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2.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과 도선
  • (2) 도선과 도선식 풍수사상의 특징

가. 도선의 등장

 풍수지리설의 기원에 관한 논의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풍수사상의 宗祖로 道詵을 꼽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물론 일부 학자는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의 화장과 능묘에 관한 遺命을 기록하고 있는 경주 숭복사의 비문 내용을 근거로 하여, 신라통일 이후 당과의 문화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풍수사상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라고 보고 있다.630)李鍾恒,<風水地理說의 盛行의 原因과 그것이 우리 民族性에 미친 惡影響에 關한 一考察>(≪慶北大 論文集-人文·社會科學篇-≫5, 1962), 492쪽. 도선에 의하여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아니므로 엄밀히 말하면 도선이 우리나라 풍수설의 원조가 될 수는 없고 다만 풍수 이론을 실험에 옮겨 때에 맞추어서 고려왕실의 開國者 一族에게 예언하여 두터운 존숭을 받았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선을 한국 풍수의 종조로 받드는 일반인들의 관행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사실 도선이 풍수에 미친 바 영향은 그런 정도의 대접을 받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도선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대개 신라 흥덕왕 2년(827)에 태어나서 효공왕 2년(898)까지 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631)李夢日, 앞의 책, 93쪽. 또한 그의 풍수지리술 습득에 대해서는, 고려 의종 4년 왕명으로 崔惟淸이 찬한<玉龍寺先覺國師碑銘>에 따르면 어떤 異人에게서 배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金寬毅의≪編年通錄≫에 의하면 도선이 당에 유학하여 一行의 地理法을 얻어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도선이 일행으로부터 직접 풍수술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이유는 도선이 중국에 직접 다녀왔는지의 여부도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신라 말의 도선과 당 현종(712∼ 756) 때의 인물인 일행 사이에는 100여 년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密敎 계통의 승려인 일행은 曆象陰陽五行說에 정진하였던 사람이다. 당 開元 16년(728)에 현종의 칙명으로 燕國公 張說 및 僧 泓師와 함께 東晋時代 郭璞의≪錦囊經≫의 주석을 시도할 때에 形勢의 설명에 실제의 사례를 드는 실증법을 사용함으로써 이후 풍수지리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 개원 12년(724)에 역시 칙명으로 남쪽은 交州로부터 북쪽은 鐵勒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緯度를 측량하여≪舊唐書≫律曆志에 편입된 大衍曆을 저술하였다. 또≪新唐書≫天文志를 보면 당나라 전체를 지세에 따라 양자강 유역을 貨殖之地, 황하 중하류 지역을 用文之地, 四川·甘肅·陝西·山南지방을 用武之地 등의 셋으로 크게 구분하여 자연환경을 관찰하였던 극히 과학적인 사람이었다.632)崔柄憲, 앞의 글, 115쪽.
李龍範, 앞의 글, 275쪽.

 이같은 일행의 地理法術은 당나라에 다녀온 도선의 스승 惠哲이나 또는 당시의 다른 禪僧에 의해 도선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나말려초의 선승들은 본국에서 선종을 傳法한 다음에도 당나라에 가서 당의 선승으로부터 다시 인가를 받아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풍조였으며, 선종에서는 교종에서와 같은 所依經典이 없는 대신 面授를 중시하여 그 법통의 계보를 더욱 엄하게 따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개 그의 전기에서 師資相承 관계 사실을 빠뜨리는 예가 거의 없는데 도선의 전기에서는 당에 갔었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633)崔柄憲, 위의 글, 115∼116쪽.

 그렇다면 과연 중국의 풍수술을 간접적으로 습득한 도선을 한국 풍수사상의 비조로 볼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 제기가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단순히 중국으로부터 풍수 전적을 들여온 사람을 한국 풍수의 비조로 삼는다는 것은 더 큰 무리인 것 같다.

 도선이 비록 간접적으로 풍수지리의 이론을 배웠다 할지라도 그는 한반도 전역을 답사한 경험을 통하여 국토에 대한 각종 秘記와 踏山歌를 남겼다. 그의 풍수사상은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하였다는 데 그 중요함이 있다. 단순한 이론의 습득이 아닌 이같은 국토 공간에 대한 경험적 풍수이론의 적용이 도선을 우리나라 풍수사상의 원조로 삼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어쨌든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 관계 서적이 전래된 이래 고대 한국의 많은 선승들이 사찰이나 부도의 입지와 관련하여 풍수 술법을 익히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도선을 우리나라 풍수사상의 원조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그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고 내놓은 裨補壓勝風水論을634)裨補와 壓勝의 풍수 논리는 한국 풍수의 특징적 현상으로,「비보」는 地氣가 虛한 곳을 補하여 주는 방법이고,「압승」이란 지기가 지나친 곳을 눌러 주는 방법이다. 어느 정도로 평가해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635)李夢日, 앞의 책, 9∼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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