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2.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과 도선
  • (1) 풍수지리설의 정의와 기원

(1) 풍수지리설의 정의와 기원

 風水地理의 기원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문제는 먼저 풍수지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선결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정의에 따라서 기원은 얼마든지 달리 설명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풍수의 정의는 풍수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설이 구구하다. 그러므로 논리 전개상 풍수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풍수의 정의부터 내리는 것이 옳다는 지적은 맞는 것이면서도 풍수지리의 기원 연구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문제는 풍수지리상의 용어들이 쓰이기 시작한 시점을 기원으로 잡을 것이냐, 아니면 풍수지리의 본질인 地氣를 느끼기 시작한 시점을 기원으로 잡을 것이냐를 결정해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한 논의 조차도 간단한 것이 아니다.

 먼저 저명한 교과서적 풍수지리 전적들에 나타나는 풍수사상의 정의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琢玉賦≫에서는 “수많은 지리서가 있으나 그 뜻을 묶으면 음양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 머무는 것이니, 음양의 기묘함을 꿰뚫어 알 때 사람 사이에 나아가 地仙으로 행세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611)≪地理琢玉賦≫, 陰陽歌(上海, 會文堂書局, 年代未詳).이라 하여 그 요체를 음양이라 파악하였다.≪雪心賦≫는 “地理의 理法에서는 坐向 방위에 대한 것이 논리를 세우는 처음”612)≪雪心賦辯謂正解≫辯論三十篇, 地理辯(臺灣, 竹林書局, 1975).이라 하여 방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靑囊經≫에서는 다시 음양을 내세웠고613)“人得陰陽玄妙之理 知其衰旺生與死”(≪地理正宗≫권 5, 靑囊 序).≪金彈子≫에서는 “지리에서 땅을 보는 일은 모두 다 龍이 主이고 穴이 다음이며 砂城과 水가 또 그 다음이다”614)≪金彈子地理元珠經≫巒頭心法(上海, 校經山房, 年代未詳).고 말하여 龍·穴·砂·水의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山法全書≫에서 더욱 분명하게 “풍수지리설을 요약해서 말하면 용·혈·사·수의 四法”615)≪地理大成 山法全書≫卷之首 上, 龍穴砂水釋名 總說(上海, 九經書局, 年代未詳).이라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옛 지리서의 공통적인 구조로 용·혈·사·수를 같이 다루어 온 것은 전통이었던 듯하다. 당의 楊筠松이 穴에 대한≪倒杖≫이라는 책을 씀으로써 4법을 분리 서술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풍수 기본서에서는 역시 이 방법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중국에서도 풍수지리의 이론이 확립된 훨씬 후대의 일로, 초기에는 地氣論에 중점이 두어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풍수지리서인≪靑烏經≫은 우주 만물을 음양 5행의 氣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인생의 길흉화복도 바로 그 기의 운행에 따른다고 하였다.616)文化財管理局 편,≪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墓地風水篇-≫(1989), 77쪽. 이 점은 葬縱이라고까지 추앙되는 東晋時代 郭璞의 ≪錦囊經≫에서도 마찬가지로, “장사지낸다는 것은 生氣를 타는 일”이라 하였고, 이어서 張說이 주해하기를 “만물의 생겨남은 땅 속의 것에 힘 입지 않은 것이 없다”617)≪錦囊經≫氣感篇 1, 奎章閣圖書(圖書番號 1741).고 할 정도이다. 즉 풍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수 기원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지기론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풍수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한반도 자생설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으로부터의 도입설이다.

 먼저 가장 극단적인 자생 풍수지리설의 주장은 구석기시대부터 그 연원을 찾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한반도는 지형적인 구조에 있어서 산이 많은 까닭으로 산악과 산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구석기시대부터 전해져 내려 왔으며, 산신과 산악의 숭배사상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독특한 지석묘문화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풍수지리사상은 산악지대의 지리적인 환경조건과 산악숭배사상, 地母觀念, 영혼불멸사상 및 三神五帝思想 등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으며, 檀君의 神市 선정, 王儉의 符都 건설, 지석묘 설치에서의 위치 선정 및 신라 탈해왕의 半月城 선정 등은 우리나라 고대에 풍수사상이 직접적으로 건축에 적용된 실례라는 것이다.

 또한 이 견해는 음양오행설의 발생 배경을 3신 5제사상에 두고 있으며, 3신 5제사상은 풍수지리설이 발생하게 된 모체적 사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에 활발해진 중국과의 문화 교류로 더욱 풍수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618)朴時翼,≪風水地理說 發生背景에 關한 分析硏究-建築에의 合理的인 適用을 爲하여-≫(高麗大 建築工學科 博士學位論文, 1987), 230∼243쪽.

 이와 유사한 고조선시대 발생설을 찾아볼 수 있다. 즉≪三國遺事≫단군신화에 나오는 “桓因이 三危太伯을 보았다”는 말을 한울을 건설하기 위해 그 땅의 풍수지리를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삼위태백은 三山 즉 主山과 좌우의 靑龍·白虎를 뜻하는 바, 그것은 乾·離·坎을 말한 것이며 太伯山 또한 주산 즉 乾山을 의미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고대 우리 민족의 명칭인 東夷란 천문, 풍수지리, 풍각쟁이(幾何), 노래하는 활량들의 뜻이라고 단정하였다.619)朴容淑,≪韓國의 始源思想-原型硏究를위한 方法序說-≫(文藝出版社, 1985), 2∼24쪽.
―――,≪神話體系로 본 韓國美術論≫(一志社, 1975), 13쪽.

 위의 두 견해보다 약간 시기를 뒤로 끌어내려 삼국의 건국 이전 상고 때를 그 발생시기로 본 견해가 있지만, 이 또한 풍수사상이 우리 민족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地理思想이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풍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즉 풍수라는 것은 地理 혹은 堪輿라고도 하여 國都나 국토로부터 한 개인의 주택, 분묘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가 산천의 地相과 형세에 따라 길흉화복이 있다는 것이다. 땅에는 만물을 化生하는 생활력이 있으므로 땅의 활력 여하에 따라 국가나 국토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풍수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서, 기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여 놓고 있다.

 풍수지리설도 陰陽八卦와 五行生氣의 관념을 토대로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발달된 것인데, 그 기원을 찾자면 중국 상고시대까지 소급하여야 할 것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당의 풍수설을 도입하기 이전에 이미 풍수설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상고시대의 우리 민족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의 생활상의 요구 때문에 적당한 토지의 선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택을 선택함에는 산수가 놓인 모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국도를 占定함에 있어서는 방위와 안전의 지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토지 선택의 방법은 점점 추상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진보되어 하나의 相地術로 발달하여 갔다.

 이러한 논리 아래 그 증거로 백제 시조 온조왕이 鳥干·馬黎 등 10명을 거느리고 漢山의 負兒山岳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강남의 땅이 북은 漢山을 끼고 동은 高岳에 웅거하고 남은 如澤을 바라보고 서는 대해를 막아 天險地利하므로 국도를 정하였다는 기록과, 고구려 유리왕이 尉那城은 산수가 험하고 땅이 기름져서 그 곳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 등을 꼽았다. 이렇게 풍수설에 가까운 것이 상고시대에 신봉되었는데, 신라 말엽에 당으로부터 학술적인 풍수지리설이 수입되자 급속도로 풍수설이 확산되게 되었다는 것이다.620)金得榥,≪韓國思想史≫(白巖社, 1958), 195∼201쪽. 따라서 이 주장은 엄밀히 말하자면 순수한 풍수의 한반도 자생설이라기 보다는 최초 우리나라에 풍수적 사고방식이 있었고 뒤에 체계화된 중국의 이론 풍수가 도입된 것이라는, 일종의 혼합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현대 地官들의 풍수 저술들은 한결같이 철저하게 중국으로부터의 도입설을 기정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풍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하며 중국으로부터의 도입을 주장하는데, 그들 사이의 차이는 도입 시기가 삼국시대냐 아니면 신라의 통일 이후냐의 시대 간격 차이 뿐이다.

 먼저 현존하는 문헌 중 풍수지리설의 존재를 입증하는 최초의 기록인 崇福寺碑文을 근거로 하여 풍수사상이 신라 통일 이후 당과의 문화적 교류가 빈번하던 때에 비로소 전래된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621)李龍範,<風水地理說>(≪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3), 272쪽. 특히 우리 나라는 원래 산악국으로 ‘到處有明堂’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풍수 조건에 적합한 곳이 무수하여, 결국 이러한 자연적 환경이 풍수지리사상의 성행과 폐해를 유치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거니와, 신라통일 이전 삼국시대에는 아직 그러한 術法과 사상을 받아들인 듯한 형적은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622)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특히 圖讖思想의 發展을 中心으로-≫(亞細亞文化社, 1980), 21∼30쪽.

 그런데≪三國遺事≫와≪三國史記≫에 나타나는 고구려 주몽 동명왕과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수도를 정한 것이라든가 기타 삼국시대 때부터 행해진 新月, 三日月形 등에 입각한 卜地思想을 모두 풍수지리사상으로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풍수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623)任東權,<三國時代의 巫, 占俗>(≪白山學報≫3, 1967), 168∼172쪽.

 또한≪삼국사기≫탈해이사금조에 나오는 “脫海가 兼知地理했다”는 말은 곧 풍수지리를 알았다는 뜻이므로 서기 57년에 이미 풍수지리사상이 도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624)盧道陽,<韓國文化의 地理的 背景>(≪韓國文化史大系≫Ⅰ,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0), 76쪽.
朴鐘鴻,<韓國哲學史>(≪韓國思想史-古代篇-≫, 法文社, 1974), 90쪽.

 이에 반해서 四神壁畵가 그려져 있는 平南 龍岡郡 梅山里, 新德里 및 眞池洞 소재의 고구려 고분과 忠南 扶餘郡 陵山里 고분은 그 주위 산세가 확실히 풍수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어서 그에 의하여 선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백제에서는 풍수지리에 관한 서적까지 유행되었던 모양으로 무왕 3년에 三論宗의 승려인 觀勒이 曆法, 遁甲方術書와 함께 천문지리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그 곳의 僧正이 되었던 적이 있는데, 관륵이 가지고 갔다는 지리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백제에서 유행하고 있던 풍수지리 관계의 서적임에는 틀림없다고 보고, 삼국시대에 이미 풍수지리설이 들어왔다고 주장하였다.625)崔柄憲,<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韓國史硏究≫11, 1975), 129∼130쪽.

 그리고 고구려 및 백제의 능묘에서 四神圖가 등장하고 또 公州 松山里 武寧王陵의 葬法이 풍수지리설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우리 나라에 풍수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중국적 음양오행설이나 천문관이 전래된 삼국시대 초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626)趙 珖,<歷史的 側面에서 본 風水地理說>(국립민속박물관 편,≪한국의 풍수지리-제7회 학술강연회 발표 내용-≫, 1982), 76쪽. 또≪삼국유사≫의 기록을 빌어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풍수지리설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627)金光彦,≪韓國의 住居民俗誌≫(民音社, 1988), 21쪽.

 한편 풍수지리사상이 천문사상이나 방위사상, 음양오행사상, 도참사상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태동, 전개, 변화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문제는 비록 풍수사상이 그 이론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이들 사상의 내용을 도입하였다 할지라도 시간적으로 더 소급하여 존재하였던 이들 사상 자체가 풍수사상의 기원이 될 수는 없으며, 음양오행설로 무장된 유교 경전이 풍수지리의 경전보다 우리 나라에 더 일찍 전래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 풍수사상의 기원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되기도 하였다.628)李夢日,≪韓國 風水地理思想의 變遷過程≫(慶北大 博士學位論文, 1990), 84∼85쪽.

 그러나 필자는 위의 여러 학자들이 열거한 예들이, 풍수가 중국으로부터 이미 들어왔다는 증거로는 미흡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선 4神벽화의 개념은 풍수 이전에 陰陽方位論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초승달 모양의 지세라는 것도 일종의 우리 自生 風水의 한 전령으로서 그것이 결코 중국으로부터의 도입을 증거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특히 고분 벽화에 그려진 사신도를 바로 풍수지리의 것으로 단정하는 견해는 4신사상이나 천문방위사상을 풍수지리사상과 혼동한 결과이다. 곧 풍수에 四神砂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원래가 漢·魏와 六朝時代에 회화와 공예가 기본이 된 것이므로 분묘 장식에 쓰였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 후에는 각 방위를 수호하는 상징성을 포함하게 되지만, 거기에는 풍수의 본질인 地氣論的 속성이 전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풍수의 증거로는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필자는 전래의 자생 풍수지리가 이미 이 나라에 있어 오다가, 백제와 고구려에 중국으로부터 이론이 확립된 풍수지리가 도입되면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삼국 통일 이후에는 신라에도 전해져 한반도 전체에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에 풍수가 늦어졌다고 보는 이유는 신라의 왕릉 터가 유독 풍수적 地氣와는 관련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즉 자생 풍수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이론 풍수가 혼합된 것은 신라 통일 무렵으로 보는 것이다.629)崔昌祚,<韓國 風水思想의 歷史와 地理學>(≪정신문화연구≫4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127∼128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