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 도교사상
  • 2) 도교사상의 전개
  • (1) 도교사상의 확산

(1) 도교사상의 확산

 도교가 신앙인 이상 그것이 유행하는 데는 사회교화의 성격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고려시대에 도교와 관련이 있었던 인물로는 흔히 徐師昊·姜邯■·韓惟漢·李茗·郭輿·崔讜·李靈幹·權淸·韓湜·王允孚·偰賢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丹學系脈을 알려주는 서적에 나타나는 인물들로서, 역사적인 고증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이중약이나 후술할 靑詞의 작성자인 문인들이 배제되고 있음은 물론 서사호를 제외하고는 송과 고려의 도사 역시 언급되고 있지 않다. 고려의 도사에 대해서는 역사서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중국으로부터 왔던 도사가<표 3>과 같이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된다.

내 조 연 대 본국 도 사 이 름 관 련 사 항 전 거
예 종 5(1110) 도사2인 복원궁건립, 도사득도 ≪高麗圖經≫18
인 종 2(1124) 황대중·진응상 인종책봉사절 ≪高麗圖經≫24
충렬왕 20(1294) 韓志溫·李道實
李道知·尹道明
왕의 초청 ≪高麗史≫世家 31
충렬왕 24(1298) 도사2인 충선왕비 詛呪祈禳 ≪高麗史≫列傳 2
공민왕 19(1370) 서사호 산천제사, 明국위선양 ≪高麗史≫世家 2

<표 3>중국 도사의 來朝

 이와 같은 도사들의 내왕은 국내의 신앙사상계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예종과 인종 때는 당시 북송 도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들의 자료가 전해지지 않으므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고려 도교가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대 변혁기를 이룬 시대였던 만큼 사회사상에 그것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즉 송의 竹林七賢에 비견한 竹高七賢 곧 江左七賢의 사상이 그 일단이다.

 먼저 도교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서 고려왕인 예종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서긍이≪고려도경≫에 기술한 바와 같이 그는 모든 사람들이 도교의 가르침을 알고 숭신토록 하였으며 국교적 위치에 있던 불교의 위치에 도교를 올려 놓으려 했다. 이것을 보면 그가 도교에 경도되었던 것은 분명했던 모양이다.

 유학에 심취하고 시문을 즐겼던 예종은 일찍부터 도참신앙에 관심을 기울여 즉위년(1105)에 道詵讖記에 밝은 處士 殷元忠을 파견하여 東界山川을 순력시켰으며,584)≪高麗史≫권 122, 列傳 35, 金謂磾傳에 의하면 예종때 殷元中(殷元忠)은 道詵의 說로 상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1월 임술조에 의하면 內侍祗候 智祿延·主簿同正 殷元忠·司天少監 許藎卿·崔資顥 등을 보내 東界의 山川을 순력시켰다. 원년에는 유신들로 하여금 제가의 음양지리서를 모아 도참서≪海東秘錄≫을 편찬하도록 하였다.585)≪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원년 3월 정유.
≪高麗史節要≫권 7, 예종 원년 3월 정유.
은원충은 숙종 8년(1103) 무등산에서 불러온 인물로 청평거사 李資玄(1061∼1125)과도 친교가 두터웠으며, 이중약을 발탁하는 데도 역할한 것으로 보인다.586)梁銀容,<高麗道敎の福源宮について>(≪京阪論叢≫6, 1981), 41쪽. 그렇다면 예종을 내조한 이중약도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참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중약은 특히 金黃元(1035∼1117)·郭輿(1059∼1130)와 더불어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사귀어 神交라 일컬어졌다.587)李仁老,≪破閑集≫中.

 그런데 이자현과도 지우인 곽여는 烏巾鶴氅衣의 方外逸士로 예종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어 밤을 밝히며 시문을 논하고 주연을 갖는 인물이었다.588)≪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0년 9월 신미. 그가 도교적 인사임은 당시 사람들이 그를「金門羽客」으로 불렀다는589)≪高麗史≫권 97, 列傳 10, 郭尙 附 輿.
≪高麗史節要≫권 8, 예종 8년 3월.
데서도 분명하다. 예종 재위기간 중 곽여의 처소가 있는 순복전에서 4차례의 재초가 열린 것도 그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예종 13년(1118) 왕은 유신들을 위해 淸讌閣에서 한안인에게 명하여≪老子≫를 강의하도록 하였다. 곽여의 도교적 경세관이 유신들에까지 조직적으로 파급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며, 그의 시문이590)朴魯埻,<維鳩曲과 睿宗의 思想的 煩悶>(≪韓國學論集≫8, 漢陽大 韓國學硏究所, 1985) 참조. 도가적 성격을 갖고 있음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흐름이 달라진다. 즉위년(1122)에 조정이 이자겸의 손에 들어가고 고려 도교를 이끌어 오던 한안인과 이중약이 살해된 것이다. 이는 도교인맥의 와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차례 수용된 후 거국적인 이해와 홍보체제를 구축한 도교는 점차 확산되었다. 인종 9년(1131) 3월에 생도들에게 老莊學의 수업을 금한 조치는591)≪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9년 3월 갑자. 도교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강좌칠현의 隱逸文學思想이라 할 것이다.

 강좌칠현은 吳世才(1133∼?)·李仁老(1152∼1220)·林椿(?∼1190∼?)·咸淳(?∼1204)·趙通(?∼1197∼?)·皇甫沆(?∼1176∼?)·李湛之(?∼1204)를 말한다.592)≪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仁老.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이들이 도교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임춘이 쓴<일재기>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중약의 아들 상서 允修는 담지의 부친이다. 즉 담지는 이중약의 손자인데, 윤수는 아들 담지의 친구였던 임춘에게 부친 중약의 사적을 적어주도록 부탁하여<일재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예종대의 이중약을 중심으로 한 도교사상이 손자대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이자겸의 난 등을 거친 시대적 분위기가 은일적인 경향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겠다.

 중국 魏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환경 속에서 죽림칠현이593)죽림칠현은 山濤(205∼283), 阮籍(210∼283), 嵇康(223∼262), 劉伶(221∼300∼?), 向秀(221∼300∼?), 王戎(234∼305), 阮咸(?∼?)이다. 노장사상에 입각하여 淸談과 隱逸을 벗하던 것처럼, 강좌칠현 역시 經世論을 직접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玄學과 청담으로 시가를 즐기던 그들은 죽림칠현과 같은 도가적 분위기를 농축시켜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문학 작품에 나타난 도교사상은 避世와 隱逸思想, 仙界憧憬과 신선사상, 養生과 醉樂思想, 성수신앙 등으로 정리된다.594)李鍾殷 외,<高麗中期 道敎의 綜合的 硏究>(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道敎思想의 韓國的 展開≫, 亞細亞文化社, 1989) 참조.
이 밖에 강좌칠현에 대해서는 李鍾殷,<竹林七賢과 竹高七賢의 대비적 고찰>(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韓國道敎思想의 理解≫, 亞細亞文化社, 1990) 참조.
그러나 이들 도가사상은 당시의 사조였으므로 7현뿐 아니라 문인들이 널리 공유하고 있었으며,595)李演載,<高麗時代 漢詩文學의 仙的 主題樣相>(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道敎와 韓國思想≫, 범양사, 1987) 참조. 이 글에서는 83명의 작품 235수를 분석하고 있는데, 예종 이후의 인물이 대부분이며 강좌칠현 외에도 齋醮靑詞를 작성한 문인이 거의 망라되고 있다. 漢詩에 나타난 仙의 추구를 ‘不老長生의 希願과 理想鄕에의 동경’이라 보고 있는데, 이는 도교신앙 일반의 목적과 일치하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일반 서민 사회에도 신앙과 관련하여 널리 보급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역사서의 기록이 주로 도교의례 즉 과의도교적 성격으로 일관되고 있는 데 대하여, 조선시대의 도교로 전승되는 7현의 도가적 면모는 고려 중기의 도교가 성립도교로서의 사상적 체계도 확립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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