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 도교사상
  • 2) 도교사상의 전개
  • (3) 도교신앙과 그 사상

(3) 도교신앙과 그 사상

 고려 도교의 전체적인 면모를 사상사에 입각해서 볼 때, 북송의 성립도교를 수용한 예종5년(1110)을 경계로 변화를 보임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安珦(1243∼1306)이 性理學을 도입함(1286)으로써 사상계에 새로운 장이 형성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전후를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을 편의상 각각 제1, 제2, 제3기로 나눌 수 있는데, 도교는 이들 시기에 따라 다른 전개 양상을 보여 준다.

 3교를 등위로 보는 사상이 고려시대를 일관하여 유행했던 사실은 전술하였지만, 제1기는 후대와 비교할 때 구요당을 중심으로 한 재초가 도교의 명맥을 잇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 재초를 성립도교적인 면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 科儀作法이 완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2기를 마련하는 노력이 이 과의의 정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道敎典籍은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시대 이전부터≪老子≫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건국 초부터 호국신앙적인 흐름 속에서 불교·유교·도참 등 제신앙과 사상이 혼재하는 가운데 신선·노장사상 등을 포함한 도교사상이 고려사회의 일각에 유행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종대에 입송했던 이중약이 어렸을 때에≪道藏≫을 읽었고 또 도교의술에 밝았으며, 송의 도사가 왔을 때 도교 교의에 조예가 깊은 자를 선출했던 사실도 도교 전적의 유포와 함께 도교적 교양 내지 도교사상의 사회성을 입증한다.

 福源宮의 건립으로 상징되는 제2기는 한 마디로 고려 도교의 성립도교적 정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종 5년 송으로부터 두 명의 도사가 온 사실은 이러한 제2기의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려 도교의 총림격인 도관 복원궁이 마련되고 戒壇이 설치되어 도사가 배출되며, 각종 齋醮科儀가 정비 설행되었다. 예종 때에 도교를 장려한 결과 서긍이 왔던 인종 초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교의 가르침을 알고 신앙했었다는 것이다. 그가 예종 이전에는 도교의 가르침이 전혀 없다고 본 것 등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되나 어떻든 당대 풍속의 일단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인종 9년에 이르러 노장학을 금지시킬 정도로 도교사상이 풍미했다.

 이 시기에도 도교 신앙행위는 왕실의 재초를 중심으로 하였다. 복원궁 이후에 건립된 각종 도교기관에 도사들이 존재했으나,604)李能和는 “高麗代에는 복원관·대청관·신격전·정사색 및 구요당 등 醮祭하는 곳에는 도사를 두어서 그 일에 종사케 하였다”고 하였다(앞의 책, 1977, 118쪽). 그들은 승려들과 같이 강한 종교집단을 형성하거나 朝野에 널리 도교신앙을 전했다는 기록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재초를 설행함으로써 왕실의 기복신앙 행위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고려 도교의 과의도교적 특징을 여기에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교기관이 늘어나고 도교사상이 전개됨에 따라 신앙 행위도 병행하여 나타났다.

 그 좋은 예가 守庚申信仰이다. 수경신신앙에 관한 기록은 고려 말까지 두 차례가 기록되는데, 하나는 원종 6년(1225) 태자(충렬왕)가 수경신을 구실삼아 주연을 베풀어 밤을 지새운 기사이고,605)≪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6년 하4월 경신. 다른 하나는 國俗化된 신앙의 모습을 전하는 李穡의 시문이다.606)“歲關今夜是庚申 共說三尸事最神 瞪視莫敎過海眼 天庭咫尺王皇宸 兒女無知最可燐 猶如頭上有蒼天 明明不待三尸報 休把徵勞欲盖愆 貧家寂寂楞蒲戱 甲第紛紛玳瑁筵 銷沮閉藏猶可恕 酣歌恒舞適增愆”(李穡,≪牧隱詩藁≫권 6). 이것들은 도교신앙이 점진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제3기에 이르러 전대로부터 전승된 기복신앙에 대한 儒臣들의 비판이 일어났다. 신진문사들에 의하여 불·도 2교가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도교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의문이지만, 이후 조선 도교가 특히 丹學을 중심으로 한 수련도교의 성격을 띠었음을 생각할 때 고려 말에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때에 유행했던 재초는 조선왕실에 의해 몇 종류로 정비되어 수용되지만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 후대의 수련적 도교에서 중시되는≪黃庭經≫이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을 보면,607)<逸齋記>에서 이중약의 수련 과정을 묘사하면서 “黃庭在左 素琴在右”(林椿,≪西河集≫권 5)라 하였고, 李詹(1370∼1405)의<黃庭說>(≪東文選≫권 98) 등에서 중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말 수련적인 도교의 전개과정에서≪노자≫중심에서≪황정경≫중심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배태되었을 것이다.

 고려 말기의 도교에서 주목할 사항은 유신들의 배척운동이 있음에도, 사상적 전개에 있어서는 三敎鼎足의 치세관이 여전히 계승되었다는 점이다. 충선왕 원년(1309) 왕이 문신들을 불러 三敎業을 논의한 것이608)≪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3월 임자. 그 좋은 예이다. 여기서 3교업이란 왕실의 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직을 보전하고 왕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 3교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 후기에 이르면, 호국신앙으로서의 불교는 기복화의 색채를 더욱 짙게 띠며, 관학으로서의 유교는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經世治人의 새로운 시대이념을 제시하게 된다.

 이후 신진문사들의 등장과 함께 성리학이 유포되면서 불교비판의 소리가 팽배해지고 기복적 호국신앙으로서 불교와 궤도를 같이 하는 도교 역시 이단으로 배척된다. 그 대표적인 예를 조선의 개국공신 鄭道傳(?∼1398)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교의 가르침을 正道로 보고 성리학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도교를 主氣의 養生理念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609)“儒主乎理而治心氣 本其一而養其二 老主乎氣 以養生爲道 釋主乎心 以不動爲宗…” (鄭道傳,≪三峰集≫권 6). 흥미롭다. 즉 그의 도·불 2교에 대한 비판 역시 3교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것인데, 고려 말의 元天錫에게서도 나타나는 三敎一理思想은610)元天錫,≪耘谷詩史≫권 3, 三敎一理幷序. 후일 조선시대의 三敎會通思想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梁銀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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