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1. 중앙의 교육기관
  • 4) 사학 12도
  • (2) 운영

(2) 운영

 문종 때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사학 교육기관은 이후 12도로 정착되면서 고려 교육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2도 교육의 성과에 대하여 고려말의 이제현은 “위로는 公卿嫡庶로부터 아래로는 州縣擧者에 이르기까지 모두 9齋籍中에 이름을 걸고 성인의 道를 익혔다”134)李齊賢,≪益齋亂藁≫권 9 上.라 평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12도의 교육 운영은 어떠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려사≫선거지 사학조에는 최충이 학교 설립의 기사에서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그의 집과 마을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9재로 나누어 樂聖·大中·誠明·敬業·造道·率性·進德·大和·待聘이라 하였다. 이를 일컬어 侍中崔公徒라 하였으며 양반의 자제들로서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徒中에 속하여 공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9재의 성격이다. 고려 말에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개편되면서 9재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이 성균관의 9재와 최충의 9재의 성격은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12도의 교육이 모두 문헌공도와 같이 9재로 편성되어 운영되었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먼저 최충의 설립한 9재의 이름을 분석해 봄으로써 그 운영상의 특수성을 구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樂聖」은 성인의 道를 즐겨 익힌다는 뜻이니 성인의 도란 갑자기 배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樂」字를 더 붙여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발을 딛고 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9재의 첫머리를 악성이라 하였던 것이다.

 「大中」은≪書經≫周書 洪範편의 “大中의 道”와≪易經≫의 “大中而上下應之”에서 따온 것이다. 성인의 도를 즐기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대중에 표준을 세워야 한다고 해서 악성 성명 다음의 재명으로 하였던 것이다.

 「誠明」은 周子의≪通書≫에 “誠이란 것은 성인의 근본으로, 성인이라는 것은 誠일 뿐이다”라 한 것에서 취한 말이다. 誠이라는 것은 자기의 몸을 성실히 하는 것이며, 明이라는 것은 善을 밝힌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명은 대중의 도를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중 다음에 성명으로 재명을 삼았다.

 「敬業」은 악성·대중·성명에서 닦은 正心·修心을 바탕으로 학문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재명으로 하였다. 이것은≪禮記≫에서 “三年視敬業樂群”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造道」는≪孟子≫의 “深造之以道”에서 나온 말로, 朱子는 이를 주석하여 “造라는 것은 나간다는 것이며 道라는 것은 나아가는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조도는 모든 분야에서 관통되는 학문의 자세이기도 하다.

 「率性」은≪中庸≫에서 “天命을 性이라고 하고 率性을 道라 하며 修道를 敎라 한다”고 한데서 나타나며, 천성을 좇아 느끼는 바를 긍정하여 어긋남이 없게 함을 말한다.≪大學≫에서는 조도를 “明明德”에 근본을 두었고≪중용≫에서는 조도를 학문의 思辨에 두었으므로 조도의 다음에 솔성을 둔 것이다.

 「進德」은≪易經≫에 “君子進德修業”이라고 하였으니, 品德을 쌓아 성인의 도로 진취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솔성 다음에 진덕을 둔 것이다.

 「大和」는≪역경≫의 “各正性命하고 保合大和”에서 유래한 것인데,≪중용≫에서 “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자리잡고 만물이 化育한다”고 한 宋儒의 이상을 반영한 것으로 性의 도에 화합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待聘」은≪孔子家語≫에 “席上之珍以待聘”이라 하였고 聘은 迎師의 禮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는 학문의 완숙 단계를 의미하며 師儒로나 관로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9재 중에서 대빙을 마지막 재명으로 한 것이다.135)이 부분은≪崔冲硏究論叢≫중<九齋衍義>를 참고로 필자가 주석하였다.

 이와 같이 볼 때 9재의 이름은 단순한 학사의 배치가 아니고, 상호 연계성을 갖는 단계식 교육과정의 차례로 보인다. 즉 誠明齋는 초학자로서 학문에 입문하는 자를 위해 개방된 齋舍로 보이고, 마지막 待聘齋는 학문을 수료하는 단계로 보인다. 그렇다면 9재의 교육과장은 악성·대중·성명·경업·조도·솔성·진덕·대화·대빙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교육에 나갔다는 의미가 된다.136)洪良浩,<文獻書院九齋記>(≪崔冲硏究論叢≫, 1984), 386∼9쪽에서는 “文憲 崔先生께서 海州에 살며 생도들에게 학문을 강론할 때 9재를 설치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거처하게 하였으니…학문을 이루는데 있어 순서대로 나아가서 학문을 연마하고 감히 순서를 뛰어넘지 못하게 하였으니 마치 주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법도와 흡사하다”고 하고 있다. 이 견해는 齋名을 교육의 단계적 陞次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尹南漢,<高麗儒學의 發達>(≪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5), 248쪽에서도 “齋名은 유교적 作成의 功과 經書의 要諦를 빌어 진학의 階梯로 삼았던 바”라고 같은 의견을 내고 있다. 그러나 당시 교육상에 비추어 볼 때 과연 학생들이 9재의 순서로 수학하였겠는가 하는 데는 많은 의문이 있다. 이것은 실제로 9재학당에 수학한 자들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명종 때에 監察御使 李勝章은 그의 父業을 잇기 위하여 嶺南에서 文憲公徒 率性齋에 유학하고 무자년(의종 22년, 1168) 봄에 大司成 金敦中의 문하에서 두 번째로 급제하였다137)大司成 金敦中이 國子監試官을 역임한 것은 의종 21년이다. 따라서 위의 무자년은 의종 21년 정해의 誤記인 것이다.(<李勝章墓誌>,≪朝鮮金石總覽≫上, 418쪽).

李奎報는 명종 11년 14세 때에 文憲公徒 誠明齋에 入徒하여 번번이 夏課에서 거듭 壯元하였고…16세에 司馬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東國李相國集 年譜≫).

 위에서 李勝章과 李奎報는 처음부터 솔성재와 성명재에 입학하였다. 만약 9재의 교육이 단계적 승차과정이었다면 이들은 첫 단계인 악성재에 입학하여 그 단계를 밟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빙재까지 승차한 후 과거에 응시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장은 솔성재에 들어가 다음 단계를 거치지 않고 솔성재생으로서 과거에 응시하였고, 이규보도 성명재에 들어가 성명재생으로서 과거에 응시하였다. 만약에 악성재가 9재 교육의 첫 단계였다면 초학 입문자를 교육하는 초등교육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보한집」에 “樂聖齋學堂에 이르러 재생들과 더불어 운을 내어 시를 지었는데 유창하였다”는138)≪補閑集≫권 上 仁宗 21년(1143) 4월에 왕이 承宣 金을 시켜 두 令公으로 하여금 日月寺 樂聖齋學堂에서 강습하게 하고 시를 짓게 한 것에 대한 평가이다. 기사를 보면 악성재생들은 초학 입문자들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악성재가 초학 입문자들의 학사였다고 한다면 왕이 특별히 승선에게 명하여 당대의 문사와 재상들과 함께 이곳에서 강습하고 사회를 열게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9재는 단계적인 수직관계가 아니고 횡적으로 연결되는 동일 교육수준으로 단지 재명만 달리하여 교육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고려사≫최충열전에서 “양반의 자제들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徒中에 속하여 공부하였다”고 한 기록을 보더라도 수학생들의 수준은 초학 입문자가 아니라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학도 최충의 문헌공도와 같이 9재로 나누어 교육하였겠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각 徒의 유생이 일찍이 수업한 스승을 배반하고 다른 徒에 이속한 자는 東堂監試에 赴擧할 수 없도록 하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私學).

 위의 인종 11년(1133) 기사를 볼 때, 12도는 횡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또 이후 12도를 일러 9재 학당이라고 총칭하던 것으로 보아 나머지 사학들도 9재로 나누어 교육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139)金忠烈도 나머지 私學의 경우 科擧라는 큰 목표가 같았으므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高麗儒學史≫, 高麗大出判部, 1984, 98쪽). 이들은 주로 재사에서 수업에 전념하였지만, 여름철에는 더위를 피하여 산사의 승방이나 산속 또는 개울가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140)≪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私學條에서는 “山寺僧房이나 山間川邊에 노닐다가 어른과 아이가 차례를 지어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저녁 때 돌아오는 광경을 보고는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또≪補閑集≫권 中에서는 “12徒의 어른과 아이들은 여름철마다 山林에 모여서 공부하다가 가을이 되면 헤어졌는데 龍興寺·歸法寺 두 절에 많이 왔었다”고 한 것이 그 실례이다. 이를≪고려사≫선거지 사학조에서는「夏課」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고관은 설립자나 그 후예 및 그 徒의 출신자로서 명망이 높은 자가 되었겠지만 敎導를 많이 활용하였다.≪고려사≫선거지 사학조에서도 “徒中에서 급제하여 학문이 우수하고 재능이 많은 데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택하여 敎導로 삼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교도에 의해 교육이 행해졌음은 秦始皇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엄격한 崔元中의 사례가 있다.141)李齊賢,≪櫟翁稗說≫前集 2, “尙書 崔元中은 學士 雍의 아들인데 일찍이 登第하여 9齋의 敎導가 되었다. 매질하는 법이 엄격하여 털끝 만큼도 용서함이 없었다. 생도들은 이를 원망하여 秦始皇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酷刑을 일러 말한 것이다.”

 교육 내용은≪고려사≫선거지 사학조에서도 “그 학문은 9經과 3史였고 혹 先進이 찾아 오면 촛불에 금을 그어 시를 짓게 하였다”고 하여, 그 대강이 알려진다. 즉 9경은≪詩經≫,≪書經≫,≪易經≫,≪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禮記≫,≪周禮≫,≪孝經≫이었을 것이고, 3사는≪史記≫,≪漢書≫,≪後漢書≫였을 것이다. 특히 당시 교육이 과거와 연계되어 있고 또 9재학당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아 과거의 주류를 이루었던 교과를 집중적으로 교육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詩·賦·頌·策의 製述은 필연적으로 수학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2도는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에 폐지될 때까지 맥락을 계승하여 갔다. 강화천도 때에도 고종은 12도에 관심을 가져 시랑 李宗冑로 하여금 왕명으로 9재의 생도를 모아 하과를 행하고 여기서 우수한 자 55인을 선발하였고,142)≪東國輿地勝覽≫권 12, 江華都護府, 樓亭 燕尾亭. 충렬왕 11년(1285)에는 친히 歸山寺에 행차하여 9재 하과를 보고 격려하였다.143)≪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1년. 공민왕도 12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므로 동왕 원년(1352)에는 12도의 교사 중수를 위한 명령을 내렸고, 동왕 12년에는 12도의 교육을 중흥하기 위한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144)≪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이색도 일찍이 韓淸城 등과 함께 9재에 놀러가 安心精舍(安心寺)에서 촛불에 금을 긋고 시를 지으면서 “十二徒稱曰九齋, 國中童冠集山崖, 賦詩刻燭才何疾, 勸學興文意甚住”란 칠언시를 짓기도 하였고,145)李穡,≪牧隱詩藁≫권 24. 또 왕에게 상소하여 12도를 중흥시킬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146)≪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12도의 운영에서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재정에 관한 문제이다. 12도는 그 규모상 막대한 운영기금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단지 학생들의 기부금만으로 운영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것은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구명할 수는 없지만≪고려사≫세가편에 다음과 같은 참고할 만한 기사가 있다.

十二徒에 양곡의 비축이 없으므로 徒官을 여러 道에 보내어 베를 팔아 米를 사들이는 것으로서 規例로 삼으라 하였다. 宰樞는 이 때에 海漕가 통하지 않으므로 그 베를 취하여 尙乘局의 馬栗을 사려 했는데, 徒官 曹漢卿 등이 公牒을 꾸며 사사로이 米를 楊廣道에서 사다가 일이 발각되었다(≪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7년 5월).

 공민왕 7년(1358) 5월의 위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가는 12도에 대한 재정 지원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徒官은 국가의 행정관리인지 아니면 사학 자체내의 실무관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2도의 재정을 담당하던 직분임은 분명한 것 같다. 12도에 대한 재정 지원이 단순히 이 때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전례를 계승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의 공민왕 12년 교서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근년에 干戈로 인하여 교양이 자못 해이해졌다. 지금부터 成均·十二徒·東西學堂과 諸州郡鄕校에 엄하게 가르침을 가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그 둔토전과 인구를 혹 豪强이 겸병한 바 있으면 관에서 이를 분변하여 贍學用으로 한다(≪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위의 기사를 음미할 때, 12도는 성균관·동서학당·향교와 더불어 학전과 노비를 지급받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이것은 이전부터 제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12도도 설립 당시부터 국가에서 國子監과 함께 학전을 지급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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