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2) 민속종교의 신 관념
  • (5) 기타

(5) 기타

 민속종교는 원래 다신숭배를 특징으로 하는 만큼, 고려시대의 기록에서도 위에서 열거한 것 이외의 많은 신앙대상들이 확인된다. 고려시대 민속 종교의 신 관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격들 하나하나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되겠지만, 여기서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東神祠에 모셔진 신을 들 수 있다. 동신사는「東神聖母之堂」의 약칭으로 東神堂·東神廟라고도 하는데, 개경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宋에서 사신이 오면 들러서 참배할 정도로 고려의 대표적인 신사였던 만큼,758)尹以欽,<「高麗圖經」에 나타난 宗敎思想>(≪韓國宗敎硏究≫1, 1986), 119쪽. 규모도 커서 곁채만 하더라도 30칸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전에는 장막을 치고 신상을 모셔두었는데, 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河伯女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설명은 인종 원년(1123)에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의≪고려도경≫사우조에 보이는 바이지만, 동신당은 고려 초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문종 11년(1057)의 禮部의 건의 중에 동신당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759)≪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1년 5월 무인.

 이 때 예부의 건의사항은 동신당을 비롯한 5개소에서 7일에 한 번씩 기우제를 지내자는 것이다. 그리고≪고려사≫오행지에는 동신당에서 祈晴祭나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사가 여러 번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신이 비를 조절하는 힘을 가진 신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 하백녀가 농업신으로 신앙되었음을 생각할 때,760)金哲埈,<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大出版部, 1990), 54∼62쪽. 동신의 이러한 성격은 고구려의 신앙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木郎 혹은 木魅라는 것이 있다.≪고려사≫권 128, 李義旼傳에 의하면 당시 경주에는 豆豆乙이라고 하는 水魅를 신앙하고 있었고, 경주 출신의 이의민도 집안에 신당을 지어 이를 모셔놓고 날마다 복을 빌었는데, 하루는 목매가 울면서 이의민의 패망을 예언했다고 한다. 또≪고려사≫권 54, 오행지 2에는 고종 18년(1231) 10월 을축일에 경주에서, 다섯 木郎이 “병장기를 보내주면 몽고병을 물리쳐주겠다”고 했고, 또 인간의 길흉화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의 시를 지어 당시의 집정무인인 崔瑀에게 주었다고 보고하니, 최우는 內侍 金之蓆을 시켜 요구한 물건들을 주었으나 영험이 없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런데 이 기사 가운데 “木郎은 곧 木魅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 고적조에는 목랑을 ‘豆豆里’라고 하는데, 이 목랑을 王家藪라는 곳에서 제사하며, ‘두두리’는 신라 진지왕의 혼령이 桃花女와 관계해서 낳은 鼻荊郎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들 기사는 목랑 혹은 목매가 병화로부터의 수호 등 인간의 길흉화복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신으로, 주로 경주지역에서 신앙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의민이 열렬한 무격의 신봉자였다고 하는 바, 목랑은 주로 무격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목매란 나무의 精을 뜻하며, 도깨비는 절구공이·부지깽이같은 나무붙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목매란 도깨비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두두리·두두을이란 ‘두드린다’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도깨비의 속성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761)朴恩用,<木郎攷>(≪韓國傳統文化硏究≫2, 曉星女大, 1986), 53∼64쪽.
姜恩海,<豆豆里(木郎) 再考>(≪韓國學論集≫16, 啓明大, 1989), 57∼74쪽.
이러한 추측이 용납된다면, 도깨비에 대한 신앙은 고려시대에 이미 있었으며, 그것은 주로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이르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셋째, 인간의 死靈을 들 수 있다. 인간의 사령 중 조상신은 후손에게 있어 생명의 원천이며 수호자라는 의미에서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고려왕실의 경우, 선왕의 위패(木主)를 모셔둔 太廟, 선왕의 眞影을 한 곳에 모셔둔 景靈殿, 선왕이나 先妃의 진영을 모셔두고 명복을 비는 眞殿寺院을 두어 조상숭배의 의식을 거행하였다.762)許興植,<佛敎와 融合된 王室의 祖上崇拜>(≪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47∼102쪽. 이러한 곳들은 조상의 신령이 계신 곳이라 하여,763)“太廟祖宗神靈所在可畏”(≪高麗史≫권 122, 列傳 35, 伍允孚). 여기에서 신왕의 즉위 등 국가의 각종 중요한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전승이나 관제 개정 등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보고하였다. 또 이러한 곳들은 병란이나 자연의 재해가 있을 때에는 조상의 도움을 비는 의례를 거행하는 장소였고, 천도의 가부나 외국과의 화전 여부를 결정할 때에는 조상신의 의사를 알기 위해 점을 치는 장소였다.

 이렇듯 사령 가운데에는 조상신처럼 생자를 지켜주고 도와주는 선의의 존재도 있지만,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존재도 있다. 고려시대에도 원한을 품고 죽은 혼령은 질병을 비롯한 온갖 재앙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념은 인종 24년(1146) 왕이 병에 걸리자 이자겸과 척준경의 원혼 때문이라 했던 것이나,764)≪高麗史≫권 17, 世家 17, 인종 24년 정월 신묘·2월 병진. 황해도에 전염병이 돌자 여러 번 병란을 겪는 바람에 희생당한 棘城의 원혼들의 탓이라 생각했다는 것765)≪新增東國輿地勝覽≫권 41, 黃州牧 祠廟 棘城祭壇.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원령이 빌미가 된 병을 예방 또는 치료하기 위해서는 원령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종은 이자겸의 처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가 하면 척준경의 관직을 追復하고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극성의 경우는 국가에서 봄 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이들을 제사하였다.

 나아가 사후에 아예 원령이 되어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책이 강구되기도 했다. 인종 초에 李永이 이자겸 세력에 의해 쫓겨나서 분사하자 이자겸은 술사를 보내어 그를 길가에 묻었다고 한 것이나,766)≪高麗史≫권 97, 列傳 10, 李永. 우왕 12년(1386) 淑妃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사람이 죽은 다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하자 그 시신을 저자에 버리게 했다든지 하는 것은,767)≪高麗史≫권 136, 列傳 49, 우왕 12년 3월 을해. 원령의 복수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넷째, 토지신을 들 수 있다. 토지신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方澤과 社稷을 두어 제사했지만, 민간에서는 오늘날 민속종교의 터주·터줏대감같은 것이 신앙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이제현의≪櫟翁稗說≫前集 2에 보인다. 즉 樞密 韓光衍이 음양설을 무시하고 집을 지었더니 이웃 사람의 꿈에 그의 집 토신이 나타나, 주인이 공사를 일으켜 우리를 편히 살지 못하게 하지만 벌주지 못하는 것은 그의 청렴함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토신은 집터마다 존재하여 집터를 맡아보고 집안의 길흉화복에도 관계하는 존재라 하겠다. 또 이것은 집을 지을 때에는 토신에 대한 배려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재앙이 따른다(동티난다)는 믿음이 고려 시대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민속종교는 다양한 신격들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다신교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인간사회에 보다 가까이 있는 산신이나 성황신·수신 등이 의례와 간청의 대상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 이에 비해 천신은 최고신으로 여겨진 것 같지만, 국가적 차원에서와는 달리 민간차원에서는 직접적인 의례의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렇듯 다양한 신들은 모두 인간에게 복을 줄 수도 있고 재앙을 줄 수도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인간이 기원하면 들어줄 수도 있는 존재로 믿어졌다는 점에서는 같다. 나아가 신들 각각은 인간생활의 특정 측면에만 영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 관계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때문에 신들은 달라도 기원하는 내용은 같아진다. 이것은 고려시대 민속종교에시도 신들의 직능이 그만큼 분화 내지 전문화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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