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2) 민속종교의 신 관념
  • (4) 수신

(4) 수신

 물은 인간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에,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물을 지배하는 신의 존재를 상정해 왔다. 고려시대에도 물 속에는 신이 산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의종 때 함유일이 朔方道監倉使로 부임하여 鳳州의 鵂鶹岩淵을 오물로 메웠더니 갑자기 비바람이 쳐 사람들을 넘어뜨렸고, 날이 개어서 보니 오물이 모두 못 밖으로 던져져 있었다는≪고려사≫권 99 함유일전의 기사는 이러한 관념을 반영한다. 이 기사는 못의 신에 관한 것이지만, 이 밖에도 바다에는 바다의 신이, 강에는 강의 신이 있다고 여겼다.

 물속에 살면서 물을 지배하는 신의 본체는 용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문종이 일찍이 그 (박연 가운데 있는 반석) 위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풍우가 일어나 반석이 진동하는지라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 그 때 李靈幹이 호종하였다가 글을 지어 용의 죄를 헤아려 못에 던지니 용이 곧 그 등을 나타내거늘 이에 매를 치니 못 물이 이 때문에 다 붉어졌다(≪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牛峰郡 朴淵).

 그러나 용신은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고 여겼다. 가령 고려 왕실의 先代世系說話에 등장하는 서해용왕은 老翁의 모습을 했고, 삼각산 승려의 꿈에 나타나 충렬왕의 嬖倖인 尹秀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한 용 역시 노인의 모습이었다.749)≪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倖 2, 尹秀.

 水神은 물을 지배하는 존재로서, 특히 비를 내리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졌다. 그것은 비의 근원이 되는 하늘의 못을 용왕이 관리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며,750)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7, 全州祭龍王祈雨文. 그래서 한발이 들면 용왕에게 비를 빌었다. 또 기우제의 일환으로 용을 그리거나 土龍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또 수신은 뱃길의 무사함을 좌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항로에는 용을 제사하는 신사가 곳곳에 있어 뱃사람들이 여행의 안전을 빌었다. 急水門 위쪽 공지에 있었다고 하는 蛤窟龍祠나 群山島 객관 서쪽 봉우리에 있었다는 五龍廟가 그러한 곳이다.751)徐 兢,≪高麗圖經≫권 17, 祠宇 및 권 36, 海道 6. 또 신종 때 경주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정부군이 임진강을 건너면서 용왕에게 안전한 도강을 기원한 것도752)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 臨津沙平通行龍王祭文. 이러한 관념에서이다.

 그러나 수신은 인간을 초월한 능력의 소유자이므로, 물과 관련되는 이외의 사항에도 관계한다고 믿어졌다. 몽고병이 安峽에 침입하였으나 祭堂淵이란 못쪽에 많은 기병이 있는 것 같아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는 기록은753)≪新增東國輿地勝覽≫권 47, 安峽縣 山川. 이러한 관념을 반영한다. 때문에 전쟁에 앞서 용왕에게도 전승을 기원하였으니, 이러한 것으로는 신종 때 경주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정부군이 용왕에게 제사한 사실에서 확인된다.754)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 黃池院龍王祭文.

 이렇듯 수신은 水界의 지배자로서 인간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합굴용사나 오룡묘의 존재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수신에 대한 신앙은 민간차원에서도 널리 행하여졌으며, 국가나 왕실 차원에서도 중요시되었다. 특히 왕실의 경우는 태조의 할머니가 서해 용왕의 딸이라고 하여 왕실의 계보를 용신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왕족을 龍孫이라 했으며, 혜종은 용의 후손이기 때문에 늘 잠자리에 물을 뿌렸고 병에 물을 담아놓고 팔꿈치를 씻었다고 전해진다.755)≪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莊和王后 吳氏. 왕씨는 龍種이기 때문에 左脇 밑에 金鱗이 3개 있다는 전승도 있다(≪燃藜室記述≫1, 所引 閑骨董 참조). 고려 왕실은 이러한 전승을 통하여 자신들의 계보를 초월적 존재와 연결시킴으로써, 왕의 권위를 높이고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 결과 국가적 제전인 팔관회나 각종 국가제사에서 용신을 비롯한 수신이 숭배대상 내지 치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현종 16년(1025) 5월 海南道 定安縣에서 산호수를 거듭 바치자 상서라고 하여 南海神을 사전에 올렸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756)≪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이적을 보인 신을 새로이 사전에 포함시켜 국가의 치제대상을 확대해 나갔다. 참고로≪고려사≫지리지에서 수신의 祭場이라 한 것들을 열거해 보면, 南京留守官 楊津, 燕岐縣 熊津, 瓮津縣 長山串, 交州 德津溟所, 安岳郡 阿斯津 省草串과 挑串, 黃州牧 阿斯津 松串, 靜邊鎭 沸流水, 翼陽縣 東海神祠가 있다. 이 밖에 고려의 대표적인 용신 제장으로는 開城大井이 있는데, 이것은 태조의 할머니인 용녀가 팠으며 친정인 용궁을 드나들 때 이용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개성대정에서 기우제와 別祈恩祭가 빈번이 거행되었다.757)李惠求,<別祈恩考>(≪韓國音樂序說≫, 서울大出版部, 1972), 307∼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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