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 도교사상
  • 1) 고려 도교의 수용과 전개
  • (3) 과의도교의 체계화와 도교의례

(3) 과의도교의 체계화와 도교의례

 예종 때 북송의 도교를 수용한 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은 빈번한 도교의식의 실행과 도교기관의 증가, 그리고 사상계 내지 문학계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도교의식은 왕실 내지 조정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이에 따른 靑詞가 작성되었고, 국가적인 작법의례는 호국신앙으로서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다. 그리고 도교기관은 그 증가로 말미암아 자연히 도교신앙을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조선시대가 되면 몇 단계에 걸쳐 혁파되어 종교교단으로서 발전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먼저 고려 도교의 특징을 科儀道敎로 성격지우는 도교의례를 살펴볼 때 靈寶道場의 문제를 언급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영보도량은 고려시대의 사서에서 산견되는데 종래의 학계에서는 불교의례로 인식되어 왔다.568)李能和,≪朝鮮佛敎通史≫上 (新文館, 1918), 293쪽.
權相老,≪高麗史佛敎抄存≫(寶蓮閣, 1973), 175쪽.
禹貞相 외,≪韓國佛敎史≫(진수당, 1968), 116쪽 연표.
徐閏吉,<高麗의 護國法會와 道場>(≪佛敎學報≫14, 1977), 90쪽.
한편 呂東■,<高麗時代 護國法會에 관한 硏究>(東國大 碩士學位論文, 1970)에서는 鎭魂祭로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도교연구가 부진한 데에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도교의례를 흔히 재초, 혹은 醮·醮祭·醮禮·祭醮 등으로 칭하는 통념 속에서 이른바 불교의례의「道場」으로 오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靈寶」569)≪隋書≫經籍志에 이르러≪道藏≫의 三通四輔 체제가 완성되는데, 그 중의 洞玄部를 설한 上淸宮敎主를「靈寶君」으로 받든다(陳國符,≪道藏源流攷≫, 古高書屋, 1975, 101쪽). 송대(1019)에 張君房·王欽若이 편찬한 縮約道藏의≪雲笈七籤≫권 3과≪靈寶略記≫권 16에<靈寶通玄自然九天生神章經>등이 수록되어 있다.라는 용어가 도교어휘인 것은 물론, 현존하는 관련 사료를570)梁銀容, 앞의 글(1985a), 65쪽. 종합해 보면 도교의례로서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영보도량에 관한 자료로는≪高麗史≫에 11회,≪東國李相國集≫에 2회,≪陽村先生文集≫에 1회 등 14회의 기록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고려사≫의 기록이 도량의 설행기록인데 대하여, 나머지는 醮禮文 즉 청사에 관한 것들이다. 설행장소는 13회 명시되어 있는데 康安殿 8회, 內願堂 1회, 內院 1회, 神格殿 2회, 복원궁 1회로 모두 대궐 내의 편전과 내원당 그리고 도관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설행시기가 확인되는 11회 중에서 최초로 보이는 원종 6년 2월 초하루를 제외하고는 10월이 9회, 9월이 1회이다. 특별한 사례를 제하고는 孟冬(음력 10월)에 설행되므로 恒例儀禮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왕실의례 중에서 2월의 연등회와 10월의 팔관회가 모두 신앙성이 깊었던 것을 상기하면,571)이에 대해서는 洪潤植,≪韓國佛敎儀禮の硏究≫(隆文館, 1976), 135∼143쪽 참조. 이 도량에서도 역시 도교의례가 항례적이었던 듯하다.<福源宮行天變祈禳靈寶道場兼設醮禮文>,<神格殿行天變祈禳靈寶道場兼設醮文>은572)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9.
이 밖에도<星變祈禳十一曜消災道場文>,<九曜堂行天變祈禳十一曜消災道場兼設醮禮文>과 같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영보도량의 설행목적과 초례에 관한 내용도 아울러 보여준다. 여기에서「천변」이라 한 것은 兵革을573)權 近,≪陽村先生文集≫권 29, 北帝神兵護國道場靑詞. 말하므로, 도량은 내란·외침을 鎭護祈禳하는 의례였고 따라서 제의적인 성격이 강한 재초를 겸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아울러 영보도량의 전개 과정에 주목해 보면 북송 도교가 전래될 무렵인 1108년에 휘종이≪金籙靈寶道場儀範≫을574)≪宋史≫권 20, 本紀 20, 휘종 대관 2년 3월 경신. 천하에 반포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도량의 儀軌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시의≪萬壽道藏≫에575)현존하는 道藏인≪正統道藏≫에는「靈寶」라는 명칭이 들어 있는 道典이 무려 173종에 달하며, 그 중 상당수가 科儀關係이다. 수록되었을 것이며, 예종 때 북송에 체재했던 이중약은 이들 작법을 익혔고 송에서 파견된 도사들도 이를 고려에 전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도관인 복원궁에서 영보도량을 설행한 연유도 거기에서 분명해지며 후일 조선시대의 도교의례 靈寶醮에서≪靈寶經≫을 독송한 것도576)≪經國大典註解≫後集 下, 禮典. 이 흐름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북송의≪금록영보도량의범≫에 의한 영보도량이 고려에 수용되어 도량과 재초로 설행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영보초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보도량은 불교의례가 아니라 도교의례임이 분명한데, 이를 포함한 도교의례는 34왕 가운데 21왕의 재위기간 중에 나타나며 총 222회로 집계된다.577)재위기간별로 보면 현종대(1009∼1031) 3회, 덕종대(1031∼1034) 1회, 정종대(1034∼1046) 5회, 문종대(1046∼1083) 14회, 선종대(1083∼1094) 10회, 숙종대(1095∼1105) 15회, 예종대 32회, 인종대 14회, 의종대(1146∼1170) 35회, 명종대(1170∼1179) 8회, 강종대(1211∼1213) 1회, 고종대 14회, 원종대(1259∼1274) 15회, 충렬왕대 25회, 충선왕대(1308∼1313) 2회, 충숙왕대(1313∼1348) 7회, 충목왕대(1344∼1348) 6회, 충정왕대(1348∼1351) 3회, 공민왕대(1351∼1374) 2회, 우왕대(1374∼1388) 9회, 공양왕대(1389∼1392) 1회 등이다(梁銀容, 앞의 글, 1985a, 68∼69쪽). 이를 다시 종류별로 보면 醮 90회, 三界(百宮)大醮 45회, 太一(九宮)醮 16회, 영보도량 11회, 十一曜醮 8회, 노인성초 6회, 王本命醮 5회, 북두초 5회, 삼청초 5회, 祭纛(馬祭) 4회, 五溫神醮 2회, 二十七位神醮 2회, 七十二星醮 2회, 南斗醮 2회, 助兵六丁神醮 2회, 消災道場 2회, 上帝五帝醮 2회, 月醮 1회, 下元醮 1회, 元辰醮 1회, 天皇大帝醮 1회, 天曹醮 1회, 開福神醮 1회, 魁剛醮 1회, 기타 4회 등이다. 설행목적은 祈雨 22회, 星變祈禳 3회, 祈(왕)病癒 2회, 祈風雨順調 2회, 祈兵捷 2회, 祈出鎭 2회, 禳火災 1회, 禳地震 1회, 祈農事 1회, 祈雪 1회, 禳災變 1회, 禳疾疫 1회, 禳溫疫 1회, 禳夜明 1회, 祈元子冊命 1회, 禳松蟲 1회, 禳蝗蟲 1회 등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왕의 친행에 의한 설초도량인데 문종·선종·숙종 3대에 걸쳐 39회나 설행되었다고 하면, 예종대에 이르러 국가를 위한 재초작법의 체계화가 크게 요청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리고 이중약의 입송과 북송 도교의 전래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리라 예상되는 예종·인종·의종의 3대에는 무려 81회나 행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당시의 북송 도교의 수용은 고려 내부에서 도교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했다는 측면에서 파악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7, 8종에 불과하던 醮名이 훨씬 다양해지고 빈번해졌던 것이다.

 도교의례, 재초가 행해진 장소의 다양성도 도교의 왕조적 성격을 반영한다. 도관인 복원궁이 7회에 불과한데 내전과 구정에서 85회나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578)설행장소는 내전 45회, 毬庭(궐정) 40회, 康安殿 27회, 會慶殿(宣慶殿) 15회, 구요당 10회, 乾德殿 7회, 文德殿(修文殿) 6회, 복원궁(천황당) 7회, 明仁殿 4회, 純福殿 4회, 南壇 3회, 정사색 3회, 신격전 3회, 各道宇 2회, 塹城 2회, 宮南門 2회, 賞春亭 2회, 氈城 2회, 내원당 1회, 노인당 1회, 奉元殿 1회, 崇福殿 1회, 壽春宮 1회, 大淸觀 1회, 壽康殿 1회, 玉燭亭 1회, 山乎亭 1회, 星宿殿 1회, 長樂殿 1회, 五部 1회 등이다(梁銀容, 앞의 글, 1985a). 設醮主가 왕이기 때문에 정전과 편전, 도관을 가리지 않았으며, 의식은 도사들이 거행하지만 조정중신들에 의해 靑詞가 작성되는 것을 비롯하여 거국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초명에 따른 명확한 구별은 없지만 정례적인 초는 삼계대초가 주종을 이루고, 왕의 수명 등을 기원하는 경우는 본명성수초, 기우에는 태일초가 주로 행해졌다. 삼계초는 國泰民安과 社稷守護를 祈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왕실의 설초목적을 집약한 것이라 하겠다. 왕의 발병이나 송악산에 송충이가 번지는 것이 모두 사직의 수호와 관련된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설초 기간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당일의 한 차례에 한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1주야를 행하기도 하며 기우를 목적으로 하는 초는 3일간 계속되기도 한다. 또한 초는 왕의 발병이나 외침 등의 외우내환이 생겼을 때, 또는 왕실에서 기복을 원하는 때에 設修케 되므로 일정한 시기는 없다. 매월 항례로 행하는 월초, 주로 매년 10월에 행하는 영보도량, 守庚申信仰과579)庚申日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불여진 이름인데, 몸 속의 三尸蟲이 경신일에 登天하여 上帝에게 善惡간의 모든 행위를 보고하여 禍福吉凶을 내린다는 뜻에서 三尸信仰이라고도 한다.≪太上感應篇≫에 이 사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민중도교의 유행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삼시신앙에 대해서는 窪德忠,<李朝の三尸信仰>(≪朝鮮學報≫37·38, 1965) 참조.의 관련은 분명하지 않으나 경신일에 설행된 예가 적지 않고, 초하루 혹은 보름을 택한 예도 흔하다. 그러나 설행 사례에 의하면 특정한 목적의 것을 제외하고는 작법·시기 등이 명시되는 예가 없으므로 도식화하기는 어렵다.

 도교를 살펴볼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초례에서 科壇이 어떻게 설치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도관에 道像이 봉안되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나 초례가 행해진 옥촉정에도 元始天尊像을 안치하고 월초를 행한 것을 보면,580)≪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2년 윤10월 경자. 당연히 궁중 전각에도 신앙의 대상인 道敎三寶 즉 도상과 도교 경전, 도사를 갖추고 도교의례를 설행했을 것이다. 이것은 과의도교의 체계화에 따른 것으로서, 고려 도교의 중요한 특징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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