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2) 민속종교의 신 관념
  • (3) 성황신

(3) 성황신

 城隍이란 성벽을 둘러싼 해자를 의미하는 바, 성황신이란 성을 수호해 주는 신이다. 중국의 경우,717)중국의 성황신앙에 대한 기술은 주로 다음 연구성과들에 의거하였다.
David Johnson, The City-God Cult of T`ang and Sung Chin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45. No. 2, 1985.
小島毅,<城隍廟制度の確立>(≪思想≫1990年 6月號).
성황신 신앙은 6세기 무렵에 양자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생하였으며, 도시를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10세기 경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고, 마침내 국가제사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성황신 신앙은 도시 내에 있는 城隍廟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성황묘에 모셔지는 성황신은 그 지역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인물인 경우가 많다. 성황신은 처음에는 도시의 방어에 영험있는 신으로 신앙되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도시의 기후를 통어하고 지역주민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며 사후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로 의미가 확대되어 갔다.718)8세기의 인물인 李陽氷의<縉雲縣城隍神記>(≪全唐文≫권 437)에 “風俗水旱疾疫必禱之”라 하여 성황신의 직능이 전대에 비해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의 경우, 성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조의 아들인 安宗 郁이 泗水縣으로 유배를 가서 자신을 현의 성황당 남쪽 歸龍洞에 엎어서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기사이다.719)≪高麗史≫권 90, 列傳 3, 安宗 郁. 안종 욱이 사수현으로 유배를 당한 것은 성종대(981∼997)의 일인 만큼, 이 기사로 미루어 늦어도 10세기 후반에는 고려에도 성황신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종 9년(1055)에 宣德鎭 新城(함경남도 定平郡 宣德面)을 새로 설치하면서 성황신사를 두고 봄과 가을로 제사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바,720)≪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문종 9년 3월 임신. 이는 성황신이 늦어도 11세기부터는 국가의 공식적인 제사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성황신에 대해서는 祠廟를 마련하여 숭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황신사나 성황사란 표현도 그러하지만, 충숙왕이 德水縣에 사냥을 나갔다가 매와 말이 죽는 바람에 화가 나서 성황신사를 불태웠다는 기록721)≪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6년 8월 임자.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왕 11년(1385)에 명나라 사신이 와서 고려의 성황을 보려고 하자 조정에서는 국도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라 하여 淨事色을 보여주면서 성황이라 속였다고 한다.722)≪高麗史≫권 135, 列傳 48, 우왕 11년 9월. 이 경우 성황이란 개경의 성황신사라 생각되며,≪신증동국여지승람≫개성부조에서 개성의 烽燧가 송악산 성황당에 있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성황신사가 위치한 곳은 송악산이라 할 수 있다. 또 충숙왕이 불태운 덕수현의 성황신사는 삼성당산에 있었다고 한다.723)≪新增東國輿地勝覽≫권 14, 豊德郡 山川 三聖堂山·祠廟 三聖堂祠. 이러한 사실들은 성황신사들이 대체로 산이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의 성황신사는 대체로 행정구역을 단위로 해서 존재했던 것 같다. 안종 욱에 관한 기사에 보이는 縣城隍을 비롯해서, 郡城隍724)≪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3년 9월 정사.·諸道州郡의 성황725)≪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공민왕 9년 3월 갑오.이란 표현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래서 각 성황신에 대한 제사는 주로 그 지역의 지방인들, 특히 지방세력들에 의해 거행되었다. 전주의 경우, 매월 초하루 衙吏들이 지방민들로부터 제수를 거두어 성황신을 제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726)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7, 祭神文 참조.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된 해당지역 지방관이 제사를 주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의종 때 함유일이 朔方道監 倉使로 가서 登州城隍祠에서 國祭를 행했다든지,727)≪高麗史≫권 99, 列傳 12, 咸有一. 신종 2년(1199) 이규보가 全州司錄으로 부임하여 성황대왕에게 바친<祭神文>이 남아있다든지728)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7.하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각 지방의 성황신사에 모셔진 성황신에는 역사적 인물들이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나라 장군 蘇定方이 大興縣(권 20), 고려 태조를 도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는 金忍訓이 梁山郡(권 22),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태조를 대신해 죽은 金洪術이 義城縣(권 25),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다는 府吏 출신의 孫兢訓이 밀양도호부(권 26), 申崇謙이 谷城縣(권 39), 견훤을 도와 벼슬이 引駕別監에 이르렀다는 金摠이 順天都護府(권 40)의 성황신이 각각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소정방을 제외하고는, 고려 태조 때의 인물이며 각 지역의 지배적 성씨집단인 土姓 출신이다. 그리고 대체로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이 사후 성황신으로 숭배된 것은 해당 지역의 토성들에 의해서이며, 이를 통해 토성집단은 지방민들의 자발적 복종을 끌어내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729)金甲童,<高麗時代의 城隍信仰과 地方統治>(≪韓國史硏究≫74, 1991), 17∼18쪽.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지역의 성황신을 인간 기원의 신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려 말의 인물인 禹倬이 寧海司錄으로 부임하여 이 지역 주민들의 신앙대상인 八鈴神을 없앴는데,730)≪高麗史≫권 109, 列傳 22, 禹倬.
우탁이 팔령신을 없앤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화가 현지에 구전되고 있다. 이 중에는, 본래 팔령신은 모두 바위였는데 우탁이 바다에 모두 집어넣어 하나만이 남게 되었고, 지금 觀魚臺에 있는 당고개 서낭바위가 바로 그것이라는 설화도 있다(趙東一,≪人物傳說의 意味와 機能≫, 嶺南大, 1979, 66∼82쪽).
≪신증동국여지승람≫권 24, 寧海都護府 祠廟條에 의하면 이 팔령신이 곧 영해의 성황신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명종 때의 인물 金克己에 의하면 울산지방에는 학을 타고 神頭山에 내려와 인간의 壽祿을 관장했다는 戒邊天神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이 계변천신이 바로 울산의 성황신이다.731)≪新增東國輿地勝覽≫권 22, 蔚山郡 樓亭 大和樓·祀廟 城隍祠 참조. 이러한 사실들은 성황신의 본질을 일률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에 성황신이 널리 신앙되게 된 것은 그것이 인간의 길흉화복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병란으로부터 해당지역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즉 고종 23년(1236) 溫水郡에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자 왕은 그 군의 성황신이 은밀히 도와준 공이 있다 하여 신의 작호를 더했다고 하는데,732)≪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3년 9월 정사. 이는 그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황신의 수호기능은 특정 지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국가 전체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인종 14년(1136) 김부식이 서경을 함락한 후 여러 성황묘에 제사했다거나,733)≪高麗史≫권 98, 列傳 11, 金富軾. 공민왕 9년(1360) 3월 갑오일 여러 神廟에서 諸道州郡의 성황을 제사하여 홍건적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사례했다는 것은 이러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734)≪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공민왕 9년 3월 갑오.

 때문에 전쟁에 앞서 성황신의 가호를 빌기도 했다. 신종 6년(1203) 경주에서 민란을 일으킨 利備 부자는 성황사를 찾아가 기원했고,735)≪高麗史≫권 100, 列傳 13, 丁彦眞. 충렬왕 때 金周鼎은 일본을 정벌하러 가면서 각 관청의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냈다.736)≪新增東國輿地勝覽≫권 35, 光山縣 祠廟.

 또 성황신은 비를 통어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이규보는 고종6년(1219) 柱陽都護副使로 부임하여 이지방에 가뭄이 들자<桂陽祈雨城隍文>·<又祈雨城隍文>을 지어 계양(富平)의 성황신에게 비를 빌었던 것이다.737)모두≪東國李相國集≫권 37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성황신은 국가나 개인의 미래를 예지하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登州 성황신이 무격을 통하여 국가의 화복을 예언하여 적중한 적이 많았다거나,738)≪高麗史≫권 99, 列傳 12, 咸有一. 이규보가 꿈에서 全州 성황을 만났더니 그의 장래를 예언했다거나739)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4, 夢驗記. 하는 것은 이러한 관념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렇듯 성황신은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祀典에 포함시켜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또 수시로 성황신에게 작호나 덕호를 가하기도 했다. 성황신에게 작호를 주는 것은 宣德鎭 新城의 성황신에게 崇威라는 덕호를 주었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성황신사가 처음 설치될 때일 것이며, 이후 왕의 즉위나 전쟁이 있을 때에는 덕호가 추가되었다.740)충렬왕 7년 정월 병오 일본정벌에 앞서 祀典에 실려있는 中外의 城隍에게 德號를 더해준 것(≪高麗史≫권 29, 世家 29)은 후자의 예이며, 충선왕 복위년 11월 신미에 加號한 것(≪高麗史≫권 33, 世家 33)은 전자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황신에 대한 작호 수여도 산신의 경우처럼 명나라측의 요구로 말미암아 공민왕 19년(1370)에 일단 중지되었다. 그렇지만 조선 태조 2년(1393)에도 吏曹가 각 지역의 성황을 鎭國公·啓國伯·護國伯으로 칭하고자 건의한 것을 보면,741)≪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정월 정묘. 작호 수여의 중지는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고려의 성황신앙은 발생지인 중국의 그것과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성황신사가 지방행정단위와 대응된다든지, 그 지방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인물이 성황신으로 모셔진다든지, 지방의 군사적 수호신이며 天候의 조절자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고려의 성황신앙은 중국의 그것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중국의 성황신앙은 도시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성황묘도 성곽 내에 있을 뿐 촌락에는 없는 데 반해,742)那波利貞,<支那に於ける都市の守護神に就いて>上 (≪支那學≫7-3, 1934), 380쪽. 고려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을 비롯한 높은 곳에 위치하기도 했다. 둘째 중국의 성황신은 산신과 별개의 신격임에 반해, 고려에서는 산신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이것은 공양왕 2년(1390) 9월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虎患이 거듭되자 白岳 성황과 木覓 성황에 제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743)≪高麗史≫권 54, 志 8, 五行 2. 셋째 중국의 성황신은 사후세계의 관리자 내지 명계의 지배자란 성격이 중요시되나, 고려의 경우에는 이런 관념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넷째 고려의 경우, 성황신은 무격들과 관련이 깊다. 의종 때 登州 성황신이 무당에게 강신하여 국가의 화복을 예언했다거나,744)≪高麗史≫권 99, 列傳 12, 咸有一. 신종 때 丁彦眞이 성황사의 박수무당에게 경주민란을 진압할 밀계를 주었다거나,745)≪高麗史≫권 100, 列傳 13, 丁彦眞. 우왕 때 伊金이라는 인물이 미륵불임을 자칭하고 나오자 무격들이 자신들의 성황사를 철거하고 이금을 부처로 섬겼다는746)≪高麗史≫권 107, 列傳 20, 權㫜 附 和.
≪高麗史節要≫권 31, 우왕 8년 5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차이는 고려의 성황신앙이 비록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토착화과정에서 변질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747)金甲童, 앞의 글(1991)은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성황과 기원을 달리하는 재래의 종교전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민속종교의 서낭당신앙이다. 서낭당은 토지와 마을의 수호신이며 경계신인 서낭신을 모신 곳인데, 그 형태는 神樹에 잡석을 쌓은 돌무더기 또는 신수에 당집이 복합된 것으로, 고개마루·한길 옆·마을 입구·사찰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서낭당신앙은 몽고의 顎博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시기적으로는 수렵문화 단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748)孫晋泰,<朝鮮의 累石壇과 蒙古의 鶚博에 就하여>(≪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159∼182쪽.
金泰坤,<서낭당信仰>(≪韓國民間信仰硏究≫, 集文堂, 1983), 92∼125쪽.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의 성황신앙이란 전통적 서낭당신앙이 전승되어온 것이며, 이것을 城隍이라 한 것은 서낭과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를 단정하기 어렵고,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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