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1. 중앙의 교육기관
  • 1) 국자감
  • (1) 국자감의 성립과 운영

가. 성립 배경

 國子監은 고려시대 최고 학부로서 관료 배출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의 학제로는 중앙에 국립학교인 국자감과 東·西學堂(공양왕 이후는 5부 학당)이 있고 사학으로는 崔冲 이후에 12徒가 있었으며, 지방에는 鄕校가 있어 교육을 주도해 나갔다. 최고 학부인 국자감의 성립이 고려사회에 새로운 교육전통을 마련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국자감은 고려 건국 후 70여 년이 지난 成宗 때에 성립되었다. 그러나 국자감이 설립되기 30여 년 전에 이미 과거제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성종 이전에도 관료 수급을 위한 교육 전통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高麗史≫選擧志 學校條가 “太祖 13년에 西京에 행차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001)≪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태조 13년.는 기사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점과 광종 때에 이미 과거제도가 성립 운영되어 관료를 배출하고 있었다002)≪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태조는 즉위 며칠 후에 설관 분직에 따른 인재등용의 조서를 발표하였다.

設官分職은 유능한 사람을 임명하여 그 職을 담당하게 하는 데 있고 利俗安民은 현명한 사람을 뽑는 것이 급한 일이다. …오직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지 못하고 官을 살핌에 실수가 많아 어진 사람을 빠뜨렸다는 탄식이 일어나게 하고 깊이 선비 얻는 일에 어긋날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걱정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 (중략) 마땅히 列辟을 등용하는데 群公을 낱낱이 시험하여 정선에 힘써(歷試精選) 모두 고르게 할 것이니 …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신유).

 여기에서는 인재 등용과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歷試精選」의 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이로 볼 때 국초부터「역시정선」으로 인재를 등용할 수 있을 만큼 관료 후보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고, 또 광종 때에 실시한 科擧制가 전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당시의 합격자들이 대부분 지방 출신이었다는 것은 교육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라적 교육전통에서 배양된 인재들이 고려 건국 후 관료의 자원으로 축적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시대는 이미 國學이 있어 고급 인력을 배출하였고, 또 宿衛學生들도 있어 고도의 유학적 교양을 지닌 인재들이 많았다.003)申瀅植,<宿衛學生考>(≪歷史敎育≫11·12, 1969). 또 9州·5小京을 비롯한 지방에는 學院의 명칭을 갖는 학교가 널리 보급되어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004)朴贊洙,<高麗前期 國子監의 成立과 興替>(≪民族文化≫14, 民族文化推進會, 1991). 그리고 신라 말 지방에 할거한 鄕豪들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그들 영역을 통치하던가 또는 그들 세력권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지식계급의 행정능력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향호들은 그들 자체의 장기적인 인적 자원의 수급을 위하여 종래의 학교 교육을 장려하거나 새로이 학교를 창건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나말에는 도처에 학원이란 명칭의 학교가 보편화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이것은<龍頭寺鐵幢記>에 학원의 명칭이 보이는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005)金光洙,<麗末麗初 地方學敎問題>(≪韓國史硏究≫7, 1972).

 태조 13年(930)은 통일 이전으로써, 이 때 태조가 서경에 행차하여 “別創學院”하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고려 건국 후 서경은 황폐되어 藩人들의 수렵장이 되고 있었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그 곳에 관심을 가져 黃州·鳳州·白州 등의 민호를 徙民시키기도 하고, 大丞 質榮과 行波 등의 부형 자제 및 여러 주현의 양가 자제를 옮겨 충실을 기하였다. 또 축성과 아울러 관부와 관리를 두고 行政副都로서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태조 13년의 “별창학원” 기사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부도로서의 행정기능과 관련하여 설치된 제도로 보여진다. 즉 이곳에 옮겨 살게 된 명문가와 주·현의 양가 자제를 위한 학교의 설립은 행정부도로서의 서경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과제였을 것이며, 학원이라 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통적 지방학교의 명칭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006)申千湜,≪高麗敎育制度史硏究≫(螢雪出版社, 1983), 16∼17쪽.

 태조는 건국 후 유학과 관계된 관부들을 설치하고 유학자들을 수용하여 계속 학문에 전업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고, 또 직접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즉 태조는 국초부터 白書省·元鳳省·內議省을 설치하였는데, 백서성은 이후 秘書省·典校寺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經籍祝疏를 담당한 학문적 관부였다.007)≪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典校寺. 원봉성은 泰封 이래의 학문적 관부로서 유학이념을 보급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태조 13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내의성도 지식계급을 등용하여 이후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하는 관부로 발전하였다.008)李泰鎭,<高麗宰府의 成立>(≪歷史學報≫56, 1972). 특히 원봉성은 유학의 교육도 담당하였으며, 성종 때에 유교정치의 향방을 제시한 崔承老도 일찍이 이곳에서 원봉성 학생으로 수학하였다.009)≪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 밖에도 翰林院·光文院이 있어 학생 또는 서생의 명칭으로 학문을 연수하였다.010)<龍頭寺鐵幢記>에 翰林學生 金遠의 명칭이 보이고,≪高麗史≫권 93, 列傳 6, 韓彦恭條에서는 그가 15세에 光文院 書生으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배경을 전제로 할 때, 성종 이전까지 학교 설립에 대한 기사가 선거지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종 때에 와서「詣京習業」과 국자감 설립 등의 교육 개혁이 행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성종 때 정치체제의 정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성종 이전까지는 지방호족에 대한 강력한 통치가 불가능하였고, 지방은 鄕豪의 지배하에 행정이 주도되고 있었다. 태조는 “按賓以禮 惠和之意”라는 유교적 명분을 앞세워 향호들을 후한 예물과 겸손한 태도로서 포용하였고 이들에게는 지방의 통제권을 위임하였다. 이후 광종과 경종을 거치는 동안 이들에 대한 숙청 작업이 시도되었지만, 성종 이전까지는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방행정이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력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방교육도 이들 향호들에게 위임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종 때에는 강력한 집권화정책이 수행되었다. 즉 성종 원년에는 唐制에 따라 중앙관제를 제정하여 3省 6部를 설치하고, 이어 다음해에는 12牧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니, 이제 지방에서 자치권을 가졌던 호족들은 중앙정부의 통제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이 때에 개정된 鄕職은 호족들로 하여금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보좌역인 향리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011)邊太燮,≪韓國史通論≫(三英社, 1986), 164쪽. 성종 때에 나타나는 교육개혁도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즉 집권적 국가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지방호족들에게 위임되었던 교육을 국가의 통치권 안으로 흡수하고, 또 중앙관료를 체계적으로 양성 배출시켜야 한다는 당면의 개혁정책이 국자감 설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육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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