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 도교사상
  • 1) 고려 도교의 수용과 전개
  • (4) 도관 건립의 증가

(4) 도관 건립의 증가

 도교의례가 道觀은 물론 궁궐에서까지 설행된 점은 도교 교양의 심화와 도교적 분위기의 확산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왕실의 호국신앙원리 즉 기복신앙에 의한 도교의례가 빈번히 설해진 것과 관련하여 도관이 눈에 띄게 증가되고 있다. 복원궁은 이러한 고려 도교의 총림격 도관인데 북송의 도교를 수용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후 도교 기관의 증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먼저 사서에 나타나는 고려시대의 도교기관을 정리하면<표 2>와 같다.

명 칭 설 치 시 기 폐 지 시 기 위치·구분 전 거·비 고
九曜堂 태조7년(921) 조선 태조원년 都內,
초성처
≪高麗史≫世家 1
氈壇 선종5년(1088)
이전
불 명 鹽州,
祭天壇
≪高麗史≫志 17
玉燭亭 예종 원년(1107) 고려말 연경궁,
전각
≪高麗史≫世家 12, 道像安置
星宿殿 예종5년(1110) 고려말 궐내, 便殿 ≪高麗史≫五星殿, 靈寶殿
福源宮 예종10년(1115)
전후
조선 태조원년 궐내, 도관 ≪高麗史≫世家 18 등
祈恩色 의종(1147∼1170) 명종8년 내전,
權務都監
≪高麗史≫世家 19,別例都監대치
大醮色 ≪高麗史≫
別例祈恩
都監
명종8년(1178) 고종4년 ≪高麗史節要≫15, 祈恩都監대치
祈恩都監 고종4년(1217) 고종45년 내전, 정사색대치
神格殿 고종42년(1255) 조선 태조원년 도내, 도관 ≪高麗史≫世家 24
淨事色 고종45년(1258) 내전,
權務都監
≪高麗史≫志 31, 재초도감
大淸觀 충선왕대 궐내, 東班 ≪高麗史≫四方에 別觀
昭格殿 불 명 조선시대 존속 도내, 도관 ≪太祖實錄≫권 2
燒錢色 조선 태조원년 내전,
權務都監
淸溪拜星所 불명,
초성처

<표 2>고려시대의 도교기관

 이들은 명칭과 기능 등에서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도관으로, 복원궁·신격전·소격전 등이 그것이다. 복원궁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서 이밖에도 같은 부류의 것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도교를 상징하는 복원궁이 조선의 건국과 함께 혁파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대신할 만한 도교기관이 조선시대에도 요청되었고, 결국 도관인 소격전이 존속한 것도 성립도교로서의 면모라 할 것이다.

 둘째는 초성처로, 구요당·청계배성소 등이 이에 속한다. 이것 역시 도관의 부류이지만 星醮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전단을 이 부류에 넣는다면, 강화도의 塹城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581)이는 한국고유의 仙脈과 성립도교에 포함된 선맥의 구분과도 관련된 문제이다. 성립도교의 흐름이 新羅 花郎의 맥과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상적 기반에 있어서 동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이 점 詳考할 필요가 있다. 참성단에 관해서는≪東國輿地謄覽≫권 42에서 “江華郡 塹城壇 世傳壇君(檀君)祭天處 本朝乃前朝之舊醮星于此祠”라 하고 있어서 양면의 파악이 함께 가능한 형편이다. 당시의 민간에서는 뚜렷한 구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셋째는 궁중의 전각으로, 성수전·대청관·옥촉정 등이 이에 속한다. 星宿나 太淸 등의 명칭이 도교적인 것으로 미루어 이들이 단순히 편전이나 東班에 그치지 않는, 즉 도교의례를 행하는 내원당격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도관인 大淸觀이 고려의 흐름을 이었던 점이나,582)李能和, 앞의 책(1977), 181쪽 이하 참조. 성수전이 인종 초에 五星殿으로 불리고 동왕 16년에 靈寶殿으로 불렸던 예가583)≪高麗史≫권 12, 世家 12, 인종 16년. 이를 증명한다. 적어도 도교의례가 거행되었던 점에서는 이들 외에도 궁중의 전각 중에는 도교적 요소를 지닌 것이 더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는 도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므로 내도량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넷째, 재초 등 도교의례를 위한 임시관청(權務都監)으로, 대초색·기은도감·정사색 등이 이에 속한다. 재초를 중심한 도교의례가 주로 내우외환의 국난에 처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것이었던 만큼, 고려 중기 이후 각종의 임시관청이 두어졌다. 유사한 임무의 기관이지만 시대에 따라 기은색·대초색(의종대)·별례금은도감(명종 8)·기은도감(고종 4)·정사색(고종 45)·재초도감(충선왕대)으로 명칭이 달라지고 있다.

 고려 도관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혁파되는데,≪太祖實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태조 원년 임신 11월 무인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도가의 星宿醮는 간결하고도 엄숙하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번다하지 않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어늘, 전조(고려)에서는 醮所를 너무 많이 두어 번다하고 專一치 못하였습니다. 앞으로는 다만 昭格殿 한 곳만 두어 청결을 위주로 하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받들되, 복원궁·신격전·구요당·소전색·대청관·청계배성소 등 여러 곳은 모두 혁파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이 말에 따랐다(≪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1 월 무인).

 즉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예조의 건의에 따라 고려시대의 도관을 모두 폐지하고 소격전 한 곳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문인 卞季良이<福源宮太一移排別醮禮靑詞>를 지은 것을 보면 복원궁이 그 이후 얼마쯤은 존속했었던 듯싶다. 그리고 조선 문신들의 소격전 혁파 움직임이 강력했는데도 몇 차례에 걸쳐 재건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도교의 기반이 굳건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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