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2) 민속종교의 신 관념
  • (2) 산신

(2) 산신

 山神은 민속종교의 대표적인 신격으로서,≪舊唐書≫新羅傳에 신라인들이 산신을 제사하기 좋아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등,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왕실 세계설화에 平那山 산신이 등장하는 것을 비롯하여, 산신이 대단히 중요시되었다. 그것은 산신이 산에 있으면서 산을 지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길흉화복 전반을 통어하는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것만 보더라도 산신은 우선 병란으로부터 국가나 지역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① 현종 2년(1011) 2월, 監察御史 安鴻漸이 아뢰기를 ‘契丹兵이 長湍에 이르니 눈보라가 갑자기 일어나면서 紺岳神祠에 마치 깃발과 士馬가 있는 것 같아 거란병이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高麗史節要≫권 3).

② 고려사람들이 전하기로는 ‘大中祥符 연간(1008∼1016)에 거란이 왕성을 침입하자 崧山의 신이 밤중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하여 사람소리를 내었다. 오랑캐들은 원군이 있는가 의심하여 곧 철수하였다. 후에 그 산을 봉하여 崧이라 하고 사당을 마련하여 그 신을 제사드렸다’고 한다(≪高麗圖經≫권 17, 祠宇 崧山廟).688)徐 兢,≪高麗圖經≫권 40, 同文 正朔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③ 고종 43년(1256) 4월 경인일에 몽고병이 충주에 들어와 州城을 무찌르고 또 산성을 치니, 관리들이 노약하여 능히 막아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서 月嶽神祠로 올라갔다. 이 때 갑자기 운무가 끼고 풍우와 雷雹이 함께 들이치니 몽고병이 신의 도움이라 하여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高麗史≫권 24, 世家 24).

 이상의 기록들은 산신이 외적으로부터 지역이나 국가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의 소유자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전쟁이 있을 때에는 산신에게 미리 전승을 기원하기도 했다. 전승 기원은 여진과의 싸움이 게속되던 예종 4년(1109)에 왕이 근신을 파견하여 進奉山과 九龍山에 빌었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689)≪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4년 6월 무자. 국왕의 주관 하에서 이루어진 적도 있지만, 군대의 지휘관이 전투에 임하여 행한 경우도 있었다. 가령 신종 5년(1202)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관군이 公山大王·경주의 北兄山 및 東岳과 西岳의 산신에게 전승을 기원했던 것,690)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에 수록된<祭公山大王文>,<北兄出祭文>,<慶州東西兩岳祭文>,<獻馬公山大王文>참조. 고종 24년(1237) 초적 李延年의 무리를 치러 가면서 全羅道指揮使 金慶孫이 錦城山神에게 전승을 기원했던 것,691)≪高麗史≫권 103, 列傳 16, 金慶孫. 우왕9년(1383) 鄭地가 왜구와 싸우기에 앞서 智異山神祠에서 신의 도움을 요청한 것692)≪高麗史≫권 113, 列傳 26, 鄭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는 산신의 도움이라 믿었으니, 이규보가 경주민란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지은 일련의 제문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693)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에 수록된<東京西岳祭文>,<東西兩岳合祭文>,<公山大王謝祭文>참조. 그 중에서도 경주 서악에 올린 제문의 일절은 특히 그러하다.

어제 東京의 元惡 義庇가 죽음을 받은 것은 실로 (西岳)大王의 덕분입니다. 왜냐하면 적이 다른 곳으로 도망갈 데가 없지도 않았는데, 의비가 서악으로 들어와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잡혔으니, 이 어찌 대왕께서 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 東京西岳祭文).

 또 산신은 비를 조절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래서 가뭄이 계속되면 산신에게 비를 빌었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비가 그치기를 빌었다. 이에 관한 기록은≪고려사≫五行志 2에 모아져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현종 2년 4월 신유, 松岳에 비를 빌었다.

② 정종 6년 5월 을묘, 초하루날 北岳에 비를 빌었다.

③ 선종 2년 4월 또 산악에 비를 빌었다.

④ 예종 11년 4월 기사, 九月山에 비를 빌었다.

⑤ 정종 6년 8월 정미, 北岳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⑥ 숙종 3년 7월 무신, 松岳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산신은 병을 낫게 해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민간에서는 병이 나면 崧山神祠(松嶽神祠)를 찾아가 옷이나 말을 바치고 기도했다든지,694)徐 兢,≪高麗圖經≫권 17, 祠宇 崧山廟. 예종 4년(1109) 전염병이 돌자 송악과 諸神祠에 사람을 보내어 祈禳했다든지,695)≪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4년 12월 을유. 신종 때 경주민란을 진압하러 갔던 統軍尙書 金陟侯가 병에 걸리자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696)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 智異山大王前願文.이나 충렬왕이 병에 걸리자 사신을 보내어 지리산에 제사를 지냈던 것697)≪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왈 원년 6월 기사. 등은 이러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산신은 인간의 길흉화복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어졌으므로, 고려시대에도 산신에 대한 숭배가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크게 성행하였다. 개인의 기복을 위해 산신을 제사한 기록들이 심심찮게 보인다는 점도 그러하지만,698)송악에 제사한 것만 해도, 고종 3년 3월 崔忠獻이 제사한 것(≪高麗史節要≫권 15), 우왕 11년 2월 갑오에 궁녀들이 제사한 것과 같은 해 3월 기묘 姜仁裕의 처가 제사한 것(≪高麗史≫권 135, 列傳 48, 辛禑 3), 우왕의 유모 장씨가 제사한 것(≪高麗史≫권 115, 列傳 28, 禹玄寶) 등이 기록에 보인다. 송악에 대한 제사는 주로 송악에서 거행되었겠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崧山神의 別廟가 群出島에 있다든지(≪高麗圖經≫권 17, 祠宇 五龍廟), 원종 때 일본정벌에 앞서 김해에서 송악신을 제사했다든지(≪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金海都護府 祠廟 松岳堂) 등이 그것이다. 산신을 제사한다고 몰려다니다가 失行하는 자가 생기는가 하면, 紺岳山 산신을 제사하러 가다가 長湍에서 익사한 자가 속출하여 국가에서 이를 금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당시 산신에 대한 숭배가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699)≪高麗史≫권 85, 刑法 2, 禁令 충렬왕 14년 4월·충선왕 3년 4월.

 산신에 대한 숭배는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요시되었다. 국가에서는 산신들을 국가의 致祭 대상 목록인 祀典에 포함시켜 정기적으로 제사하였다. 팔관회에서 5악과 명산이 숭배되었고 醮에서의 치제대상에 산이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제사가 개경에서 거행되기도 했지만, 현지에서의 제사를 위해 향과 축문을 내려주기도 하고,700)≪高麗史≫地理志에 언급된 것으로는 紺岳山·胎靈山·智異山·無等山·鼻白山이 있다. 봄과 가을로 전국에 外山祭告使를 파견하기도 했다.701)≪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8년 2월 계유. 그리고 가뭄이나 전쟁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도 수시로 산신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와 같이 祀典에 포함된 명산의 숫자는 고려 일대를 통하여 계속 늘어갔다. 인종 7년(1129)에는 새로 창건한 서경에 大花宮의 主山을 새로 사전에 편입하였다.702)≪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7년 3월 기묘.

① 원종 14년 5월 경진일에 광주 無等山神이 적(삼별초)을 토벌하는 데 음조하였다 하여, 禮司에 명하여 작위를 加封하고 춘추로 致祭하게 하였다(≪高麗史≫권 27, 世家 27).

② 나주인들이 ‘錦城山神이 巫에게 내려 말하기를 진도와 탐라를 치는 데 실로 나의 힘이 있었지만, 장사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는 祿을 주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반드시 나를 丁寧公에 봉하라’ 했다고 말했다. (鄭)可臣이 그 말에 혹하여 (충렬)왕에게 넌지시 말하여 정령공에 봉하고 나주읍의 祿米 5석을 거두어 해마다 그 사당에 주게 하였다(≪高麗史≫권 105, 列傳 18, 鄭可臣).

 위의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종 14년(1273)에는 광주 무등산신을, 충렬왕 3년(1276)에는 나주 금성산신을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사전에 올렸다.

 산신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또다른 배려는 수시로 산신에게 爵號나 德號를 가하는 것이었다. 목종이 즉위할 때 神祗에 대한 작호를 수여하기 시작한 이래,703)≪高麗史≫권 3, 世家 3, 목종 즉위년 12월 임인. 왕이 즉위하거나 太廟에 祫祭를 지내는 등 국가적 경사가 있을 경우,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국가적 불행이 있을 경우에 가해졌다. 그런가 하면 왕이 巡狩하면서 지나온 산의 신에 대해서도 ‘仁聖’ 등의 덕호를 더하였다. 충렬왕 13년(1287) 원을 도와 乃顔의 무리를 정벌하러 갈 때 감악산신의 두 번째 아들을 都萬戶로 봉했다고 하는 바, 작호는 산신의 아들에게까지 수여되기도 했다.704)≪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3년 6월 기묘. 이러한 작호의 수여는 국가의 복리 증진을 위해 산신의 환심을 얻고자 한 것이 동기일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19년(1370) 6월 明은 神祗에게 崇名美號를 주는 것은 瀆禮不敬한 것이란 이유로 이를 폐지하면서,705)明의 洪武 3年 禮制改革에 대해서는 濱島敦俊,<明初城隍考>(≪榎博士頌壽記念 東洋史論叢≫, 汲古書院, 1988), 352∼362쪽 참조. 곧 고려에 대해서도 명의 제도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706)≪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7월 임인. 그 결과 고려에서도 산신을 비롯한 신지에 대한 가호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렇듯 산신은 인간의 길흉화복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졌으므로, 산신숭배의 중심이 되는 神祠가 전국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다.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것만 하더라도 개경의 松岳神祠와 龍首山祠·우봉의 九龍山祠·적성의 감악신사·서경의 木覓神祠707)崔滋의<三都賦>(≪東文選≫권 1)에 의하면 목멱신은 稼穡, 즉 농사를 담당했다고 한다.·충주의 月嶽神祠·남원의 지리산신사 등이 있었다. 이러한 신사들은 해당 산에 위치하고 있었으며,708)송악신사와 감악신사가 각각 송악과 감악산의 위에 있다는≪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의 기사 참조. 각각 城隍·大王·國師·姑女·府女를 모신 5개의 사당으로 구성된 송악신사처럼709)≪新增東國輿地勝覽≫권 5, 開城府 下 祠廟.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현종 3년(1012) 12월 서경 목멱사의 신상을 만들었다든지,710)≪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의종 때 咸有一이 구룡산신상을 활로 쏘았다든지,711)≪高麗史≫권 99, 列傳 12, 咸有一. 명종 17년(1187) 4월 계유에 지리산신상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든지712)≪高麗史≫권 55, 志 9, 五行 3.
우왕 때 왜구가 패주하면서 지리산 聖母祠 신상의 이마에 상처를 입히고 갔다는≪新增東國輿地勝覽≫권 30, 晋洲牧 祠廟 聖母祠조의 기록도 참고가 된다.
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신사 안에는 신상을 봉안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여러 산신을 한 곳에서 합사하는 신당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妙淸의 八聖堂이 그것이다. 팔성당이란 인종 9년(1131) 묘청이 나라를 이롭게 하고 國基를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하면서 서경 林原宮 내에 설치한 것이다. 여기에는 ①護國白頭嶽太白仙人 實德文殊師利菩薩 ②龍圍嶽 六通尊者 實德釋迦佛 ③月城嶽天仙 實德大辨天神 ④駒麗平壤仙人 實德燃燈佛 ⑤駒麗木覓仙人 實德毗婆尸佛 ⑥松嶽震主居士 實德金剛索菩薩 ⑦甑城嶽神人 實德勒叉菩薩 ⑧頭嶽天女 實德不動優婆夷의 신상을 그려 모셔두었다.713)≪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妙淸.
팔성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乙酉文化社, 1948), 189∼192쪽 참조.
그러므로 팔성당에 모셔진 신들이란 산신이라 하겠는데, 특이한 사실은 팔성당에 모셔진 산신들의 本身·眞身을 불·보살이라고 한 점이다. 다시 말해서 불·보살이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산신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것이 8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本地垂跡說이라 하겠는데, 이를 통하여 재래의 산신신앙이 불교와 혼합되어 가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역사적 인물이 산신이 되었다는 관념도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단군이 阿斯達山神이 되었다는 데에서 이미 보이는 바이지만, 고려시대에도 九龍山天王이 태조의 6대조에 해당하는 虎景이라든지714)李承休,≪帝王韻設≫권 下, 本朝君王世系年代.
그런데≪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咸陽郡 祠廟條에 의하면≪帝王韻記≫에서 지리산 성모(산신)를 태조의 어머니인 威肅王后라 했다고 하나, 현재 유통되고 있는≪帝王韻記≫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감악산신이 당나라 장수 薜仁貴라든지,715)≪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순천 海龍山神이 견훤의 사위인 朴英規716)≪新增東國輿地勝覽≫권 40, 順天都護府 人物.
補) 고려시대의 산신숭배에 대한 연구로 최근 金甲童,<高麗時代의 山嶽信仰>(≪韓基斗華甲紀念 韓國宗敎思想의 再照明≫上, 圓光大出版局, 1993)이 발표되었다.
라고 한 데서 나타나고 있다.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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