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3. 민속종교
  • 3) 민속종교의 의례
  • (4) 기복제

(4) 기복제

 이상에서 언급한 의례들도 재앙을 방지하거나 물리쳐서 궁극적으로는 복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이와는 달리 복을 비는 것이 일차적 목적인 의례들도 있다. 특별한 재앙이나 이상현상이 없는데도 정기적으로나 수시로 거행되는 의례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민속종교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산천에 대한 의례들이다. 산천에 대한 의례는 신라시대에 이미 祀典에 포함되어 국가제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에서도 명산대천은 국가적 의례의 대상이 되었으며, 성종 9년(990)에 그 틀이 마련되었다. 성종은 그 2년에 원구제를 거행하고 7년에는 5묘를 정하였으며, 9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여 산천의 제사를 刪定하겠다는 교서를 내렸다.858)≪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9년 9월 기묘. 그러므로 고려의 산천에 대한 제사는 성종이 유교이념에 보다 충실하게 사전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제도화된 것이라 하겠다.

 국가의 사전에 포함된 산천으로는 積城 紺岳山·西京 楊津·鎭州의 胎靈山·燕岐 熊津·公州 鷄龍山·大興 蘇定方祠·報恩 俗離山·鎭安 馬耳山·南原 智異山·靈岩 月出山·海陽 無等山·交州 德津溟所·安岳 阿斯津華串과 挑串·長淵 長山串·黃州 阿斯津松串·定州 鼻白山·靜邊鎭 沸流水가≪고려사≫지리지에서 확인된다. 이들 산천에 대해서는 특별한 재앙이 없더라도 국가에서 봄과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주는가 하면, 각지에 外出祭告使를 파견하여 제사하게 했다. 이 제도는 낭비가 많다고 하여 문종 18년(1064) 동북 양계와 浿西道는 외산제고사를 따로 파견하지 않고 각각 監倉使와 안찰사가 이 일을 대신하게 하는 변화가 있기도 했지만,859)≪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8년 2월 계유. 신종 원년(1198) 李寅甫가 경상도제고사로 파견된 사실이≪補閑集≫등에서 확인되는 등860)崔 滋,≪補閑集≫下. 고려 일대를 통하여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충렬왕 원년(1275)에는 外山祈恩別監을 충청·경상·전라·동계로 나누어 보냈다고 하는데,861)≪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원년 6월 무신.이외산기은별감이 외산제고사와 같은 것이라면 이들의 파견 목적이 국가를 위해 복을 비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에서는 이들의 제사 비용을 위해 산천의 신사에 토지를 지급하였다. 창왕 즉위년(1388) 9월 사전개혁을 논의하면서 道殿·神祠 등의 토지는 회수하지 말자는 견해가 많자 右常侍 許應이 이를 반대한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86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이러한 공식적인 의례와는 달리 왕실이 사사로이 복을 비는 의례들도 있었는데, 別祈恩이 그것이다. 별기은이란 개경의 國巫堂에서 국내의 여러 산천을 合祭하여 祈恩하는 것과는 별도로, 지방의 명산대천 소재지에서 복을 빌게 하는 행사이다.863)李惠求, 앞의 글, 299∼338쪽. 성종 원년(982)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왕실이 別例祈祭를 지내지 말도록 하자고 한 것을 보면, 이러한 행사는 고려 초부터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별기은은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행해졌다.864)≪太宗實錄≫권 22, 태종 11년 7월 갑술. 그러나 왕실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 때는 더욱 빈번히 거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공양왕은 사철 13곳에서 별기은을 행하였다고 한다.865)≪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9월 계사. 이 때 별기은이 거행된 13곳이 어디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 중 8곳은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德積·白岳·松岳·木覓·紺岳·開城大井·三聖·朱雀이 그것이다. 여기서 삼성이란 몽고압제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水道의 화복을 주재하는 신을 제사하는 곳이며, 주작이란 朱雀 7宿를 제사하는 곳을 말한다.866)이상은≪太宗實錄≫권 22, 태종 11년 7월 갑술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이에 의하면 주작은 송도 南薰門 밖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新增東國輿地勝覽≫권 13, 豊德郡 祠廟條에 三聖神堂과 朱雀神堂이 나란히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이들을 제사하는 곳은 풍덕에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할 때 별기은에서는 산신·수신 등 다양한 신격들이 의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으며, 그 중에서도 산신이 가장 많았다고 하겠다.

 별기은을 위해서는 환관이나 司鑰 또는 무격을 보내어 치제하게 했지만, 공민왕 22년(1373)에는 왕의 嬖倖인 金興慶의 어머니 柳氏를 交州·江陵·楊廣 三道祈恩使로 파견한 경우도 있다.867)≪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金興慶. 이로 미루어 별기은을 위해서는 왕실의 측근자들이 파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복을 빌기 위한 의례는 왕실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충선왕 3년(1311) 공경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다투어 감악산에 제사했고, 그 바람에 知中門事 閔儒와 前少尹 金瑞芝가 감악산으로 가다가 長湍津에서 빠져죽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하는데,868)≪高麗史節要≫권 23, 충선왕 3년 4월. 이러한 감악산 제사도 기복을 위한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이렇듯 왕실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또 공식적인 데서부터 국가에서 금지하는 행사에 이르기까지 기복제가 거행되고 있었다면, 어떤 내용들이 기원되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인종 16년(1138) 국내의 명산대천을 제사하면서, 왕은 천지의 和氣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했다.869)≪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16년 5월 경자. 이렇듯 기원의 내용이 거창한 것도 있지만, 대체로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기원되었던 것 같다. 예종 2년(1107) 종묘와 사직 및 群望(산천)에 제사하여 풍우의 순조를 기원했다든지,870)≪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2년 7월 무자. 명종 15년(1185) 白馬山에 사람을 보내어 태자의 후사를 빌었다든지871)≪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5년 5월 병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각종의 기복제란 풍요와 다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불러들이려는 의례라 할 수 있겠다.

 이상에서 고려시대에 거행되었던 의례들을 그 목적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도 국가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의례를 통하여 해결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고려의 祀典이 표면상으로는 신라에 비해 중국의 그것에 훨씬 가까와지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민속종교적 관념이 복재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가제사의 차원에서 수용된 유교적 의례들이 점차 민속종교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土龍 기우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徐永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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