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3. 유학사상의 실천적 전개
  • 2) 효와 예
  • (2) 윤리와 법

(2) 윤리와 법

 고려시대에 와서 유교는 통일신라 이후 사상적 성숙과정을 거쳐 새시대의 정치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530)李熙德, 앞의 책, 249∼288쪽. 교육과 과거에 있어 유교가 채용되고 법률과 예제에 있어서도 유교사상이 침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사상을 확산하는 과정에서 그 심층적·내면적 바탕에는 효사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孝經≫은 신라 이래 가장 중요한 윤리서로서 위로는 군주로부터 지배층에게 필수화되고 나아가서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갔다.

 고려시대에 효사상을 펴기 위하여 국자감 學式에≪논어≫와 함께 효경을 필수로 兼通하도록 규정하였으며, 이 양서를 閭巷의 어린이들에게 내려주기도 하였으며, 태자가 寶文閣에 나아가≪효경≫을 친강하기도 하였다.

 한편 과거의 시험과목으로≪효경≫은 단지 何論業에<곡례>와 함께 선정되어 있을 뿐이나, 명경업이나 제술업을 막론하고 수험에 앞서 국자감에서 경전 학습의 과정에서 이미≪효경≫이 先修科目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 시험과목으로 직접 부과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중요성이 줄어들 수는 없었다.

 ≪효경≫三才章에 “曾子曰 甚哉 孝之大也 子曰 夫孝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 하여, 효는 天地人을 일관하는 도로서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보편질서로 천명되고 있다. 이와 같이 우주의 보편질서로서의 효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군주도 예외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효경≫에는 天子·諸候·卿大夫·士·庶人에 이르는 효를 정하여 이른바 5효의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5효 중에서도 천자가 愛親과 敬親을 다할 때 백성에게 도덕적 교화가 베풀어진다고 하였으므로 먼저 군주가 몸소 효행을 실천하여야 했다. 군주의 효행으로서 舜임금의 大孝를 들고 있거니와 유교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던 성종은 그 9년에 내린 교서에서 유교주의적 政敎를 밝혔다.

무릇 국가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먼저 근본됨을 힘써야 하는데 근본됨을 힘쓰는 것은 孝에 더함이 없다. 이는 3皇 5帝의 本務이며 萬事의 紀綱이요 百善의 主인 것이다. …이러므로 법칙은 6經에서 취하고 규범은 3禮에 의거하여 한 나라의 풍속으로 하여금 모두 5효의 門으로 돌아가게 하기를 바란다(≪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9년 가을 9월 병자).

 이와 같이 군주가 효의 실천자로서의 자각을 가졌던 고려사회에서는 군주로부터 士庶에 이르기까지 효행은 중요한 덕목으로서 윤리 규범화되고 있었다. 특히 군주는 효의 실천자로서 의제화되었다. 그것은 왕의 사후에 붙이는 시호에 ‘孝’자를 사용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군주에 대한 ‘孝’자의 시호 사용은 유교주의체제 하에서 군주 스스로가 효행의 체현자이며 垂範者로서의 표징인 것이다.

 고려는 유교주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왕권의 지주가 되는 관료들에게 우선 효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시행된 제도는 관리에 대한 給假制이며 특별한 경우에는 당해 직역의 유보나 면역 등의 혜택을 주어 효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 효행을 위해서는 형벌의 집행까지도 유예하는 등 효치주의 실현에 주력하였다. 효행에 대한 구체적인 범주로서≪孝經≫紀行孝章 제10에서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효자가 부모를 섬김에 평소에 계실 때에는 공경을 다하고, 봉양할 때는 즐겁게 해드리며, 병이 나면 근심을 다하며, 돌아가셔서 상을 치를 때는 슬픔을 다하며, 제사지낼 때에는 엄숙하게 해야한다. 다섯가지가 갖추어진 후라야 부모를 섬길 수 있다’고 하셨다…”라 하여 효행의 5단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효경≫의 효행방법은 고려 사회의 효사상 실천에 그대로 원용되었으리라고 믿어지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당·송의 율령이나 예제질서에서 직접 수용하였다고 생각된다. 효 윤리의 실천을 위한 관리 給假에 대해서는≪高麗史≫刑法志 官吏給假條와 禮志의 五服制度 및 百官忌暇條에 그 대강이 정리되어 있다. 관리의 효행을 위한 급가제를 검토함에 있어서도 앞서≪효경≫기행효장에 제시된 바와 같이 부모가 살아있을 때에 대한 것과 돌아간 후의 효행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부모가 살아있을 때의 효행을 위한 급가로는 定省·看病·老侍 등을 위한 급가가 있다. 그리고 돌아간 후에 필요한 급가로는 遭喪·忌祭·掃墳·改葬 등을 위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定省給假의 사례를 보면 靖宗 11년 2월의 制를 들 수 있다. 즉 문무관의 부모가 300리 이상 떨어져 살고 있을 경우 3년에 한 번씩 정성급가 30일을 준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충목왕 때에는 외임 관리의 부모가 그 아들을 보고 싶어하면 왕복에 소요되는 기간을 빼고 20일의 급가를 주라고 규정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侍養給假, 병중 부모를 문병하기 위한 病暇, 부모의 상을 위한 喪暇와 起復制度, 부모의 제사를 위한 忌暇, 사후 무덤의 관리를 위한 掃墳暇, 묘지의 改葬을 위한 改葬暇 등이 있다.

 이와 같이 효행을 장려하기 위해 관리나 군역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효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한 걸음 나아가서는 비록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 치죄를 잠시 유예하고 孝養과 喪哀 등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즉 문종 2년 정월의 제에서는 범죄로 유배되는 경우 만일 노친이 있으면 잠시 侍養을 위해 유예하고 부모의 사망 후에 형을 집행케 하였는데, 이는 형법의 유예를 통해 효행의 실제를 거두려고 한 좋은 실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효행을 위해 여러 가지 법제적 장치와 더불어 復讐·割股·廬墓 등의 더욱 극단적 효행이 용납되고 장려되었다. 유가에서 복수행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예기≫의 “父之讐 弗與共戴天”과,≪공양전≫의 “君弑 臣不討賊 非臣也 不復讐 非子也” 등의 구절에 근거한다. 즉 부모나 주군에 대한 복수를 용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의무처럼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복수에 관한 예로서 고려 무신정권 초기에 피살된 金光中의 아들 金蔕는 가해자 朴光升과 그 아버지까지도 연좌하여 공공연하게 이들 부자 두 사람에 대해 복수의 살인을 감행하였던 사실이 있었다.

 割股孝行이란 부모의 난치병에 자식이 다리의 살을 베어 약으로 쓰는 행위이다. 중국에서는 唐代 名醫 陳藏器가 난치병에 인육이 좋다는 처방을 내리면서부터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할고효행이 별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큰 효행으로 포상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막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에는 최대의 효행으로서 오히려 포상을 받아 旌門·旌閭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廬墓란 상을 치른 후 묘 옆에 여막을 짓고 거기서 3년의 喪期를 보내는 의식인데, 사회생활을 영위해야 할 생활인으로서는 매우 지키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므로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러한 어려운 고행을 치른 효행자에게 포상을 하였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효행자 가운데에는 여묘효행의 많은 예가 있다.

 효행은 치자가 솔선수범하고 법이나 예제로서 장려할 뿐 아니라 대면교화를 위해서 효행자를 여러 가지로 포상하기도 하였다. 포상의 내용을 보면 단순한 嚮禮로부터 賜物, 신분의 上昇·授官·特進 그리고 力役이나 租賦의 감면 등 여러 가지 특전이 국가로부터 베풀어졌다. 또 다른 포상방법으로 효자를 관리로 등용하는 孝廉制가 실시되었는데 성종·현종대를 이어 고려 말기에 이르도록 孝廉者 관리 탁용의 실례가 있다.

 다음에는 高麗律과 효행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고려가 유교주의 정치이념을 펴나가면서 律 즉 형법에서는 효사상을 어떻게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가를 보려는 것이다. 율이란 禁制規範으로서 이러한 법적 금제가 이 시대의 정치 이념인 유교사상, 특히 효사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어떠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효윤리의 실천을 위한 금제규범이란 필경은 불효에 대한 치죄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고려율이 이러한 형률을 어떻게 제정 실시하였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당나라의 율령을 받아들여 국가체제를 정비한 고려사회에 있어서 형률의 경우에도 그 大範은 당의 것을 수용하였다. 효사상과 관련된 당률은 10악조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그 항목은 제국과 제실의 안위에 관한 내용과 함께 父祖나 친족에 대한 유교적 가족주의에 바탕을 둔 효제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10악은 ① 謀反 ② 謀大逆 ③ 謀叛 ④ 惡逆 ⑤ 不道 ⑥ 大不恭 ⑦ 不孝 ⑧ 不睦 ⑨ 不義 ⑩ 內亂의 10항목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효 관계를 내포한 조목은 ④ 악역 ⑦ 불효 등이다. 이같은 당률의 10악이≪고려사≫형법지에는 戶婚條·大惡條·禁令條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다.

 고려율의 10악 중에 불효의 규제에 대해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부모에 대한 고발과 詈罵행위에 대한 형률이다. 이것은 부모나 조부모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그 자손이 고발한 것에 대한 형률과 또한 부조에 대하여 불온하게 욕설을 자행하는 행위가 일어났을 경우, 이를 불효로서 징벌하기 위한 율이다.

 이 중 구타·고발·욕설에 대한 고려율을 보면 “毆祖父母父母斬 告詈絞”라 하였다.531)≪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大惡. 즉 만일 조부모나 부모가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때에 이를 法司에 고발했을 경우, 부모나 조부모에게 욕설을 했을 때 다같이 교수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부모나 조부모에 대한 구타나 고발, 욕설 등이 실로 있기 어려운 불효임에 틀림없겠으나 모두 斬·絞 등의 극형으로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매우 가혹한 처벌규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부조의 범죄에 대한 자손의 고발행위도 매우 엄하게 처벌하였다. 즉 당률에서도 謀反·謀大逆·謀叛 등 국가나 황실에 대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부모나 조부모가 비록 명백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부조 스스로의 자수와 같이 간주되어 그 죄과를 지은 당사자는 면죄받고, 오히려 부조의 죄를 고발한 자손은 예교를 파괴한 불효자로서 絞罪란 극형을 받게 되어 있다. 더욱이 당률에서는 부조의 범죄를 고발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친속에 이르기까지도 오히려 그들의 범죄를 알더라도 은폐하여야 한다는 더욱 적극적인 윤리관을 천명하고 있다.

 이처럼 부조의 범죄를 고발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이러한 법의 정신은 부조를 포함한 親屬 容隱思想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춘추시대의 直躬이란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관가에 고발한 사실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공자는 “父爲子隱 子爲父隱”이라고≪論語≫에서 말하였으나, 法家의 韓非子는 직궁의 행위가 公直無私한 장려할 만한 행위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법 양가의 대조적인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유가의 至親 용은사상은≪춘추≫에도 나타나며, 한대의 유교주의가 보편화됨에 따라 더욱 확고하게 계승되었다. 이리하여 당률에 와서 예제화 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밖에 불효를 규제하는 형률로서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와 호적을 달리하거나 재산을 분리하거나, 그리고 공양을 소홀히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別籍異財, 供養有闕의 율을 마련하였다. 그 밖에 상중불효에 대한 형률로서 忘哀作樂雜戱, 釋服從吉, 匿不擧哀, 조부의 상을 사칭한 求暇, 喪中稼娶 등에 관한 율이 있다.

 다음에는 악역이란 형률이 있다. 이는 10악 중에서도 불효행위의 극단을 이루는 것으로 부모나 친속에 대한 구타와 모살 등을 처벌하는 것이다.≪고려사≫형법지 대악조에는 조부모나 부모를 구타하였을 때에는 斬이며, 告詈하였을 때에 絞, 잘못하여 상처를 내었거나 과실로 욕한 자는 徒 3년, 과실로 구타했을 때에는 流 3,000리를 가한다는 율문이 있다.

 고려율이나 당률에서 볼 때에 악역의 핵심이 되는 것은 부모나 조부모에 대한 구타행위와 모살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율에는 모살에 대한 조문이 보이지 않고, 당률에서는 모살에 대하여 名例律 10악의 악역에 관한 註에 삽입하였을 뿐, 실제로 그 악덕행위를 처벌할 규정인 賊盜律에는 설정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親弑가 인륜 예교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그 율문조차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불상사가 발생하면 그 처벌은 극형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부조에는 비교될 수 없는 期親尊長 즉 伯叔父母나 兄姉의 살해를 음모한 행위로 참형에 처할 뿐 아니라, 단지 ‘毆祖父母父母者’가 참형을 받으므로 친시란 더 이상 적용할 형량이 없지만 결국 극형을 받게 됨은 물론이다. 따라서 당률을 따르고 있는 고려율에서 친시에 관한 율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당률의 예교적 정신을 받아들인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중국이나 고려사회에 있어서도 친시사건이 실제로 발생하였다. 일찍이 춘추시대 邾婁定公 때에 弑父者가 있었는데 그를 극형에 처한 것은 물론, 그 집을 헐어버리고 그 터에는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하였으며 군주는 한 달 동안 술을 금하였다고 한다.532)≪禮記≫檀弓 下. 고려시대에도 실제로 부조를 구타한 사건이나 부모를 시해한 사건의 사례가 여려 건 보인다. 이러한 시해 사건에 대한 형량을 보면 죄인의 棄市와 斬首梟市, 해당 지방 수령과 관원의 파직 등의 처벌이 있었다. 이것은 춘추시대 주루정공의 판례를 준용한 것이다.

 위에서 살핀 바에 따르면 불효자에게는 형률에 따라 준엄한 처벌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효자이면서도 요행히 관직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불효 사실이 드러나면 司直의 탄핵을 면할 길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불효자는 엄중한 형률에 의해서 처벌될 뿐 아니라, 한 번 불효를 저지르게 되면 당사자와 더불어 그 자손에게까지 연루되어 여러 가지 국가적 사회적 특전이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첫째 불효자의 자손에 대해서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였다. 즉 靖宗 11년 4월의 判에서 五逆五賊과 不忠不孝者는 과거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였으며, 불효자는 자손에게까지 학교의 문도 막혀 있었다. 그리고 불효자에 대해서는 사면령에서도 그 혜택을 베풀지 않을 만큼 중죄로 취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더 유의할 것은 불효자를 恤刑의 대상에서도 제외시킨 점이다. 유교정치 이념에 있어 사면은 군주의 失德을 보완하는 작용으로 간주되었는데 불효자의 사면은 오히려 재화를 초래한다고 믿을 만큼 천지도 용납하지 못할 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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