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3. 유학사상의 실천적 전개
  • 2) 효와 예
  • (3) 유교의 실천윤리

(3) 유교의 실천윤리

 고려시대 유교정치 이념의 수용과 그 전개를 규명하기 위하여 이미 앞 항에서 효를 중심으로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고려사회가 유교주의사상을 그 정치체제의 실천윤리로서 정립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예교의 정비와 더불어 법률질서를 더욱 적극적으로 정비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검토로는 효사상의 실천을 위한 고려의 여러가지 실천적 노력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도에 따라 과연 어떠한 효행이 고려사회에서 실현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고려시대 효행의 실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당대 유교윤리의 실천과정에서 5교 또는 5륜사상의 전개와도 유기적 관련이 있었음을 해명하게 될 것이다.533)李熙德, 앞의 책, 249∼288쪽.

 효행의 실제에 대하여서는 특히 중국에서 전래된 이른바 24효 등의 효행 유형과 대비하면서 고려사회에 나타난 그 유형을 살펴보고, 또 당시 신앙면에서 보편적 위치에 있었던 불교와 효사상과의 관계를 아울러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당시 유교와 불교와의 효를 통한 사회적인 교섭면을 밝힐 수 있으며, 그 결과 불교에서도 유가의 효사상의 실현을 측면에서 지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5륜사상의 전개에 대해서는 효사상의 확대·발전으로서의 군신·부부·장유(兄弟)·붕우의 네 가지 倫常이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5륜 중에서도 결국 그 중핵을 이루는 충과 효에 대하여 다시 대비함으로써 당대 정치윤리의 심화현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24효와 효행의 유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효를 유교의 실천윤리로 실천함에 따라 많은 효행이 실제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더러는 허구적인 효행담이 발생하여 효에 대한 신비적인 영험을 강조함으로써 더욱 그 사상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이른바 24효, 혹은 240효라 하여 효행에 탁월한 역대 인물의 행실을 모범으로 삼고 이것을 널리 선전함으로써 효윤리의 보편화에 힘썼다. 효행에 대해서는 일찍이≪晋書≫권 88, 孝友篇에서부터≪淸史稿≫권 502, 孝義篇에 이르기까지 역대 사서에서 독립된 편목으로 기록하여 길이 후대에 전하였다. 그리고 남송의 趙孟堅에 의한≪趙子固 24孝書畵合壁≫은 전형적인 효행담의 집성이라 하겠다.≪조자고 24효서화합벽≫은 효행을 圖說, 즉 그림과 설명을 붙여 일목요연하게 나타냄으로써 무지한 민중도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효행 사적이 독립된 편목으로 다루어진 것은≪三國遺史≫권 9에 실린 孝善篇이 그 시작이다. 이 효선편의 내용은 신라시대의 것들인데, 眞定師孝善雙美, 大城孝二世父母, 向得舍知割股供親, 孫順埋兒, 貧女養母 등에서 向得의 경우를 제외하면 불교적 효관념을 중심으로 효행을 기록한 것들이다.

 고려시대에 權溥는≪孝行緣≫을 편찬하였는데, 그 서문에 의하면 일찍이 권부의 아들 準이 工人을 시켜 24효자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의 사위 益齋 李齊賢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을 쓰게 하였다. 그 뒤에 준은 이것을 아버지 권부에게 보였으며, 권부는 다시 38가지 효행기사를 보충하고 찬은 역시 이제현에게 맡겨서≪효행록≫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62효행기사로 늘어난≪효행록≫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다음≪고려사≫권 121의 孝友列傳은 충의, 열녀전과 함께 당대 유교적 실천윤리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효행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는 세종 14년 集賢殿 提學 偰循에 의해≪三綱行實≫이 편찬된 이래≪東國新續三綱行實≫등은 물론≪慶尙道地理志≫,≪慶尙道續撰地理志≫나≪增補東國輿地勝覽≫등에서 지방 출신별로 효자 항목을 넣고 시대별로 신라·고려·조선시대에 있었던 효행 사적을 열녀와 함께 수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효행 사적 중에서 고려시대 효행의 유형을 중국의 효행, 특히 24효의 유형과 대비하여 이 시기에 있어서의 효행의 실상을 구명하여 보려고 한다. 중국에서도 24효의 유형은 몇 가지로 달리 나타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앞서 본 조자고의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그런데 조자고가 제시한 24효는 권부의≪효행록≫과 비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효행록≫의 경우, 앞 부분의 24효는 권준에 의해 선정된 것이며 뒷 부분의 38효는 권부 스스로가 추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권준에 의한 24효의 효행 사실과 조자고의 24효와 비교하면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15사항이며 다른 것이 9항이다. 그러나 권부가 보충한 38명의 효행자 가운데는 다른 9항의 행적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중국에 전승된 24효의 유형이 이미 고려사회에 전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趙子固 24孝書畵合壁≫의 순서에 따라 권부의≪효행록≫과 대비하면서 고려사회에 전래된 효행의 유형과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① 虞舜의 孝感動天
  虞舜은 지극히 부모에게 효행을 했기 때문에 하늘이 감응하여 歷山에서 밭을 갈 때에 象鳥가 원조하였는데 堯임금이 이것을 듣고 뒤에 帝位를 선양하였다는 것이다. 고려 권부의≪孝行錄≫에서는「大舜象耕」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내용도 같다. 고려시대를 통하여 이와 같은 유형의 사례는 볼 수 없다. 그러나 李穀의≪稼亭集≫趙苞忠孝論에서 이를 상세하게 논하고 있는 것을 보면 舜을 위대한 효행의 儀表로 예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晋 楊香의 搤虎救父
  진나라의 15세 소녀 楊香은 아버지를 물려는 호랑이를 쫓고 그 생명을 구했다. 고려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高麗史≫孝友列傳에 실린 崔婁伯傳이다. 즉 15세의 소년 婁伯은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도끼를 들고 달려가 그 호랑이를 죽이고 뱃속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骸肉을 꺼내 장사 지냈으며, 3년간 흙을 져서 무덤 위에 덮고 廬墓까지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③ 晋 孟宗의 哭竹生笋 ④ 晋 王祥의 剖冰求鯉 ⑤ 漢 郭巨의 爲母埋兒 ⑥ 魏 王裒의 聞雷泣墓 ⑦ 漢 蕫永의 賣身葬父 ⑧ 漢 丁蘭의 刻木事親 ⑨ 宋 朱壽昌의 棄官尋母 ⑩ 周 剡子의 鹿乳奉親 ⑪ 周 仲由의 爲親부負米 ⑫ 周 老萊子의 戱綵娛親 ⑬ 漢 文帝 親嘗湯藥 ⑭ 漢 江革의 行傭供母 ⑮ 漢 陸續의 懷橘遺親 (16) 周 閔損의 單衣順母 (17) 晋 吳猛의 恣蚊飽血 (18) 蔡順分椹 (19) 齊 庾黔婁의 嘗糞心憂 (20) 周 曾參의 嚙指心痛 (21) 漢 黃香의 扇枕溫衾 (22) 唐 崔山南의 乳姑不怠 (23) 漢 姜詩 涌泉躍鯉 (24) 宋 黃庭堅의 親滌溺器

 위에서 중국의 孝行例 24가지를 들었으나 여기서 모두 고려시대의 효행 사례와 대비할 수는 없다.534)자세한 내용은 李熙德, 위의 책, 252∼261쪽 참조. 그러나 이것을 서로 대비하여 보면 24효 가운데 대부분의 효행 유형이 신라 이래 고려시대에 걸쳐 한반도에 보급 전파되어, 그와 유사한 형태의 효행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효행이 비록 실제로 실현된 예가 없다 하더라도 문인 등 지식인의 작품에서 비유 인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의 24효와 대비되는 고려시대의 효행 사례 이외에≪고려사≫효우열전과≪삼강행실≫≪동국삼강행실≫≪신속동국삼강행실≫≪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효자편에 나오는 효행자 가운데 몇몇 특이한 효행자를 덧붙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徐積의 沍寒生蛙
  徐積의 孝心에 하늘이 감동하여 嚴冬에 生蛙를 주어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였다. ② 余孝悌의 感烏
  晋州入 余孝悌가 지극한 효도로 어머니의 무덤에서 廬墓하던 중 까마귀를 감동시켰다. ③ 車達 棄妻
  全羅道 雲梯縣 祗弗驛民 車達 3형제는 지극한 정성으로 노모를 봉양하였는데, 車達은 노모에게 不謹한 아내까지 버렸다. ④ 金遷 贖母
  고려 말 江陵府吏 金遷이 몽고에 잡혀가 노예생활을 하는 어머니를 백금 50량으로 贖錢하고 구출하였다. ⑤ 尹龜生 刻石立碑
  判典農事 尹龜生이 家廟를 세우고≪朱子家禮≫에 의한 三代祖祭를 지내고 또 묘 앞에 碑와 齋室을 세웠다.

 이 밖에 인종 때의 鄭知常은 개경의 관직생활로 노모를 봉양하지 못하자 자신이 까마귀만도 못하였음을 후회하고, 또 老萊子의 효행을 본뜨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그리고 牧隱 李穡의<永慕亭記>에 실린 郭麟의 아들 郭之泰와 손자인 郭忠秀의 효행을 찾아볼 수 있으며,535)李 穡,≪牧隱集≫文蒿 권 4, 永慕亭記.
≪東文選≫권 74, 永慕亭記.
吉再의 誠孝를 들 수 있을 것이다.536)吉 再,≪冶隱集≫行狀.

 이상에서 고려시대 효행 사례를 먼저 중국에서 전승되어온 24효와 대비하여 보았고 이어서≪고려사≫의 효우열전과≪삼강행실≫등에 실린 효행 사례 중 특이한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정지상의 사례와 목은 이색의<영모정기>에 실린 곽린 자손의 효심 및 길재의 성효 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저명한 당대의 문인 학자이며 지식 관리들이어서 그들이 익힌 유교적 교양에 의한 효행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증만으로는 고려사회 전반에 걸친 효의 실태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앞서 본 고려 일대의 효행자 중에는 하급관리나 향리 및 평민·천민들의 행적도 들어 있으므로, 효사상이 널리 민간에 침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는 불교의 효사상을 살펴보겠다. 고려시대에 있어 불교는 고려인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므로, 당시 점차 제고되고 있었던 유교정치이념과 매우 대척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崔承老의 봉사 중에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현종 때의 蔡忠順이 ‘儒釋二門皆宗於孝’537)<高麗國靈鷲出大慈恩玄化寺碑陰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247쪽.라고 한 데에서도 유·불의 和會的 조화가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점차 정치·사회면에서 기반을 넓히고 있던 유교사상의 도전에 대한 불가의 이러한 반응은 自家의 護敎를 위하여도 부득이한 것이었다. 일찍이 유교주의적 사회인 중국에 불교가 수용되었을 때도 불교는 유교와의 융합점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는 유교와 대립되는 실천윤리 중에서도 그 핵심을 이루는 효윤리에서 하나의 교섭점을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불교는 부모에 대한 효사상을 담은 경전을 정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 경전은 원래 불교 자체에 있었던 효행과 관련된 소재를 기초로 삼아 이를 유교적 효행과 유사하게 꾸미거나 혹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조하여 성립되었거나 더러는 순수한 중국적 불교의 僞經類로 등장하게 되었다.

 효에 관한 불교 경전으로는≪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석가가 成道 후 곧 도리천에 있는 어머니 摩耶夫人에게 설법하기 위해 승천하여,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고 석 달 동안 효양을 지극히 행했다는 것이다. 이 경전은 후세의 불교도들이 유가의 공격에 대해서 늘 석가의 효를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 밖에≪六方禮經≫≪長阿含經≫≪孝子經≫≪孝子報恩經≫≪孝子攝經≫≪睒子經≫≪盂蘭盆經≫≪佛說父母恩難報經≫≪大方便佛報恩經≫≪大無量壽經≫≪觀無量壽經≫≪父母恩重經≫≪梵網經≫등 실로 효사상을 담은 많은 경전을 남기게 된 것이다.

 효를 설한 이러한 경전이 불교의 전래와 수용에 따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을 것은 필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은 자료로서는≪범망경≫≪부모은중경≫, 그리고≪우란분경≫등 몇몇 효경전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범망경≫은 일찍이 元曉의 저작에서도 발견되므로 그 전래시기가 자못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부모은중경≫은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 현종 때에 그 존재를 확인할 수가 있다.

 한편≪우란분경≫은 大覺國師 義天의 문집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는데,≪目連經≫과 함께 고려시대 이래 성행되었던 盂蘭盆齋의 所依經典으로 중요시되었다.≪우란분경≫의 내용은 餓鬼道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출하는 것으로, 매년 7월 15일에 우란분회를 지내면 그 공덕에 의해 현재의 부모는 수명이 100세 무병하며 일체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7세의 부모도 三塗의 苦界로부터 벗어나서 生天하고 福樂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목련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고려사≫권 12, 예종 원년 7월조에 숙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목련경≫을 강설했다는 것이다.≪목련경≫은≪佛說大目連經≫으로서 이 땅의 불교도들이 가장 많이 믿고 있는 경전의 하나라고 한다. 또 이 경은≪父母恩重經≫이나≪八陽經≫과 함께 한국의 僞撰經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538)閔泳珪,<月印釋譜第二十三殘卷>(≪東方學志≫6, 1963).

 어떻든≪우란분경≫이나≪목련경≫은 大目連尊者의 효행을 담고 있는 점에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이 우란분재 등 불가의 부모보은사상을 전파하는 데 고려 이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란분재는 우리나라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고려 초기를 제외한 전시기에 걸쳐 행해졌던 것이다.

 이어서 고려시대 승려들의 효행 사례를 살펴보겠다. 먼저 대각국사 의천의 경우를 보면 그는<講盂蘭盆經發辭>에서 “五刑이 三千이지만 불효만큼 大罪는 없고 六度에 돌아가는 것이 八萬이지만 효도만한 大福은 없다. 釋門의 5時와 儒典의 6經은 모두 대소를 휩싸고 존비를 일관하는 것이니, 비록 베푼 가르침은 다르다 하더라도 효도를 숭상하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다.539)≪大覺國師文集≫권 3. 여기에서 의천이 지니고 있던 불교적 효사상을 명백하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의천은<蘭盆日燒臂發願疏>에서 燒臂의 고통을 통한 지극한 효도를 실천하여 온전한 효도의 성취를 서원하였으며,540)≪大覺國師文集≫권 15. 이러한 효심은 또한 그가 송나라 체류 중 부왕 문종의 영전에 바친<祭文王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541)≪大覺國師文集≫권 16.

 다음 普覺國師 一然의 경우는,≪삼국유사≫에 효선편을 마련하여 불교적 효행과 함께 일반적인 효행까지도 아울러 편찬함으로써 효행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또 그 자신이 지극한 효행의 실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국사로서 충렬왕 9년에 이미 노령임에도 90대 노모의 侍養을 위하여 귀성하였으며 더욱이 아침 저녁으로 시양과 간병을 친히 다 하였다.542)<義興麟角寺普覺國師靜照塔碑銘>(≪朝鮮金石總覽≫上), 471∼472쪽.

 이 밖에 白雲 景閑和尙(1298∼1374)의 효심, 無隱庵師 李氏의 효행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들 승려들은 직접 부모를 위해 추천하거나 또 현세적 효행을 실천한 이들이다. 특히 無隱庵師 李氏는 侍養과 廬墓로써 3년상을 치를 만큼 유가적 효와 같은 효행의 실천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 불교적 효의 실천은 당시 유가로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더욱이 고려시대에는 왕실을 매개로 불교와 유교가 이원적으로 병존하는 이념이었다. 따라서 유가로서는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배교는 불가능하였고 다만 효윤리에 있어서라도 일치할 수 있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교적 지성들도 불교의 내세적·신앙적 속성을 인식하고 교양으로서, 신앙으로서의 위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유교와 불교는 피차 용납될 수 있었고 또 그러했던 것이다. 많은 유신들이 스스로 원찰을 가지고 있었고, 국사나 왕사 등 고승들의 탑비명을 썼으며, 많은 문사들은 문학 활동에서 불교사원과 관계를 맺거나 승려들과의 교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문학적 활동은 불교적 교양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다. 과연 고려시대의 문화는 불교의 내세적인 면과 유교의 세속적인 면을 잘 조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려시대 유교 자체의 사상적 미숙성이라는 한계에서 연유하였음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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