일상의 생활규범과 정령을 규정한 연중행사표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중국의 고전적인 왕자의 행동규범이 성종조 이후 고려의 정치적 실제에 도입된 것은 아마도 崔承老의 封事 이후라고 믿어진다. 실제로 최승로는 그의 봉사에서 불교는 신앙의 영역이나 유교는 理國의 근본이 된다고 단정하고, 당시까지 관행되고 있었던 많은 불교행사를 줄이도록 하라고 강조하면서 월령에 의해 정사와 공덕을 시행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는 성종에게 바친 봉사 속에≪예기≫월령 중 仲夏(5월)와 仲冬(11월)의 월령에 속하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최승로는 이 월령 규범에 의해서 불교행사를 5월과 11월에는 피하되 1년을 4기로 구분하여 2·3·4월과 8·9·10월까지는 政事와 功德을 반반으로 행하고 5·6·7·11·12·1월은 공덕을 피하고 오로지 정사를 닦아 날마다 정사를 행하고 밤늦게까지 다스리기를 힘쓰되, 매일 오후에는 군자의 四時의 예로써 영을 닦고 몸을 편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 곧 時令에 순응하고 聖體를 편안하게 하며 신민의 노고를 덜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최승로는 그의 봉사에서 성종으로 하여금 불교행사를 대신하여 유교적 생활규범을 권장하고 종래의 불교적인 관행에 젖은 군주를 유교적 규범의 실천으로 전환시키려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정월에 성종은 籍田과 祈穀의 예를 시작하여 유교적 예제를 점차 확충시켜 갔다. 즉 성종 2년(983) 정월 왕은 圓丘에서 기곡하였는데 태조를 여기에 배향하고 이어서 친히 적전을 갈고 神農에 제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기곡의 의식은 곡식의 성숙을 상제에게 비는 행사이다.≪예기≫월령의 孟春令에는 “이달에 천자는 元日, 즉 上辛日을 가려서 상제에게 곡식이 잘 되기를 기도하고 元辰을 택하여 천자가 친히 쟁기와 보습을 수레에 실어 참승(驂乘)한 거우(車右)의 용사와 御者의 사이에 두고, 3공과 9경과 제후의 대부들을 거느리고 가서 몸소 황제의 적전에서 밭갈이를 한다. 천자는 쟁기를 잡고 세 번 밀며 3공은 다섯 번 밀고 경과 제후는 아홉 번 민다…”라고 하였다. 이것과 대조하여 보면, 이 때에 행한 고려의 기곡과 적전의 예는≪예기≫에 바탕을 둔 유교적 예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예기≫月令思想의 실천은 이후 다른 유교적 예제와 더불어 고려 왕실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의식으로 집행되었다. 그러나 월령에 의한 施政의 강화는 보다 뒤인 성종 7년(988)에 있었던 李陽의 封事 이후에 추진된 듯하다. 즉 동 7년 봄 2월에 左補闕 兼 知起居注 이양은 봉사를 올려 다음과 같이 禮記的 사상의 구현을 강조하였다.

그 하나로 옛 명관한 임금들은 天道를 받들어 농사짓는 계절을 가르쳐 줌으로써, 군주는 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백성은 農桑의 이르고 늦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게 살게 되고 해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月令을 살펴보면 ‘立春에 앞서 土牛를 내어 농사의 이르고 늦음을 보인다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옛날 행사를 따라 지금 행하십시요. 그 둘째로 籍田을 친히 경작하는 것은 진실로 현명한 임금이 농사를 중히 여기던 뜻이요 여자들이 하는 일을 경건하게 행함은 어진 왕후가 임금을 돕던 덕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에 정성을 들이고 나라에 경사를 쌓는 것입니다.≪周禮≫의 內宰職을 살펴보면 上春에 왕후에게 言召를 내려 6궁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늦벼와 올벼의 씨앗을 눈틔워서 왕에게 바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임금이 하는 일은 왕후가 반드시 돕는 것입니다. 이제 上春에 上帝에게 곡식 잘되기를 빌고 吉日에 東郊에서 적전을 갈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비록 친히 적전을 갈지만, 왕후가 씨앗을 바치는 의식은 행하지 않았으니, 원하건대≪주례≫에 의거하여 나라의 풍속을 빛나게 여십시요. 그 세번째로 성인은 아래로 지리를 살피고 위로 천문을 보아 시기의 변화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며, 임금은 인을 행하고 은혜를 베풀어 만물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월령을 살펴보건대 ‘정월 中氣 후에는 희생에 암짐승을 쓰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고, 새끼를 잡거나 알을 뺏지 말며 대중을 동원하지 말며 해골들을 묻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새해를 맞이하는 때를 당하여 두루 봄에 해야 할 월령을 펴서 모두 이 때에 금해야 할 것과 자연의 법칙을 알게 하소서(≪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7년 2월 임자).

 이양은 유교사상에 의거한 정사를 베풀도록 상소하고 있다. 월령사상에 관한 내용이 앞 뒤 두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데, 첫째로 월령에 의하면 ‘입춘에 앞서 土牛를 내어 농사에 이르고 늦음을 보인다 하였으니 옛일에 의거하여 때를 따라 정령을 행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예기≫월령편에는 토우의 기사가 季冬의 월령 속에 들어 있으며 그 내용도 추위를 쫓는 뜻의 의식이며 봄의 월령과는 관계가 없다. 다만≪東京夢華錄≫의 월령에는 토우를 내어 이로써 농사에 이르고 늦음을 나타낸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수용된≪예기≫의 월령편에는 이러한 기사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둘째로 인용된 월령의 내용은 ‘정월 中氣에는 희생에 암짐승을 쓰지 말고 벌목을 금지하며 새끼를 참거나 알을 빼앗지 말고 대중을 동원하지 말며 해골들을 묻어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예기≫월령의 맹춘령에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이같은 이양의 봉사에 대하여 성종은 즉시 그 구체적 실천 방안에 관해 교시를 내렸다.

李陽이 말한 바는 모두 경전에 의거한 것이니 마땅히 嘉納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토우를 내는 일은 올해에 이미 입춘이 지났으므로 다음해 입춘 전에 해당 官司가 다시 아뢰어 시행토록 하라. 씨앗을 바치는 일은 마땅히 禮官에게 명하여 의논해 정하게 하고, 籍田을 친히 가는 일과 길일에 王后가 몸소 길쌈을 하는 의례는 올해부터 시작하여 이것을 통례로 삼도록 하라. 正月 中氣의 初를 당하였으니 公私의 제사에 암짐승을 써서 생명을 해치지 말 것이며 벌목을 금하여 천지 간 盛德의 소재를 범하지 말라. 새끼와 알을 거두지 말며, 어린 싹을 상하게 말며, 침입해오는 적을 막고 城塞를 쌓는 긴요한 일 외에는 대중을 동원하여 농사를 방해하지 말라. 짐승이나 사람의 뼈와 썩은 살이 드러나 있으면 모두 잘 묻어서 死氣가 生氣를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아! 하늘에는 4시가 있어 봄에는 陽和의 덕을 펴고, 임금은 5敎를 행하는데 仁을 禮와 義에 앞세운다. 마땅히 옛 성인의 법에 따라 句芒의 조화에 순응하여 모든 나는 새와 물 속의 고기도 그 천성을 다하도록 하고, 초목도 은혜를 받으며 마르고 썩은 무리들까지도 다 생성의 혜택을 입게 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마땅히 兩京의 각 관청과 12목의 知州縣鎭使들에게 이 법령을 알게 하고 그 조목들을 힘써 실천하여 나의 뜻을 체득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널리 백성들에게 알려 이 政令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라(≪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7년 2월 임자).

 위의 기사에서는 왕이 구체적으로 내린 정령을 엿볼 수 있다. 즉 토우에 관한 것은 시기가 늦어 다음해부터 시행토록 하였으며 제사에 암짐승을 잡지 말도록 하는 등 이양이 봉사한 내용이 하나하나 정령으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이와 같이 성종 때에 와서 월령에 의해 정사를 시행하려 한 것은 곧 유교적 덕치사상의 구현의 또 다른 측면이라 하겠으며, 아울러 짐승이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한 깊은 외경을 베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월령에 의한 정령의 시행이 그 뒤 계속 실천에 옮겨졌으며, 흩어진 枯骨을 묻는 일도 자주 행하여지게 되었다.

 한편≪예기≫월령에 의해 정령을 시행하는 것은 당시의 자연관과도 유기적인 연관을 갖는다.≪예기≫월령편에는 孟春에 여름의 월령을 행하면 天時의 이변을 초래하여 雨水가 때를 잃고 초목이 일찍 말라 떨어지며 나라에는 때로 유언비어가 나돌게 된다고 하였다. 또 이 달에 가을의 정령을 행하면 그 백성들에게 크게 전염병이 유행하게 되고 회오리바람과 폭우가 일시에 이르며 악초들이 무성하게 되고, 이 달에 겨울의 정령을 행하면 홍수와 지나친 비로 수해를 일으키며 눈과 서리가 크게 백곡을 상하게 하고 먼저 심은 곡식도 거두어 들일 것이 없게 된다고 하는 등, 월령에 의한 정령을 시행하지 않을 때에는 자연에 커다란 이변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월령의 실시와 자연현상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고려사회는 월령사상의 수용과 함께 중국적인 자연관에 대한 측면도 아울러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현종 9년 문하시중 劉瑨 등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民庶가 疫癘에 걸리고 음양이 순조롭지 못한 것은 다 刑政이 때를 맞추지 않음에 연유합니다. 삼가 월령을 상고하건대「三月節에는 감옥을 살피어 桎梏을 제거하고 肆掠을 없이 하며 獄訴를 정지하고 4월 中氣에는 重囚를 관용하며 輕犯을 석방하고 7월 中氣에는 감옥을 수선하며 질곡을 갖추고 薄刑을 처리하며 小罪를 결단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獄官令을 상고하건대「立春으로부터 秋分에 이르기까지는 死刑을 奏決하지 못하나 만일 惡逆을 범한 자는 이 令에 구애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法吏가 다 자세히 살피지 못할까 저어하오니, 엎드려 청컨대 금후로는 內外 所司가 다 令에 의하여 시행케 하소서’하니, 이를 따랐다(≪高麗史≫권 94, 列傅 7, 劉瑨).

 위에서≪예기≫의 월령사상이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현종 16년 6월에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던 것이다.

하늘에 본받고 때에 순응한 뒤에 재앙을 막을 수 있으며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이제 內史門下省 및 여러 관사들이 奏行하는 바가 시정에 어그러짐이 많으니, 음양의 조화를 바라는 것이 어찌 그릇된 일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각자가 마음을 다하여 힘써 月令을 지켜 이로써 나의 뜻에 맞도록 하라(≪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16년 6월 기미).

 時政 즉 월령에 따른 정령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아 음양의 조화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현종 16년 3월에는 白氣가 태양을 가리웠고, 4월에는 가뭄이 심하여 왕이 농사일을 걱정하여 正殿을 피하고 常膳을 감하는 등 일련의 責己修德을 행한 바 있다. 그러나 嶺南道의 廣平·河濱 등 10縣에 지진이 거듭되었다. 이같은 연속적인 천재지변의 발생으로, 음양조화의 길은 월령에 따른 정사의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현종의 교서가 내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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