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3. 유학사상의 실천적 전개
  • 1) 오행설과 천인합일설
  • (3) 천문관과 유교사상

(3) 천문관과 유교사상

 고려사회는 유교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수용하면서 중국적 천문사상도 아울러 받아들이고 있었다.526)李熙德,<天文觀과 儒敎政治理念>(앞의 책), 61∼93쪽. 그것은 천인합일사상에 입각한 천문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천문상의 변이는 군주나 치자계층의 부덕의 소치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으로서, 이를 치자에 대한 天譴으로 인식하고 修省과 덕치주의를 지향하여 항상 선정을 구현토록 촉구하였다.

 ≪고려사≫天文志의 서문을 보면 이러한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즉 伏犧·黃帝·堯·舜 등 중국의 전설적인 이상시대 통치자들이 이미 천문의 운행과 그 법을 살펴서 曆日과 璣衡으로 觀天의 방법을 발견하였다. 그 이래 天이 드러낸 형상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성인이 이를 전형으로 삼아, 인간사회로 하여금 경계하고 修省토록 하였던 것이다. 공자가≪춘추≫를 편찬할 때에 日食과 星變을 삭제하지 않고 모두 기록한 까닭도 그러한 천의를 인간으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성인이나 공자가 그러했듯이≪고려사≫의 펀찬자들이 고려시대의 日食·月食·五星凌犯 등 천문의 변이를 수록하는 의도도 위와 흐름을 같이한다. 물론 이들≪고려사≫의 편찬자들은 이미 새 왕조의 지배층으로서 그들 스스로의 정치이념을 여기에 반영하기도 하였으나 고려시대의 지배층들도 같은 천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천문현상 중에서도 일식을 가장 큰 재이로 믿게 된 것은 태양이 인간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식의 대상인 태양은≪漢書≫孔光傳에 보면 군주를 상징한다고 하며, 달을 동 李尋傳에서 妃后·大臣·諸候之象이라 한 것을 보면, 日月이 군주와 후비 및 대신의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는 한편 음양설에 의한 해석이 곁들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태양이 군주의 象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일식현상은 군주에 대한 반역적인 臣者나 惡勢力의 침범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일식현상과 때를 같이하는 반란이나 모역 등은 서로 연관된 사실로 해석되곤 하였다.

 인종 13년 정월에 일식이 있었지만 구름으로 가리워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 뒤에 일어난 서경의 妙淸·柳旵·趙匡 등이 일으킨 이른바 묘청의 난을 예시한 천상의 구징으로 해석되었다. 일식의 원인을 그 밖의 다른 데서 찾기도 하였는데, 그 중요한 원인은 日의 상징인 군주 스스로의 부덕한 정치와 생활이라는 것이다.≪예기≫昏義篇에 의하면 男敎의 不修, 陽事 不得의 소치로 일식이란 재이가 발생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靖宗 9년 5월에 일식이 있었는데, 왕은 명을 내려 스스로가 부덕하여 이같은 천변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또한 여러 차례의 재변을 이르게 하였다 하고, 正殿을 피하며 죄인을 특사하는 등의 반성과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일식 등 천변은 결국 군주의 실정과 부덕한 행위에 대한 天戒와 前兆로 설명되었다. 그러면 이같은 하늘의 예시에 대해 군주는 어떻게 반성하고 책임을 졌던 것인가. 이것은 결국 예시된 구징에 대하여 마땅히 수성과 消災, 즉 부조한 음양에 대한 조화를 꾀하여야 했다. 그 소재의 방법으로서 가장 전형을 이루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예기≫혼의편의 ‘일식이 있으면 천자는 素服을 입고 6관의 직을 다스려서 천하의 양사를 소탕하며 교화를 실현함으로써 천계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왕이 정전을 피하고 素衤蘭을 입고 겸허하게 자책함으로써 변이의 소멸을 구하였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일식변이에 대한 소재 의식은「救日月食儀」란 행사이다. 이것은 일식이 있는 당일 陪衛하는 群臣은 玄冠 素服하고 왕은 소복으로 나아가 救食하는 절차에 따라 일정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일식이 일어날 때마다 행하여졌으리라 판단되는데, 이것으로도 소재와 祈禳이 충족되었다고는 믿지 않았다. 정종 9년 5월에 일식이 일어나자 왕은 制書를 내려 부덕의 소치로 말미암아 이러한 재변이 발생한 것이라 밝히고, 이에 대한 소재의 방법으로서 尙食局으로 하여금 鷹鷂軍을 놓아주게 하고 또 滬 즉 통발로 물고기 잡는 것을 금하였으며 또 죄인을 특사하는 영을 내리고 정전을 피하는 등 거듭된 재이 퇴치를 위한 禳法을 실시하였다.

 이 때의 소재 의식은 비단 일식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그 해 봄부터 계속된 가뭄에 대한 기양과 복합된 것이라 믿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보이는 응요군의 방면과 捕鳥의 금지 등은 당시 불교의 살생금지 등과도 관련된 것이라 여겨진다. 일식이 일어났을 때에 불교적 소재 의식도 있었다. 문종 원년 3월의 일식에 대해서 御史臺는 春官正 柳彭과 太史丞 柳得韶가 曆算을 정밀하게 하지 못해 예보를 맞추지 못하였으니 그들을 파직하라고 거듭 탄핵하였다. 이미 왕은 친히 乾德殿에 般若道場을 5일 동안이나 설치하여 소재의 의식을 행한 바 있다. 그 뒤 의종 때에는 일식이 일어나자 宣慶殿에 消災道場을 베푸는 등 불교적 소재도량을 자주 베풀기도 하였다. 이 밖에 일식의 구징을 소재하기 위하여 왕실의 停宴, 輟朝, 군주의 損膳 등 왕자나 지배층이 평소의 화려한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천의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 경고를 받아들여 勤政과 寬刑을 베풀어서 유교적 예교정치의 실을 거두게 하려는 정치윤리가 잠재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같은 하늘의 경계를 관찰해야 할 日官들이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憲司 등 당국의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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