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3) 민속종교의 의례
  • (1) 치병

(1) 치병

 질병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인 만큼, 고려시대에도 질병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들이 다양하게 강구되었다. 이 중에는 의약을 통한 치료 방법도 있었지만, 당시 의학 수준의 한계로 말미암아 종교적 방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려도경≫사우조에서 “고려는 평소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에 얽매어 병이 나도 약을 먹지 않으며, 부자 사이같이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呪咀와 厭勝을 알 따름이었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종교적 방법은 질병이 초자연적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질병은 신의 벌이거나 원령의 복수라는 것이다. 예종이 병에 걸리자 宰樞들에게 자신이 부덕하여 하늘이 내린 벌이라 했다거나,769)≪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7년 4월 을미. 충렬왕 때 金㥠가 재판을 잘못했는데 꿈에 하늘에서 사람이 칼을 들고 내려와 치는 꿈을 꾸고 등창이 나서 죽었다거나,770)≪高麗史≫권 106, 列傳 19, 李湊 附 行儉. 충렬왕의 嬖倖 尹秀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는데 이는 용의 아들을 죽인 벌이라고 한 것771)≪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倖 2, 尹秀. 등은 전자의 예이다. 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종의 병은 이자겸이나 척준경이 빌미가 되었다고 한 것이나, 고종 때 尹周輔가 최이에게 죽임을 당한 金孫己의 처를 취하고 나서 김손기가 나타나 그를 치는 꿈을 꾸고 맞은 부분에 통증을 느끼다 죽었다고 하는 것은772)≪高麗史≫권 103, 列傳 16, 金希磾.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병을 일으키는 것을 담당하는 五瘟(溫)神을 상정하기도 하였다. 오온신이란 상제를 대신하여 인간에게 각 계절의 질병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중국에서는 晋代에 이러한 관념이 나타나 隋唐代에 들어 오면서 널리 신앙되었다고 한다.773)宗力 劉君,≪中國民間諸神≫(河北人民出版社, 1986), 477∼480쪽.≪고려사≫권 63, 志 17, 禮 5, 雜祀條에 숙종 때 溫疫 퇴치를 위해 오온신에게 빌었다는 기록들이 있고,≪東國李相國集≫권 38에는<七鬼五瘟神醮禮文>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오온신의 존재를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병에 걸리면 어떤 초자연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이 때 동원되는 것이 점복이다. 인종이 병에 걸렸을 때 점을 쳤다든지, 인종비 恭睿太后 任氏가 처녀시절 혼인을 하려는데 갑자기 발병하여 사경을 헤매자 卜人에게 病占을 쳐보게 했다든지 하는 것은774)≪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恭睿太后 任氏.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규보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나쁜 종기가 온몸에 퍼지자 그의 아버지가 松岳祠宇로 가서 산가지를 던져 나을 수 있겠는지와 무슨 약을 쓰면 좋은지를 점쳤다고 하는 바,775)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 年譜. 병점은 발병 원인을 찾아내는 데 뿐만 아니라, 이런 경우에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질병이 초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이란 관념은 치병도 초자연적 방법에 의해야 한다는 관념을 낳았다. 그래서 원령이 원인이라면 원령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이 병의 빌미라고 하자 귀양간 이자겸의 처자를 고향인 仁州로 옮겨주었고, 척준경의 관직을 追復하면서 그의 자손을 소환하여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776)≪高麗史≫권 17, 世家 17, 인종 24년 정월 신묘·2월 병진. 그런가 하면 무당의 말에 따라 신축한 金堤郡 碧骨池의 둑을 허물기도 했다.777)≪高麗史≫권 17, 世家 17, 인종 24년 2월 경신. 이것은 벽골지의 둑을 만드는 과정에서 흙을 잘못 다루었기 때문에 地神이 노하여 병을 가져다 주었다는, 즉 동티〔動土〕났다는 관념에서 취해진 조치일 것이다.778)李能和,<朝鮮巫俗考>(≪啓明≫19, 1927), 6쪽.
신종 원년 6월에 경주민란과 만적란의 원인이 이의민이 쌓은 沙堤 때문이라고 한 術家의 말에 따라 이를 허문 것(≪高麗史節要≫권 14)도 동티관념의 한 사례라 하겠다.

 또 영험있는 존재에게 병이 낫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역시 여러 종교가 병존하는 다종교 상황이었던 만큼, 기원의 대상은 대단히 다양하였다. 다시 말해서 어떤 종교전통의 초월적 존재인가를 막론하고 병을 낫게해줄 수 있는 존재라면 모두가 기원의 대상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도 여러 계통의 초월적 존재들을 동시에 의례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듯 고려시대의 치병의례에는 종교계통을 달리하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민속종교의 치병의례는 역사도 오랠 뿐만 아니라 가장 널리 거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민속종교의 신격에 대한 기원 사례로는, 민간에서 병이 나면 숭산묘(송악 신사)를 찾아가 옷이나 말을 바치고 기도했으며,779)徐 兢,≪高麗圖經≫권 17, 祠宇 崧山廟. 학질 환자는 화병으로 죽은 사람을 길가에 묻은 곳을 찾아가 기원했던 사실을780)≪高麗史≫권 97, 列傳 10, 李永. 확인할 수 있다. 또 신종 때 경주민란을 진압하러 간 정부군 사령관인 金陟候가 진 중에서 병을 얻자 부사 이하가 제문을 지어 지리산대왕에게 제사한 경우와,781)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 智異山大王前願文. 우왕이 장단에 놀러갔을 때 기생 5·6명이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자 술과 고기를 차려놓고 감악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경우도 있었다.782)≪定宗實錄≫권 3, 정종 2년 정월 을해.

 그리고 전염병은 미치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개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병이 돌고 있는 집단이나 국가 차원에서도 이를 물리치기 위한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것으로는 숙종 5년(1100)과 6년에 五部에서 오온신을 제사한 것,783)≪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예종 4년(1109) 5부에서 瘟神에게 제사하고 또 송악과 여러 신사에 사람을 보내어 祈禳한 것,784)≪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4년 4월 갑진·12월 을유. 신종 때 경주민란을 진압하러 간 정부군의 진중에 전염병이 돌자 제문을 지어 7鬼와 오온신에게 제사한 것785)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 七鬼五瘟神醮禮文. 등을 들 수 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초자연적 존재에게 기원하는 것은 왕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병자가 생기면 불교적 내지 도교적 의례들과 함께 민속종교의 신격들에게도 완쾌를 빌었던 것이다. 예종 17년(1122)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산천의 神祇들에게 기도한 것,786)≪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7년 3월 임오. 인종이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무당과 의원 方術을 찾음이 한두 번이 아니며 神聖之靈에 빈 일이 많았던 일”787)金富軾,<俗離寺占察會疏>(≪東文選≫권 110). 고종 46년(1259)에 근신들을 파견하여 여러 신사와 道殿에 기도한 것,788)≪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6년 4월 갑신. 충렬왕 원년(1275)에 洪子藩을 보내어 지리산에 제사한 것,789)≪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원년 6월 기사. 충숙왕 16년(1329)에 제천단이 있는 氈城에서 기도한 것790)≪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6년 5월 병술.
鹽州(연안) 동쪽의 氈城에 제천단이 있음은≪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에 언급되어 있다.
등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왕의 경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신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명산대천의 神祇들에게 加號를 하는가 하면791)≪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7년 4월 을축. 조상의 陵을 수리하기도 하고,792)≪高麗史≫권 20, 世家 20, 충렬왕 5년 4월 계묘. 나아가 병이 빌미가 된 것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죄수의 사면, 토목공사 중지, 도살 금지, 사냥하기 위해 잡은 매를 놓아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 避病이란 것이 있었다. 피병이란 병을 얻거나 전염병이 돌면 얼마 동안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법이다. 이러한 풍습은 定宗이 위독하자 帝釋院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793)≪高麗史≫권 2, 世家 2, 정종 4년 3월 병진. 고려 초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고려사≫에는 왕이나 왕비가 피병했다는 기사가 20여 회에 걸쳐 보이고 있다. 또 能祐라는 승려가 신돈의 아이를 맡아서 기르면서 아이가 아프니 다른 곳으로 옮겨 길러야겠다고 한 것과,794)≪高麗史≫권 133, 列傳 46, 辛禑 1, 우왕 즉위전 기사. 우왕이 王福命에게 그의 손녀와 혼인하겠다고 하자 왕복명이 “신의 손녀는 병을 얻어 避居 중이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한 기사도 보인다.795)≪高麗史≫권 135, 列傳 48, 辛禑 3, 우왕 9년 9월 갑진. 이러한 사실은 고려시대에는 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피병이란 풍습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왕이나 왕비의 경우, 피병을 하는 곳은 대개가 사찰이나 개인의 私第였다. 그리고 사제로는 무신의 집인 경우들이 보인다. 충렬왕비가 장군 李貞의 집으로,796)≪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5년 5월 무진. 충렬왕이 金方慶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그것이다.797)≪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9년 정월 병진.이러한 사실은, 피병이 병을 일으키는 악귀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병을 예방하거나 낫게하기 위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東國李相國集≫권 35, 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大師碑銘에는 강종이 병을 얻자 國師 志謙이 왕의 병을 자신의 몸에 옮기려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것은 병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환자가 낫는다는 관념이 당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할 때 피병하는 의미도 병을 견딜 수 있는 사람에게 병을 옮김으로써 낫게 한다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피병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이와 함께 여러 가지 금기들을 지켜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역옹패설≫전집 2에 金汝孟이란 인물이 어떤 시골집에 피병가서, 절대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지시를 지키려다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금기사항 중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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