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2. 풍수지리·도참사상
  • 2) 풍수지리·도참사상의 추이
  • (1) 고려시대 풍수사상의 특성

(1) 고려시대 풍수사상의 특성

 초기에 각기 나름대로의 길을 걷던 風水와 圖讖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며 혼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自生의 풍수사상도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체계화된 풍수 이론과 접합하지만, 아직은 자생 풍수의 영향력이 훨씬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고려와 조선의 풍수지리 과거 시험과목을 비교해보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太卜監과 太史局이라는 天文과 占卜을 담당하는 두 개의 관청이 있었다.653)≪增補文獻備考≫권 223, 職官考 10. 현종 14년(1023)에는 태복감을 司天臺라 고쳐 불렀으며, 예종 11년(1116)에는 사천대가 司天監으로 고쳐지고, 충렬왕 원년(1275)에는 사천감을 觀候署라 했다가 다시 사천감으로 불렀고, 동왕 34년(1308)에는 태사국을 병합해서 書雲觀이라 불렀으며, 공민왕 5년(1356)에는 사천감이라 하였다가 동왕 11년(1362)에 사천감과 태사국을 또다시 병합해서 서운관이라 하였다.

 태복감, 사천대, 관후서, 서운관 등의 명칭이 비록 그 글자의 뜻은 달랐으나 맡은 일의 내용은 별 차이가 없었다. 고려 초에는 天文·曆數·測候·刻漏·占卜을 맡았으며, 충렬왕이 서운관으로 고친 후에는 문종이 실시했던 구제에 따라서 卜助敎를 더 두었고 掌漏·司曆·監候·司辰 외에 視日을 더 하였던 것이다.654)任東權,≪韓國民俗學論攷≫(集文堂, 1975), 317쪽.

 한편 이들 관서에 소속되어 있었던 풍수지리 관련 관리들은 광종 9년(958)에 雙冀의 건의에 따라 실시된 과거시험, 즉 製述·明經의 2業과 醫·卜·地理·律·書·算·3禮·3傳·何論 등의 잡업 중 지리분야로서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인종 14년(1135)에 이르러서는 풍수서를 공부하여 과거를 치루었는데, 그 격식을 살펴보면 먼저 첫날에는≪新集地理經≫10조를 시험하고, 그 다음 날에는≪劉氏書≫10조를 시험하여 이틀에 모두 각각 6조 이상 통과해야 하고,≪地理決經≫8권과≪經緯令≫2권을 합한 10권 중 글자 해석과 뜻 6권을 알아야 하며 해석은 4권을 알아야 했다.≪地鏡經≫4권과≪口示決≫4권,≪胎藏經≫1권과≪歌決≫1권 등 도합 10권 중 해석과 뜻 6机를 통해야 하고 해석 4궤를 알아야 하며, 또한≪瀟氏書≫10권을 읽고 그 안에서 1궤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하였다.

 이같이 과거시험을 통하여 풍수지리 관리들이 등용된 것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적으로 풍수가 꽤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듯하며,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풍수 도참을 담당하는 관청과 직제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리 풍수사들은 주로 왕실의 능묘를 축조하고 보수하는 일을 전담하는 외에 관찬 풍수서를 편찬하는 데도 참여하였다. 또한 왕명으로 국토를 답사하면서 離宮地 및 遷都地를 물색하기도 하였으며, 성을 쌓을 터를 잡는다던가 심지어는 왕의 피서지를 선정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서는 初試에≪靑烏經≫과≪錦囊經≫을 背講655)‘背講’이란 ‘背誦講經’의 준말로 ‘背誦’이라고도 하였는데, 책을 보여주지 않고 그 義理와 註疏를 묻는 科擧試驗 방법이다.하게 하였고,≪胡舜申≫,≪明山論≫,≪地理門庭≫등을 臨文656)‘臨文’이란 ‘臨文講經’ 또는 ‘臨文考講’이라고도 하며 經書를 앞에 펴놓고 그 大義를 묻는 試驗 방법이다.하게 하였다. 문 제는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풍수서들이 시험과목으로 올라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모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려 때까지는 자생 풍수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풍수 이론을 응용하여 우리 땅에 적용시킨 우리의 풍수서가 많이 출간되었다는 사실도 자생 풍수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인데, 현종 때의<三韓會土記>, 문종 때의<松岳明堂記>, 숙종 때의<道詵記>,<道詵踏山歌>,<三角山明堂記>,<神誌秘詞>, 예종 때의<海東秘錄>, 충렬왕 때의<道說密記>, 공민왕 때의<玉龍記>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 풍수서들은 대개 후세의 풍수가가 도선 등의 이름을 가탁하여 만든 것들이다.

 한편 신라 말까지의 고대 한국의 풍수사상이 우리 전통의 地母思想·山岳崇拜思想 등과의 습합기였다면, 고려시대의 풍수사상은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전래되어 있었던 도참 및 점복사상과의 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려 시대에는 개경의「地氣衰旺說」과 서경의「地德說」이라는 풍수설에 의해 묘청의 난이 발발하였고, 또한「龍孫十二盡」이라는 도참설에 의해 이의민의 난과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니, 실제로 풍수와 도참은 거의 융합되다시피 하였다. 더욱이 길지를 정하여 천도를 행하려 할 때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太廟에 가서 靜·動의 두 卦를 가지고 길흉을 점복하고,657)≪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또한 3神 思想과 같은 전통사상에 입각하여 3京制度와 3蘇宮闕을 조성하기도 하였으니 실로 고려시대의 풍수사상은 여타의 많은 사상들과 혼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밖의 고려시대 풍수사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풍수 이론 중에서는 國業을 연장하기 위한 國都風水와, 마을과 고을의 입지 선정을 위한 都邑風水 등 陽基風水가 크게 발달하였으나, 陰宅風水도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행해졌다. 延基說과 관련되어서는 국내 여러 지역에 대해 반란이 일어난 逆鄕이니 혹은 山水地勢가 本主에 背逆하느니 하여 그 지역 주민의 기질까지도 그에 맞추어 해석해버리는「地理人性說」이 난무하였으며 또 延基를 위한 각종의 裡裨壓勝風水策도 행해졌다.

 둘째, 고려시대에는 아직까지 한학 위주의 한문 독해력이 급선무였던 만큼 명승·대덕과 유학자들 사이에 풍수지리가 많이 이해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풍수사도 승려·유학자·관리 풍수사·기타 풍수를 업으로 하는 사람 등 다양하였다. 국초부터 풍수지리를 담당하는 관청이 부설되고 지리 관리가 등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각종 풍수지리서로써 과거 시험을 치루고, 또 공양왕 원년(1389)에는 十學에 敎授官을 두었는데, 이 때 최초로 풍수음양학이 학문으로 성립되어 書雲觀에 分隷되었다.658)≪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셋째, 풍수도참설의 성행에 못지 않게「反風水論」도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풍수도참설이 크게 신봉되던 시기인 예종 원년(1105) 西京 龍堰舊墟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하여 吳延寵은 세 가지 불가한 점을 주장한 바 있다. 그 첫째는 문종이 명석하였음에도 술수에 미혹하여 서경에 좌우궁을 지었다가 증험이 없다고 해서 마침내 巡御하지 않아 재력만 허비하였고, 둘째는 근자에 南京을 개창하였으나 8년이 지나도록 吉應이 없다는 점, 셋째는 서경의 옛궁이 지금 찾는 龍堰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지세의 길흉이 반드시 다르지는 않을 것이고 하물며 뚜렷한 비결을 찾을 수도 없는데 조종의 옛 궁을 버리고 따로 새 궁궐을 만드느라 집들을 헐어 없애 인민을 소동케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창왕 때의 朴宜中도 당시 서운관에서<道詵密記>에 지리쇠왕설이 있으니 마땅히 漢陽으로 거동하여 松都의 地德을 쉬도록 해야 한다는 상소에 대해, 옛날에 임금이 讖緯 術數로써 국가를 보전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민심을 동요시키고 민폐를 조장시킬 천도 논의는 이제 그만 두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양왕 때의 姜淮伯도 말하기를 “길흉은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화복은 오직 사람이 불러 오는 것이며 天時와 地理는 人和만 못하고 一治一亂은 자연의 이치이므로 개국 이래 선대의 왕이 지리도참설에 의해 3경을 巡駐하였어도 36국이 내조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또다시 도참과 술수에 의해 한양으로 천도한답시고 농민을 동원하여 役事를 일으킨다면 그들로 하여금 경작과 수확의 때를 잃게 만들어 오히려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고 화기가 해를 입게 될 것이니 왕께서는 정당한 처신과 정치를 시행해 주시기 바란다”고 상언한 바 있다.659)≪高麗史≫권 96, 列傳 9, 吳延寵과 권 112, 列傳 25, 朴宜中 및 권 117, 列傳 30, 姜淮伯. 고려 말기의 이와 같은 유교적 치세관은 당시에 전래된 주자학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던 것인데, 국초에 비해서는 확실히 지리도참설의 권위가 약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넷째, 국토 전체를 조망하는 거시적 규모의 풍수에서 한 개인의 집터나 산소자리를 선정하는 미시적인 풍수에 이르기까지 공간 규모 별로 모든 풍수지리가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국토 전반을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하여 거기에 맞추어 人文生活을 함으로써 地人相關論이 심도있게 펼쳐졌으며, 개경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선택된 風水首都였던 만큼 지방 도읍에 대한 풍수지리설도 발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방도읍풍수는 국왕의 巡駐 또는 離宮을 위한 궁궐조성지로서의 논의가 전부였다. 요컨대 모든 지방도읍의 풍수지리는 반드시 本闕이 있는 왕도와 관련되어 해석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공간적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도읍풍수로 유명한 3京 및 3蘇는 모두 개경의 인근에 위치해 있었으며, 신라 말기에 호족 세력들이 웅거하였던 많은 도읍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지방도읍 풍수는 고려시대에는 중부지방일대로 집중되게 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고려시대의 풍수지리는 공간적으로 행정구역 변경 및 지명·명호 승강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풍수상 중요하였던 서경인 平壤과 남경인 漢陽, 그리고 동경인 慶州를 보면, 서경의 경우에는 西京畿四道라 하여 본경인 개경에 못지 않게 중요시되다가 서경의 지덕설을 내세우고 발발하였던 묘청의 난 이후에는 서경기 4도라는 행정 구역이 폐지되고 그 대신에 6현이 설치되었으며, 동경 또한 李義旼의 모반 이후에는 경주로 강칭되었다. 남경의 경우에도 풍수지리 吉應과 관련하여 楊州·南京·漢陽府 등으로 번갈아 가면서 수차례 명호의 승강을 겪었다.

 여섯째, 고려시대의 도읍풍수에는 도읍의 역사성과 풍수지리적 제조건의 구비 이외에도 순수한 현대 인문지리학적인 입지요인이 많이 고려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삼국시대 때부터 삼국간의 쟁탈지였던 한강 일대의 楊州와 고구려의 舊都 평양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지역은 한결같이 풍수이론에 걸맞는 山沿襟帶, 山水回抱의 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우왕 때의 北蘇 箕達山(黃海道 新溪郡 村面 宮岩里) 천도 계획이 그 위치가 너무 산간 깊숙한 곳이어서 漕舶이 통하지 않아 중지되었던 것을 보면, 비록 풍수지리 이론상 길지로서 설명이 된다 할지라도 인문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그 곳을 포기히는 경향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660)李夢日, 앞의 책, 123∼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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