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2) 민속종교의 신 관념
  • (1) 천신

(1) 천신

 天神은 하늘 자체를 신격화한 것으로, 고대사회에서부터 이미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고려시대에도 태조 10년(927) 후백제군과의 桐藪전투를 앞두고 祭天한 것을 필두로 하여,673)≪新增東國輿地勝覽≫권 27, 河陽縣 山川 醮禮山. 이후 圓丘祭·八關會·醮 등의 각종 국가 제사를 통하여 숭배되어 왔다.

 원구제란 하늘의 형상을 본뜬 원구라는 제단에서 昊天上帝를 제사하는 것인데, 매년 정월 첫번째 辛日과 4월의 길일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으며,674)≪高麗史≫권 59, 志 13, 禮 1, 吉禮大祀 圜丘. 그 밖에도 국가의 불행이 있을 때에는 수시로 거행되었다. 그리고 매년 11월에 거행되는 팔관회는 태조의 훈요 10조 제6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천령 및 5악·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것”이며,675)≪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醮는≪고려사≫禮志 雜祀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수시로 천지 및 경내의 산천을 대궐 뜰에서 두루 제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 국가제사를 토대로 민속종교의 천신을 논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호천상제는≪詩經≫을 비롯한 유교경전에 보이는 신이며, 원구제는 성종 2년(983)에 유교에 입각하여 국가제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처음 시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팔관회도 명칭 자체가 불교의식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국왕의 法王寺 행차가 주요부분을 이루고 있는 행사이며, 醮도 도교의례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의례는 어느 것이나 그 원래의 모습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원구제의 경우, 중국에서는 후한 광무제 建武 2년(A. D. 26) 국가제사로서 정착된 이래 역대 왕조에 의해 계속되어 왔으며, 그 祭日은≪禮記≫郊特牲에서 규정된 바와 같이 동지일의 제사가 正祭로서 가장 중시되어 왔다.676)福永光司,<昊天上帝と天皇上帝と元始天尊>(≪道敎思想史硏究≫, 岩波書店, 1987), 130∼134쪽. 그러나 고려에서는 동지일의 제사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원 구제가 중국제도의 복사판이 아님을 의미한다. 또 팔관회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八戒를 지킨다는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천령·5악·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것으로서,677)명종 때 文克謙이 “太祖始設八關 盖爲神祇也”라고 한 것도 참고가 된다(≪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 및≪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4년 10월).≪고려도경≫사우조에서도 이를 고구려의 제천행사인 東盟과 연결시키고 있어 순수한 불교행사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도교의 초는 밤중에 술이나 마른 고기 등을 차려놓고 消災度厄을 위해 星辰에 제사하는 것인데,678)≪隋書≫권 35, 經籍志 4, 道經. 고려의 초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天皇大帝나 太一 등을 제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천지와 산천을 대궐 뜰에서 合祀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의 전통적 천신관념이 이들 의례 속에 투영된 결과라 하겠으며, 나아가 이들 의례를 통해 민속종교의 천신관념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할 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은 천신이 神界의 최고신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이규보가 신종 7년(1204) 경주 민란을 진압하고 지은<公山大王謝祭文>679)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7.에서 동경 민란의 진압은 공산 산신이 국가를 위해 皇天上帝에게 변고해 준 덕택이라 한 것이나, 고종 6년(1219) 桂陽都護府副使로 있으면서 지은<桂陽祈雨城隍文>680)위와 같음.에서 비가 오도록 성황신이 지방관인 자신을 대신해서 하늘에 부탁해 달라고 한 것, 또 고종 41년(1254) 太廟의 제문에서 몽고병이 물러가도록 종묘의 신령으로 하여금 상제에게 부탁해 달라고 한 것681)≪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1년 10월 무자. 등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이들 자료에서 천신이 왕실의 조상신이나 성황신·산신보다 상위의 신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자료에서 천신이 비를 내리고 兵禍를 막아주는 등, 인간의 길흉화복에 큰 힘을 발휘하는 전지전능한 신으로 여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고려에서는 원구제 등에서 정기적으로 풍요와 비 등을 비는 이외에도, 천재지변이 극심하여 다른 초자연적 방법들로 이를 물리치지 못할 때면 천신에게 직접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예컨대 숙종 7년(1102) 송충이 극성을 부려 講經會를 열었지만 효험이 없자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禁中에서 상제와 五帝에게 3일간 기도했다거나,682)≪高麗史≫권 54, 志 8, 五行 2. 예종 원년(1107) 가뭄이 들어 강경회를 열고 神廟에서도 빌었지만 효과가 없자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會慶殿에서 호천상제에게 직접 제사했다는 것683)≪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원년 7월 기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천신은 국가적 차원에서 致祭되고 있었지만, 현종 15년(1024) “봄부터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모여 하늘에 부르짖으면서 기도하였다”라는 기사로 미루어 민간에서도 이에 대한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84)≪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5년 5월 계사. 그렇지만 천신은 마을이나 개인의 문제를 기원하기에는 워낙 높고 무한한 존재였다. 때문에 천신숭배는 고려 일대를 통하여 주로 국가적 차원에서 계속되었고, 인하여 민간신앙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져 갔다. 민간 차원에서의 천신에 대한 의례나 祭場에 대한 고려시대의 기록이 적은 것은 이러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민속종교의 帝釋神(天帝釋) 신앙이다. 제석신은 오늘날 민속종교에서도 중요한 신격으로 숭배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미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규보가<老巫篇>에서 이웃에 사는 늙은 무당이 天帝釋을 모셨다고 한 것이나,685)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고려사≫에서 공민왕 때 천제석임을 자칭하는 무당들이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686)≪高麗史≫권 114, 列傳 27, 李承老 附 云牧 및 권 111, 列傳 24, 柳濯. 바로 그것이다. 제석이란 원래 須彌山 꼭대기에 위치한 忉利天을 주재하는 불교의 천신이다. 그러나 민속종교의 제석신은 불교의 신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민속종교에서 제석신은 가택신·생산신·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어,687)≪한국민속대사전≫2 (민족문화사, 1991), 1252∼1253쪽. 불교의 제석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속종교의 제석신이란 민속종교 원래의 신격을 불교 용어를 빌어 표현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석신이란 용어를 빌어온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 내지 양자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다같이 천신이라는 점이다. 즉 민속종교 원래의 신격이 천신이었기 때문에 불교의 천신명을 빌어 제석신이라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민간층의 천신신앙은 제석신 신앙으로 그 명맥을 이어온다고 하겠으며,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로까지 소급될 수 있겠다.≪三國遺事≫고조선조에서 단군의 할아버지로서 전통적 천신임에 틀림없는 환인을 제석이라 주석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된다.

 한편 고려시대의 민속종교에서는 별들도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이규보의<노무편>인데, 여기에는 무녀가 七元(日月과 5星이지만, 이 경우는 북두칠성)과 九曜(日月을 포함한 9星)를 그린 巫神圖를 봉안하고 있었음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공민왕대의 인물인 洪彦博이 매일 밤 하늘의 별에 기도하였다는≪櫟翁稗說≫前集 2의 기록도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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