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3. 유학사상의 실천적 전개
  • 2) 효와 예
  • (4) 5례

(4) 5례

 고려사회는 성종 때부터 특히 유교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정비하는 데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국가이념을 확충해가는 과정에서 5례체제도 적극적으로 갖추기 시작하였다.543)五禮에 관한 서술은 주로 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46∼47쪽에 의함. 그리하여 고려가 5례제도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은 예종 때로 잡고 있다. 이와 같은 5례제의 이론적 정비작업을 이룩한 것이 崔允儀의≪古今詳定禮≫이다.

 ≪고려사≫권 59, 예지의 서문에서는,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웠을 때에는 초창기라 예제를 정비할 겨를이 없었으나, 성종 때에 와서 圓丘·社稷·籍田·宗廟 등 祀典을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종 때에는 예제를 관장할 관청을 설치하였으며, 의종대에 와서는 平章事 최윤의가≪상정고금례≫50권을 편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에 예제 정비작업이 전면적으로 진전되었다 하더라도, 중국 전래의 5례제가 충실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며 고려에 필요한 내용만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 뒤 고려에서 유교사상을 이념화하는 가운데 유학 교육기관을 심화하고 확대하면서 아울러 예사상의 이론적 바탕을 축적하고, 한편으로는 과거제의 실시로 인하여 그 시험과목에 또 禮書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고려에서도 전면적으로 5례제를 수용하고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학 교육기관의 교과 내용에는 국자감의 경우≪周禮≫≪禮記≫≪儀禮≫등 이른바 3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 私學의 중심이라 할 최충의 9재학당의 교과목에도≪예기≫와≪주례≫가 편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뿐만 아니라 관학 부흥정책으로 추진된 예종의 7재 중에도≪尙書≫≪周易≫등 경전과 함께≪주례≫≪예기≫≪의례≫의 예서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거제도의 측면에서 보면 명경업의 고시과목에≪예기≫가 필수였음은 물론 제술업에서도≪禮經≫이라 하여 예서가 또한 試取과목으로 되어 있었다. 이와 더불어 禮業이라 하여≪예기≫≪주례≫≪의례≫의 3례서를 시험과목으로 한 관리 등용제도가 있었음이 주목된다. 명경업의 일부 과목을 부과한 이 3례업이 왜 별도로 설치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3례업이 3례를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고려 초기의 예제 정비과정에서 이러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실무관료의 선발을 위해 설치된 것이라 추측된다.

 이상과 같이 고려사회에서 유교사상에 의해 정치이념을 정립하는 과정을 교육과 과거 등을 통하여 볼 때 중국의 5례제 수용을 위한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그 지반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례란 吉·嘉·賓·軍·凶禮를 말한다.≪주례≫에 의하면 귀신에 대한 제례와 상사, 군사, 외교 및 접객·경사 등의 의례를 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규범화한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 5례제가 등장한 것은 晋나라(265∼420) 때였으며 이것이 제대로 정비된 것은 당나라에 이르러서였다. 고려에서 5례제를 수용하던 틀은≪주례≫를 바탕으로 하여 당·송의 예제를 모방하고, 한편으로는 고려사회의 현실에 맞도록 적절히 변용한 것이었다. 특히 당의 예제에 있어서는≪開元禮≫의 영향이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5례의 첫째는 吉禮로서, 天神·地神·人神에 대하여 왕이 국가를 대표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즉 祀天儀는 大祀로서 천명을 받은 군주만이 행할 수 있는 의례이며, 국가의 안녕을 비는 제전이다. 嘉禮는 왕실로부터 서민에 이르는 광범한 사회계층을 포함하는 의례로서 역시 왕이 중심이 된다. 이는 冠禮·婚禮·冊封禮 등을 내용으로 한 것이며, 왕실 의례의 격조와 위엄을 특별히 나타냄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기능을 갖는다. 賓禮는 국제간의 친화를 도모하기 위해 규범화한 제도이다. 이것은 국제외교에서 왕이 국가를 대표하여 국가간의 위상을 의례 규범에 나타내고, 대내적으로는 지방관과의 관계에서 왕의 권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軍禮는 국가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군사에 관한 의례로, 군주가 군사에 있어 절대적인 책임과 권위를 갖는다는 점을 의례를 통해 상징하는 것이다. 凶禮는 국가의 재난·질병·사망 등의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하기 위한 의례이다.

 이와 같이 5례의 대략을 살펴보았는데 첫째로 길례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祭天禮이다. 조선은 제후국이란 명분 때문에 제천례를 圓丘壇에서 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천명사상에 의해 圓丘와 方澤 그리고 太廟 등의 제사에서 당제와 대등한 의례를 행함으로써 당제국과 같은 위상을 드러내었다. 천제인 상제와 함께 고려 태조가 배향되고, 태묘의 경우 중국의 천자에 준하는 특별한 의례로 보이는 玉冊이 사용되었으며 천자 7묘라는 규범에 따라 太祖廟와 더불어 3昭 3穆으로 7묘제가 행해진 것 등에서도 당과 대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빈례의 경우에는≪주례≫의 고전적 개념에서 변용되어 당나라와 같이 왕과 제후와의 관계가 아니라 주변국가와의 관계로 설정하는 의례로 정립되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의 대외관계에서 고려는 중국의 북방 제국과 비교적 대등한 외교관계를 시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고려왕은 사신을 접견하는 의식에서 주인을 상징하는 동편의 섬돌과 길을 사용하였으며, 신하로 상징되는 북향하는 자리에는 서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군례의 경우에도≪주례≫의 고전적 개념에서 벗어나 대외적 질서 개념으로 바뀐 당의 군사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군례의 내용에서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고 강조하려는 이론적 근거는≪예기≫에서 원용하고 있다. 고려가 5례의 범주에 군례를 편제하면서 유교의 기본사상을 깔고, 다시 고려사회의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규범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례의 경우에는 왕실의 정치적 권위를 위한 가례의 틀을 충실하게 지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주례≫의 기본이념을 유지하면서 당·송의 예제도 모방하고, 한편으로는 고려사회 현실에 적합하도록 재편한 것이다. 특히≪주례≫의 飮食之禮·昏冠之禮·賓射之禮 등의 내용과 정신이 고려의 가례 항목에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가례가 왕실 중심으로 실시된 것은 그것이 왕실 중심의 의례라는 점도 있겠으나, 고려시대에 유교사상이 아직 왕실 내지 지배층에 머물렀을 뿐 널리 민간에까지 확산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高麗史≫의 禮志 凶禮條는 國恤, 陳慰儀, 祔太廟儀, 上國使祭奠贈賻弔慰儀, 先王諱辰眞殿酌獻儀, 上國喪, 隣國喪, 諸臣喪, 五服制度, 百官忌暇, 重刑奏對儀 등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들 의례는 당의≪개원례≫에 보이는 周禮的 요소 가운데 상례에 해당되는 것만을 확대 수용하였다. 그러므로≪고려사≫의 흉례에서는 荒禮·吊禮·示會禮·恤禮 등이 탈락되고 喪禮의 내용만이 수용되어 있다.

 고려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세움에 따라 자연히 중국의 유교 경전에 근거한 예제와 고려사회에 전승되어 온 전통적 요소를 융화하여 5례제를 정비 운영하였다. 그러므로 유교 경전에서는 3례서의 하나인≪주례≫가 기본을 이루고 있었으며, 때로는≪예기≫도 원용되었다. 그리고≪주례≫가 지니는 역사적 한계 때문에 당제나 때로는 송의 예제까지도 원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정치·사회제도에서도 그 흐름을 같이한다.

 이상에서 먼저≪고려사≫오행지와 중국의≪후한서≫오행지 등을 분석·대비하여, 고려시대에 중국적 五行思想이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자연현상을 5행의 질서에 의해 분류하고 또 크게 咎徵과 瑞祥으로 양분하여 해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서상은 군주가 천명에 따른 이상적인 도덕정치를 이룬 연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곧 음양이 조화된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구징은 災異로서 자연현상에 나타나는 것으로 군주의 부덕한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이것은 음양이 조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한편 고려사회에 수용되었던 月令思想은≪예기≫월령편에 근거한 것으로, 군주가 월령에 따른 정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여러가지 재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양의 부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군주의 責己修德과 함께 월령에 의한 정사의 실천이 요청된다.

 天文思想에도 중국 사상이 수용되었다. 무릇 천문상의 천재는 군주의 부덕의 소치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치자에 대한 천견으로 인식하고 修省과 德治를 실천하여야 한다. 군주는 늘 지상의 자연현상을 통해 5행적 질서에 따른 천의를 살피는 동시에 또한 천문을 통해 천의 의지를 파악하여 천명에 순응하여야 한다. 일식이나 월식·성변 등 日月星變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은 역대 중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치자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견책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천변은 음양의 부조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군주에 의한 責己修德과 덕치의 구현을 통해 消災하여야만 하였다. 이것은 조화되지 못한 음양으로 인해 발생되는 재이를 군주의 행위로서 조화시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재이를 당한 군주는 이러한 천견을 해소하기 위하여 책기수덕하고 선정을 베풀어 천의에 보답함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가져오게 하고 아울러 재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주의 정치행위는 음양을 통하여 자연현상 전반에 작용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늘에 대하여 군주가 음양을 조화시키고 자연현상을 순조롭게 하며 상서를 나타나게 한다고 함으로써, 왕권에 적극적 의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주는 하늘과 인간 일반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민에 대해 초월적 위치에 서게 된다. 결국 현실적 왕권은 그 자체로서 인민에 초월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인민을 통치하고 교화하는 군주로서 이를 수행할 책임이 있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군주의 위치를 초월화·절대화함으로써 현실의 전제국가체제를 이론화한 것이라 하겠다.

 다음에 유교의 실천윤리에서 그 핵심을 이루는 효사상은 기본적으로 유교 사상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정과 자식이 부모에게 갚는 孝情은 우리나라 고대의 조상숭배 신앙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잠재적인 신념이 유교의 전래와 더불어 서로 접합되어 전통적 윤리규범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유교는 신라 이후 사상적 성장과정을 거쳐 새 시대의 정치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이러한 유교사상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그 심층적 바탕에는 효사상이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효경≫이 신라 이래 가장 중요한 윤리서로서, 위로는 군주로부터 지배층에게 필수화되고 나아가서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갔다. 따라서≪효경≫은 국자감 학식이나 과거의 바탕이 되었으며, 효행을 장려하기 위한 관리의 각종 휴가제가 정비되고, 부모를 위한 복수의 허용, 割股, 廬墓 등 극단의 행위가 효를 위해 허용되었다. 또한 효행자는 국가로부터 최대의 포상을 받고, 심지어 효자에게는 때로 천인신분을 양인으로 상승시켜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법률에서는 당의 10악률을 수용하여 불효에 대한 법률적 규제를 제도화하였다. 한편 불가에 있어서도 효행을 실천하고 유교 경전의 6경과 불가의 5時가 근원적으로 일치할 수 있다고 할 만큼 효를 매개로 상호 융통성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유교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고려사회는 효를 포함한 5륜질서를 예와 법으로 규범화하기에 이르게 되었으며, 또 그 실천적 열매로서 효우·열녀전 등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효의 윤리를 국가의 새로운 질서로 정립하고 있었던 것은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효경≫三才章 7에 잘 나타나 있다. 곧 “夫孝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효가 천지의 도 즉 天道·地道이며 민의 行 곧 人道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와 천도가 연속되어 있다고 하겠으며 다시 일체화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효경≫聖治章을 보면 군주는 그 父祖를 上帝·天에 배향하는 것을 최대의 효라 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神의 최고 권위인 동시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천자의 특권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군주가 부조를 상제·천에 배향하는 것은 상제와 천이 군주의 부조로 의제화되는 동시에 군주는 천·상제의 자·손에 擬定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효경≫에 의하면 군주는 명실상부한 천자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人道에 있어 최고 권위인 왕은, 천과 상제로서 인도를 넘어선 神道·天道의 최고 권위의 자손에 의정된다. 그러므로≪효경≫에 의하면 군주는 천과 천도에 이어진 천자로서 초인간적 성격을 띠게 된다.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5례제를 수용하여 왕실의 권위와 국가의 체통을 확립하게 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吉禮에서의 祭天禮이다. 圓丘와 方澤, 그리고 태묘 등의 제사에서 당제와 대등한 의례를 행함으로써 당제국과 대등한 위상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천제인 상제와 더불어 고려의 태조가 배향되었었다. 태조의 경우 중국의 천자에 준하는 특별한 의례로 보이는 옥책이 사용된 것이나, 天子7廟의 규범에 따라 太祖廟와 더불어 3昭 3穆으로 7묘제가 행해진 것도 당과 대등한 고려의 위상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고려가 5례를 정립함으로써 국가의 독자성을 드러내려고 한 강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태조를 상제에 배향함으로써≪효경≫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상제와 천이 곧 고려왕의 부조로서 의제화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시에 고려왕은 ≪효경≫에서 볼 수 있듯이 천과 천도에 이어진 천자로서 초인간적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李熙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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