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 도교사상
  • 1) 고려 도교의 수용과 전개
  • (2) 북송 도교의 수용과 복원궁 건립

(2) 북송 도교의 수용과 복원궁 건립

 고려 초기에는 왕실과 조정으로부터 도교에 요청되었던 것이 재초였던 만큼 이를 체계화하고자 하였고, 중기에 이르러 드디어 북송의 성립도교를 수용하여 科儀道敎를 확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재초소로 福源宮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고려의 대표적인 도관으로 한국도교사를 정리하는 입장에서 주목할 일대 사건이다. 그 건립과정에 대해서는 고려측의 자료가 거의 전하고 있지 않으므로 좀 더 자세한 중국측의 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중국측의 자료로는≪宋史≫(1343)와 徐兢의≪高麗圖經≫(1124)을 들 수 있는데, 전자는 후자에 수록된 사항을 간추린 것으로 생각된다.555)梁銀容,<福源宮 建立의 歷史的 意義>(韓國道敎思想硏究會 편,≪道敎와 韓國文化≫, 亞細亞文化社, 1988), 487쪽. 인종 원년(1123)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의 보고서인≪고려도경≫에는 북송 도교의 전래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

(宋)大觀 4년 경인(예종 5, 1110)에 천자(휘종)는 저 먼 고장(고려)에서 妙道를 듣기를 원함을 알고, 인하여 信使를 고려에 파견하고 羽流(도사) 2인을 從行케 하였다. 이들을 맞이한 고려 조정은 교법에 통달한 자를 골라 훈도케 하였다. 왕(亻吳)은 신앙에 篤實하여 政和년간(1111∼1118)에 비로소 福源觀을 세우고, 도의 터득이 높고 참된 道士 10여 인을 받들었다(≪高麗圖經≫권 18, 道敎).

 위의 기사에는 고려가 도교의 가르침을 요청함에 따라 북송에서 사신을 파견하면서 도사를 포함시킨 사실과 함께, 고려 조정에서 국내의 도사들을 배출 득도시키고 복원궁을556)학계에서는 福源宮 대신 흔히 福源觀으로 호칭하는 것은≪高麗圖經≫에 연유하지만,≪高麗史≫나≪高麗史節要≫를 비롯한 고려 당대 자료는 어느 것이나 ‘宮’으로 부르고 있으므로 바로 잡는다. 건립하도록 한 상황이 간략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예종은 도교신앙에 독실하여 복원궁을 건립함으로씨 도교의 전개에 새로운 장을 열고 있어서 주목된다.

 복원궁에 대한 기록이≪고려사≫에 나타나는 것은 예종 15년(1120) 6월의 재초기사이다.557)≪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5년 6월 정해. 그런데 이 재초는 예종 12년(1117)에 사망한 순덕왕후의 追善供養때문이었으므로, 당시에 중건된 安和寺가 그렇듯이 복원궁도 역시 왕후의 願堂的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관련지어 본다면 복원궁의 건립은 순덕왕후가 사망한 예종 12년 전후 즉 政和 말기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대문의 편액을「福源之觀」이라고 한 복원궁은 몇 가지 자료를558)徐 兢,≪高麗圖經≫권 17, 祠宇, 福源觀.
≪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의종 3년 11월 갑신.
≪高麗史≫권 83, 志 37, 兵 3, 看守軍 福源天皇堂.
아울러 보면<표 1>과 같은 규모의 도관인 동시에 王府에 소속된 궁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편 액 배 치 병 력 병 력 명 칭
궁 문 敷錫之門 雜職將校 2명 숙 위 군
대 문 福源之觀 散職將相 2명 숙 위 군
전 각 天 皇 堂 散職將相 2명 간 수 군
전 각 三 淸 殿    

<표 1>복원궁의 규모

 그렇다면 예종 때에 누가 어떤 요청에 의해 이와 같은 일을 추진했으며, 예종으로 하여금 독실한 도교신앙을 갖도록 하였을까. 다행히도 江左七賢의 한 사람인 林椿(?∼1170∼?)이 찬술한<逸齋記>는 이러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즉 예종대의 道敎逸士 李仲若(?∼1122)이 수련하던 곳인 逸齋에 대해 기록하는 가운데 복원궁의 건립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중약은) 후에 바다를 건너 송에 들어가 법사 黃大忠·周與齡을 좇아, 친히 道敎要諦의 玄關秘錀을 전수하여 환히 풀지 못함이 없었다. 본국에 돌아와서는 上疏하여 도관(玄館)을 마련해 국가를 위한 齋醮의 福地가 되게 하였으니, 지금의 복원궁이 이것이다. 곧 講席을 베풀고 큰 종(鴻鍾)을 울려 널리 현묘한 가르침(衆妙之道)을 듣게 하니, 도를 묻는 인사들로 門前成市를 이루었다(林椿,≪西河集≫권 5 ;≪東文選≫권 65).

 <일재기>에 의하면 이중약은 모친이 태몽에서 도사를 보고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道藏≫을 읽고 도교적 교양을 쌓았는데, 가야산을 거쳐 월출산에 일재를 세우고 도교를 숭신하며 丹學을 수련하였다. 그런데 의술이 뛰어나 병환 중인 숙종의 치료를 위하여 천거를 받고 개경에 나아가 동궁이었던 예종을 만났다. 예종이 등극함에 따라 관직에 올라, 侍講으로 도교 교양을 가진 권신 韓安仁(초명 曒如, ?∼1122)의 사위가 되었다. 형부상서 金商祐와 예부시랑 한안인을 비롯한 사신 일행이 예종 3년(1108) 7월 송에 갔다가 이듬해 6월 귀국했으므로,559)≪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3년 7월 을해 및 권 13, 世家 13, 예종 4년 6월 무인. 아마 이중약은 이 사절단에 소속되어 1년 남짓하게 송나라에 머물면서 도교의 요체를 두루 섭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송나라는「道君皇帝」로 불리던 휘종이 도교신앙에 기울어져 성행하던 불교를 도태시키고 도교를 흥행케 하던 시기이다. 즉 道官제도와 宮觀이 정비되고 道敎經卷을 대대적으로 補訂하여≪萬壽道藏≫을 성립시켰는데,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道藏≫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상황 아래에서 도교 교단은 과의도교를 확립시켜 도교의례가 빈번하게 행해지는 가운데, 종래의 外丹服用을 지양하고 內丹思想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오늘날 민중도교의 성전으로 불리우는 李昌齡의≪太上感應篇≫이 당시에 이루어짐으로써 도교가 매우 융성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에 응하여 이른바 혁신적인 3교단이560)蕭抱珍(12세기 초)의 太一敎, 劉德仁(1123∼1180)의 眞大道敎, 그리고 王重陽(1113∼1170)의 全眞敎를 말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內丹修練과 三敎合一思想이 강조되고 있다. 송대 도교의 흐름에 대해서는 傅勤家,≪中國道敎史≫(臺灣商務印書館, 1970) 및 窪德忠,≪中國の宗敎改革≫(法藏館, 1967) 참조. 창립되는 커다란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중약은 당시 북송에서 이루어진 성립도교의 교의사상과 수련체계 내지 교단조직 등을 널리 전수해 왔을 것이다. 북송의 휘종이 고려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그가 황대충 등의 도사를 경유하여 알림으로써 가능하였고, 그러한 인연으로 후일 인종 책봉사절단 속에 황대충이 참여하여561)인종 원년(1123)에 來朝한 宋 사신단 속에는 “法籙道官太虛大夫蘂珠殿校籍黃大中·碧許郎凝神殿校籍陳應常”(≪高麗圖經≫권 24, 節仗, 次上節) 등 2명의 도사가 참여하고 있는데, 이 중의 예주전 교적 황대중은 이중약이 從師했던 황대충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고려에 다녀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高麗圖經≫에 마치 송이 창건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복원궁은 이중약의 상소에 의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원궁이 ‘국가를 위한 齋醮의 福地’였다는 점에서 예종 이전의 재초 흐름을 계승하는 고려 도교의 왕조적 성격과 이중약의 입송 목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중약은 인종 즉위년(1122)에 한안인과 함께 李資謙 일파에 의하여 제거되어 유배지로 향하던 중 살해되었다.562)李資謙이 韓安仁·李仲若 등 朝廷重臣 50여 명을 제거한 이 사건은≪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즉위년 12월 병신과 권 75, 志 29, 選擧 3 및 권 97, 列傳 10, 韓安仁, 그리고 권 98, 列傳 11, 崔思全 및 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資謙, 그리고≪高麗史節要≫권 8 등에 자세하다. 이중약은 醫術(도교 의술)이 탁월하였으므로 다시 기용될 것을 염려한 이자겸 일파가 귀양처로 향하던 중에 살해하였는데 이자겸이 죽은 후 복위되었다. 그 때의 관직이 閤門祗侯였던 것으로 보아 그는 동궁 때부터의 관계로 인해 줄곧 궁중에서 예종을 시봉했었음을 알 수 있고, 그런 면에서 복원궁 건립에 대한 그의 상소가 관철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이중약의 활약 이후 고려 도교의 면모는 일신되었다. 복원궁이 건립되고 여기에서 도의 터득이 높고 참된 고려인 도사 10여 인을 득도시킨 것은 복원궁이 고려 도관의 총림격이었음을 말해준다. 도사의 배출은 도교 戒壇의 설치를 전제조건으로 하므로 왕부에 소속되었던 복원궁에는 官壇이 마련되었다고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복원궁의 성립을 계기로 授戒儀式이 정비되는 등 성립도교로 체계화되며, 재초를 중심한 왕실의 道敎儀禮作法도 정비되었다는 것이다. 이중약의 활동은 왕실의 요청,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종의 후원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거국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예종과 의종이 친히 복원궁을 찾아 재초를 베풀었다는 것은563)≪文獻備考≫권 37, 輿地考 25, 宮室 1, 歷代宮室. 그러한 사실을 전해준다.

 ≪고려도경≫에는 인종 초기의 상황에 대해 “예전에는 이 나라의 습속에 도교(虛靜之敎)를 듣지 못했으나 이제는 사람마다 다 귀의하여 신앙할 줄 안다고 한다”라 전하고 있다.564)徐 兢,≪高麗圖經≫권 17, 祠宇, 福源觀. 그리고 그 배경을 예종의 도교보급에서 찾아, 예종은 늘 도가의 경전(圖錄)을 보급하는 데 뜻을 두어 도교를 국교의 위치인 불교(胡敎)와 바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바가 있었던 듯하다고565)徐 兢,≪高麗圖經≫권 18, 道敎.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李圭景의 “고려의 齋醮科儀는 모두 宋朝와 같았다”는566)李奎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39, 道敎仙書道經辨證說. 설명은 매우 함축적이다. 후술하겠지만 현존하는 齋醮靑詞가567)도교에서 齋는 死者를 위한 의식(黃籙醮), 醮는 生者를 위한 의식(金籙醮)으로 구별된다고 하나(金勝惠,<東文選 醮禮靑詞에 대한 종교학적 고찰>,≪道敎와 韓國思想≫, 韓國道敎思想硏究會, 1987, 109쪽),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뚜렷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서는 合稱한다. 대부분 복원궁 건립 이후의 것이라는 점도 이러한 정황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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