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3) 민속종교의 의례
  • (3) 점복

(3) 점복

 점복이란 어떤 징표를 토대로 미래에 일어날 일, 과거나 현재의 감추어진 사실, 그리고 현재 하고자 하는 행위의 시비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방법인데, 다만 징표와 정보의 관계가 경험과학적이 아니고 초자연적·신비적인 데 그 특징이 있다. 한국의 청동기 내지 초기 철기시대의 주거지에서 점복에 사용되는 卜骨들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점복의 역사는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개인의 행동에서부터 국가의 정책결정에 이르기까지 점복에 의존하는 바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국가기구 속에 점복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다는 점이다. 太卜監과 太史局이 그것으로, 이들 관청은 국초에 설치되어 중간에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고, 통합과 분리를 되풀이했지만 고려 말기까지 존속하였다.828)≪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에 의거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국초 현종14 예종11 충렬1 충렬34 공민5 공민11 공민18 공민21
太卜監 司天臺 司天監 觀候監 太史局 書雲觀 司天監 書雲觀 司天監 書雲觀
太史局 太史局 太史局 太史局 太史局 太史局 太史局

태복감과 태사국에는 각각 太卜監·太史令 이하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소속되었고, 이들을 통칭하여 日官이라 하였다. 일관들은 국왕의 측근에서 天變地異의 의미를 해독하고 그에 대한 대처방안을 제시하였으며, 또 국왕과 관련된 각종 행사의 택일, 吉地의 卜定 등을 업으로 하고 있었다. 태조의 후삼국 통일을 예언한 고려 초의 崔知夢과 충렬왕대의 伍允孚는≪고려사≫에 독립된 열전이 마련될 정도로 日官으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진 인물이었고, 특히 오윤부는 점복으로 그 명성이 원에까지 알려져 원 세조의 초청을 받기도 하였다. 또 고려에서는 점복인의 양성에도 어느 정도 배려를 하였으니, 태조 13년(930) 서경에 학교를 설치할 때 복업을 두었으며,82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광종 9년(958) 과거를 처음 시행하면서부터 복업을 뽑았다.830)≪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를 점복으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현종 2년(1011) 거란에 사절을 파견하기에 앞서 태사로 하여금 길흉을 점치게 하였으며,831)≪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2년 4월 을축. 인종 4년(1126)에는 금나라에 대한 事大의 可否를 태묘에서 점쳤고,832)≪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3월 을미. 고종 8년(1221)에는 몽고측의 무리한 물품 요구를 들어줄 것인지를 태묘에서 점쳤다.833)≪高麗史節要≫권 15, 고종 8년 9월. 또 예종 2년(1107)에는 여진을 정벌할 것인가를 태묘에서 점쳤으며,834)≪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공민왕 6년(1357)에는 왕이 직접 奉恩寺로 행차하여 太祖眞殿에서 한양 천도의 가부를 점쳤고,835)≪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6년 정월 임진. 우왕 3년(1377) 왜구가 개경 부근까지 위협함에 천도 여부를 태조진전에서 점쳤다.836)≪高麗史≫권 133, 列傳 46, 우왕 3년 5월 계미. 이러한 사실들은 외교·전쟁·천도 등 미래의 길흉을 예측·판단하기 어려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점복에 의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중대한 문제의 결정을 점복에 의지하려는 것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종 7년(1220) 崔怡(瑀)의 동생 崔珦은 洪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신사로 가서 점구를 던져 길하다는 답을 얻었고,837)≪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고종 45년(1258) 文璜 등은 권신 金俊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면서 盲僧 伯良에게 일의 성패를 점쳤으며,838)≪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원종 12년(1271) 判太史局事 安邦悅은 강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문제에 대해 태조진영 앞에서 점을 친 후 삼별초를 따라 진도로 갔다는 것 등은839)≪高麗史節要≫권 19, 원종 12년 5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징표를 기준으로 할 때 고려시대의 점복은 자연현상을 징표로 한 것, 인간의 어떤 측면을 기준으로 한 것, 인위적으로 만든 징표를 기준으로 한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자연현상을 징표로 한 점복은, 자연의 운행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이상현상을 보이는 데에는 무언가 감추어진 의미가 있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 때 징표가 되는 자연현상으로는 천문현상·기상현상·동물의 변태 등이 있으며,≪고려사≫의 천문지와 오행지 등에서 이에 관한 사례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몇 가지만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선종 9년 11월 경자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자, 태사가 3년 안에 國喪이 있겠다고 하였다(권 47, 志 1, 天文 1).

○ 명종 16년 9월 신유일에 鎭星이 歲星을 범하니, 태사가 내란이 있을 징조이니 佛頂消災道場을 열어 이를 가시게 하자고 아뢰었다(권 48, 志 2, 天文 2).

○ 숙종 6년 정월 임술일에 赤氣가 북쪽에서 서쪽으로 하늘에 가득차게 뻗혀있자, 占者가 遼宋 간에 兵喪之災가 있겠다고 하였다(권 54, 志 8, 五行 2).

○ 명종 6년 4월 신축일에 黑氣가 서북에서부터 동남으로 뻗혀있자 태사가 3개월이 못되어 西京의 반란군이 패망할 것이라고 하였다(권 53, 志 7, 五行 1).

○ 선종 6년 4월, 찬바람이 크게 일어나자 태사가 兵革 旱災의 징조이니 덕을 닦아 이를 가시게 하자고 했다(권 55, 志 9, 五行 3).

○ 인종 11년 12월 병술, 운무가 5일간 끼었고 나무가 얼자 태사가 아뢰기를 나라에 큰 근심이 있고 외적이 침입해 올 징조라고 하였다(권 55, 志 9, 五行 3).

○ 고종 46년 5월 을묘일에 慈雲寺의 연못에서 피빛 같은 붉은 물거품이 생기니, 寶文閣 校勘 姜度가 말하기를 신라 虎景王 때에도 大觀寺 연못이 붉게 변하더니 왕이 죽었는데 이번에도 고종의 병이 낫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권 53, 志 7, 五行 1).

○ 고종 22년 10월, 北界의 모든 강들 얼음이 두텁게 얼었다가 갑자기 갈라지니, 父老들이 몽고병이 침입해올 징조라고 하였다(권 53, 志 7, 五行 1).

○ 태조 8년 3월 병신일에 궁성에서 길이 70자나 되는 지렁이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발해가 투항해올 조짐이라 하였다(권 55, 志 9, 五行 3).

○ 우왕 7년 4월 갑자일에 도성으로 노루가 들어오니 日官이 秘記에 의해 이는 나라가 망할 징조이니 왕이 사냥을 다니지 말고 반성할 것을 권하였다(권 54, 志 8, 五行 2).

○ 최응의 어머니가 최응을 임신했을 때 그 집 호박넝쿨에 참외가 열렸는데, 궁예가 이를 점쳐보니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라에 위태롭다고 했다(권 92, 列傳 5, 崔凝).

 이상의 사례들은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이 미래에 일어날 사태를 알려주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알려주는 바는 국왕의 죽음, 내란의 발발 및 그 결과, 외적의 침입, 한발, 나라의 멸망 등에 걸치고 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 일어날 일까지도 예시하고 있다. 이렇듯 자연현상이란 징표의 의미를 판단함에는 나름대로 근거하는 바가 있었다. 위의 사례에서 신라의 고사와≪秘記≫같은 문헌이 징조를 판단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는데, 이러한 문헌으로는 이 밖에도≪海東古賢讖記≫·≪天地祥瑞誌≫·≪開元占經≫·≪舊占文≫·≪京房易傳≫등 우리나라와 중국의 점서들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인간의 어떤 면을 징표로 한 점복으로는 觀相占과 星命占, 夢占이 행해지고 있었다. 관상점이란 인간의 相貌를 보고 그의 운명을 판단하는 것인데, 이에 관한 자료로는, 고려 초의 승려인 忠湛이 어렸을 매 相者가 그의 관상을 보고 12살에 명성을 드러내겠다고 한 것,840)<原城興法寺眞空大師塔碑>(≪韓國金石全文≫中世 上, 亞細亞文化社, 1984), 309쪽. 演之라는 術僧이 崔怡의 관상을 본 것,841)≪高麗史≫권 103, 列傳 16, 金希磾. 안향이 金怡의 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842)≪高麗史≫권 108, 烈傳 21, 金怡.相師 天一이 충선왕의 관상을 본 것843)≪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즉위전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 성명점이란 사람의 생년월일을 天干地支에 배당시켜 天星의 운세를 살핌으로써 인간의 운명을 추산하는 것인데, 우왕 때의 인물인 朴尙衷이 성명학에 정통하여 사람의 길흉을 점쳐 적중함이 많았다는 사실이 전해진다.844)≪高麗史≫권 112, 列傳 25, 朴尙衷.

 夢占이란 인간의 꿈을 징표로 하여 미래사를 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꿈을 신비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이에 의하면 꿈은 신이 친히 나타나 신의를 계시하는 장이거나 인간의 운명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는 것이다. 의종이 西江으로 놀러가려는데 꿈에 한 부인이 나타나 5월 이전에는 놀러가서는 안된다고 했다든지,845)≪高麗史≫권 19, 世家 19, 의종 24년 3월 정사. 예종 때의 인물인 郭輿의 꿈에 어떤 이인이 나타나 이름을 輿로 개명하라고 했다는 것은846)≪高麗史≫권 97, 列傳 10, 郭輿. 전자의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기 때문에, 행차를 중지하거나 이름을 고치면 될 뿐 점복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후자는 뜻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주로 점복의 대상이 되는 꿈은 후자의 경우이다.

 몽점에 관한 것으로 기록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胎夢이다.≪고려사≫의 열전이나 고려시대 승려들의 탑비에 그 인물의 위대함을 내세우기 위해 많은 태몽들이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이미 상당수가 정리된 바 있어,847)任東權,<高麗時代의 占卜俗>(앞의 책), 326∼328쪽.
秋萬鎬,<羅末麗初 禪師들의 胎夢과 民衆生活>(≪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伽山佛敎文化硏究院, 1992), 647∼667쪽.
이들 사례의 제시는 이로써 미루기로 하지만, 한 가지 첨가할 것은 아이의 이름을 태몽에 근거해서 짓는 풍속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어머니가 하늘에 자식얻기를 청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이를 품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하여 초명을 請이라 했다든지,848)≪高麗史≫권 99, 列傳 12, 李純佑. 난초 화분을 안다가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해서 초명을 夢蘭이라 했던 사실이 전해진다.849)≪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몽점에는 태몽과는 달리 꿈을 꾼 당사자의 미래를 알아보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사례로는 최지몽이 태조의 꿈을 후삼국을 통일할 징조라고 해몽한 것,850)≪高麗史≫권 92, 列傳 5, 崔知夢. 경종의 왕비 獻貞王后가 곡령에 올라가 소변을 보는 꿈을 꾸고 점을 치니 국왕을 낳을 징조라고 한 것,851)≪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獻貞王后 皇甫氏. 현종이 숨어 살던 시절에 꿈에 닭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듣고 술사에게 물으니 즉위할 징조라고 해몽한 것852)≪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즉위전기.등을 들 수 있다. 또 꿈을 토대로 행동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崔暹이 제자인 金審言의 머리에서 화기가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사위를 삼았다든지,853)≪高麗史≫권 93, 列傳 6, 金審言. 충렬왕 때 金連은 차고 있던 金魚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벼슬을 그만두었다는 것이854)≪高麗史≫권 107, 列傳 20, 金連. 그것이다.

 인간이 만든 징표를 토대로 한 점복이란 占具를 이용한 점복 방법이다. 이것은 비록 인위적인 것이지만 적당한 도구와 적절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신의 뜻이나 미래의 길흉을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하나는 우왕 3년(1377) 왜구 때문에 천도를 하고자 하여 太祖眞殿에 사람을 보내어 점쳤는데 ‘動’ ‘止’ 중 ‘지’자를 얻어 이를 중단하였던 사실인데,855)≪高麗史≫권 133, 列傳 46, 우왕 3년 5월 계미.
이러한 점복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공민왕 6년 한양천도 여부를 결정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어떤 일의 가부를 결정하고자 할 때 가부에 해당하는 글자를 만들어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일을 결정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나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茭 또는 杯珓라는 점구를 몇 개 던져 그것이 떨어진 모습을 보고 점복을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이규보가 태어난지 석 달만에 나쁜 종기가 생겨 약을 써도 낫지 않자 그의 아버지가 송악신사에서 아이의 생사와 무슨 약을 쓸 것인지를 점칠 때 사용되었다. 또 이규보가 전주의 지방관으로 가서 성황신이 언제 비를 줄 것인지를 점칠 때도 이용되었으며,856)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 年譜 및 권 37, 又祈雨城隍文. 최이의 동생 최향이 반란을 꾀하기에 앞서 성패를 점칠 때도 사용되었다.857)≪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오늘날에도 인위적 징표를 토대로 한 점복이 여러 가지로 행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擲米占이나 돈(錢)점은 바로 고려시대의 이러한 점복 방법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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