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1. 중앙의 교육기관
  • 2) 동·서학당
  • (1) 설립

(1) 설립

 學堂은 고려시대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이에 대한 기록은 원종 때에 처음 나타난다.

東·西學堂을 설치하고 각각 別監·敎學·敎導를 파견하였다(≪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원종 2년 3월).

 즉 원종 2년(1261)에 동부학당과 서부학당을 설치하고, 직제로서 別監·敎學·敎導를 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고려사절요≫의 같은 해 기사에서는 “復置東西學堂”072)≪高麗史節要≫권 18, 원종 2년 3월.이란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는 점이다.≪고려사절요≫의 기사에 나타나는「復置」란 말을 음미하면 동·서학당은 이전에 이미 설립되어 있었던 것을 이 때에 와서 다시 설치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고려전기에는 학당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과거를 위한 고등교육이 있었다면 초학자를 위한 초등교육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위 기록에서 동·서학당이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는 원종 2년 3월은 아직도 開京으로 환도하기 이전임을 감안할 때, 이 때 설치된 학당은 江都에서의 일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원종 11년에 개경으로 환도하자 얼마 후 학당도 개경으로 이전되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고려사≫에는 누락되어 있지만,≪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東·西學堂을 설치하고, 判秘書省 金帆과 尙書左丞宣 文烈을 別監으로 삼았다(≪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3년 6월).

 별감은 학당 교육의 최고 책임자로서, 이 때에 임용된 判秘書省 金帆은 동부학당, 尙書左丞宣 文烈은 서부학당의 별감으로 각기 임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학당 교육은 고려의 교육전통으로 정착되게 되었는데 이후 국내 정세의 불안과 外寇의 침입 등으로 학교 교육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학당도 퇴락을 면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공민왕 원년(1352) 2월에 成均館·12徒와 더불어 학당시설의 복구를 촉구하는 왕명을 내리고 또 동 6년에는 “서울과 지방의 학교를 수리하라”073)≪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민왕 6년 정월.는 왕명을 내리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공민왕은 고려 후기에 교육중흥을 주도하였는데 그의 노력으로 학교 교육이 크게 활성화 됨과 아울러 학당 교육도 번창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공양왕 원년(1389)을 전후한 시기에는 동·서학당은 크게 침체되어 교육적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던 것 같다.074)이것은 恭讓王 원년 12월에 大司憲 趙浚 등이 “…近因兵興 學校廢弛 鞠爲茂草…”라 상소하는 데서 알 수 있다(≪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이로서 공양왕 2년에는 학당교육에 대한 일대 개혁이 수반된다. 즉 기존의 동·서학당을 개편하여 개경의 5부의 儒學敎授官을 파견함으로써 5부 학당으로 그 체제가 변모하게 된다. 이것은≪고려사≫선거지의 “서울의 5部와 西北面의 府·州에 儒學敎授官을 파견하였다”075)≪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양왕 2년 2월.란 기사에서 확인된다. 당시 이러한 개혁은 “都城 안에 5부 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鄕校를 설치하여 儒術을 일으켰다”076)≪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는 鄭夢周의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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