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1. 중앙의 교육기관
  • 2) 동·서학당
  • (2) 운영과 성격

(2) 운영과 성격

 동·서학당은 별감을 교육책임자로 하고, 敎學과 敎導라고 일컬어지는 교관이 있어 교육을 운영하였고, 5부 학당으로 개편하고 난 후에는 유학 교수관이 파견되어 교육을 전담하였다. 동·서학당도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學田을 지급받아 운영하였을 것이며,077)≪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민왕 12년 敎書에 “…成均十二徒東西學堂諸州郡鄕校…其土田人口 或被豪强所兼幷者 官爲析辨 以贍學用”이란 기사에서 學田을 지급받았음이 확인된다. 교관에게는 월봉이 지급되었던 것 같다.078)이것은≪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5월 무진조에 당시 吏曹判書 權珍이 學堂의 교관 증원을 요청하면서 “乞依前朝設敎官給月俸之例…”라 한 데서 알 수 있다.

 학당 교육의 성격은 공민왕 원년 4월에 진사 이색이 “지방의 鄕校와 중앙의 學堂에서는 그 재능을 심사하여 12徒에 올리자”07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민왕 원년 4월.고 건의한 내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향교와 동격의 수준이었다. 이후≪고려사≫에는 한결같이 “內而學堂 外而鄕校”라 하여 같이 취급하고 있으며, 이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080)申千湜,<朝鮮前期 學堂의 設立과 運營에 대한 硏究>(≪明知史論≫2, 1989).

 학당의 입학자격도 향교와 동일하였을 것이며, 조선 개국 후 鄭道傳이 찬진한≪朝鮮經國典≫에는 “部學敎授를 두어 童蒙을 가르쳤다”081)鄭道傳,≪朝鮮經國典≫上, 學校.고 하여 그 대상이 어린 아이임을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태종 13년(1413) 6월, 당시 성균관 대사성인 權遇를 비롯한 성균학관들이 교육 개혁안을 건의하고 있는데, 이 건의안의 첫머리에 “옛적에 따르면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모두 부학에 들어갔다”082)≪太宗實錄≫권 27, 태종 13년 6월 정축.고 한 것을 보면 8세 이상이 그 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종 때 설립된 동·서학당은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대사헌 조준이 “여러 차례 전란으로 무성한 풀밭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로써 공양왕 2년에는 정몽주의 건의를 수용하여 기존의 동·서학당을 개편하여 5부 학당의 체제로 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고려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던 시대로서 비록 학당 교육에 대한 개혁이 행해졌으나 학사를 비롯한 교육시설은 갖추지 못하였고, 수업은 단지 사원의 승방을 빌려 행하여졌을 뿐이다.

처음 5部學堂을 설립하였으나 黌舍는 건립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동부학당은 학생들을 順天寺에 모아 수학하였고, 서부학당은 彌勒寺에 모아 수학하였다(≪定宗實錄≫권 5, 정종 2년 8월 계축).

 위 기사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학당 교육에 대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학당 교육은 이후 조선사회로 계승되어 세종 때에 4部學堂의 체제로 정비되면서 조선의 교육전통으로 정착되어 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