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1. 중앙의 교육기관
  • 4) 사학 12도
  • (3) 성격

(3) 성격

 대대로 儒宗으로 존경을 받았던 최충이 문종 9년 치사하고 사학을 설립하여 교육에 전념하니, 당시 國子監의 교육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학도들이 운집하여 크게 번창하였다. 이로써 과거에 응시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徒中에 적을 두게 되어, 이후 이들 중에서 과거에 합격하는 자가 많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국자감 교육이 더욱 침체상태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하다.

國子監 학생들이 근래에 와서 대부분 폐업하니 이는 學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학관들은 성실하게 면려를 더 하도록 하여 연말에 성적(善惡)을 평가하여 떠나고 머무름을 정하도록 하라. 또 儒生으로서 국자감에 있은 지 9년이 되고 律生으로서 6년이 되어도 허황되고 우매하여 성취함이 없는 자는 물리쳐 버리도록 하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문종 17년 8월 制).

 이상과 같은 문종 17년의 왕명에서 국자감 교육의 부진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국자감 생도들이 근래에 학업을 대부분 그만두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것은 앞의「설립」항목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현종 이래 정책에서의 교육부재와 당시 사회의 성격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를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바로 사학의 설립이었다. 위 문종 17년의 制書는 바로 최충의 사학을 설립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나타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시 학도들이 국자감을 기피하고, 또 그나마 국자감에서 수학하던 학생들이 국자감을 버리고 사학으로 진출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역으로 사학의 번창을 더욱 촉진시켜, 숙종 초에는 12도의 완성을 보게 된다. 이들 12도는 단순한 사학이 아니라 과거에 직접 연결될 수 있었던 국가적으로 공인된 학제였다. 따라서 국가는 12도 출신에게 예종 이전까지는 바로 최종시험인 禮部試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학전을 지급하여 재정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로 볼 때, 12도의 성격은 국가에서 학력을 인정한 제도권적 사학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사학 12도가 완성을 보게 되는 숙종 때에는 이들이 국자감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체제의 정비와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식자들 사이에는 국자감 무용론이 대두하게 된다.

國學에서 선비를 기르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니 실로 민폐가 됩니다. 또 중국의 제도를 우리 나라에 시행하기는 어려우니 청컨대 이를 혁파하소서(≪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숙종 7년 윤 6월).

 이것은 12도 체제가 정비된 지 얼마되지 않은 숙종 7년(1102)에 당시 재상이었던 邵台輔 등이 올린 글이다. 이들 주장은 단순히 재상 소태보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닐 것이며 당시 조정의 일반적인 사조를 고위관료의 입장에서 대변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종 때에 와서 국자감 중흥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사학 12도의 성격도 변질된다. 예종은 당시 문벌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체 일로에 있었던 국자감의 중흥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147)≪高麗史≫에서는 단순히「學」이라고 하였으나,≪高麗史節要≫에서는 國學이라고 하였다(≪高麗史節要≫권 7).을 세워 賢士를 양성함은 三代 이래로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인데, 有司의 의논이 아직 결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신속히 시행하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예종 2년 制).

 위에서 보는 예종의 교서에서도 국자감 중흥을 위한 의지를 읽을 수 있지만 그는 재위 중에 국학 7재의 실시, 養賢庫의 설치, 국자감 건물의 준공 등 국자감 부흥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수행하였다.148)申千湜,<高麗中期 敎育理念과 國子監運營(1)>(≪高麗敎育制度史硏究≫, 螢雪出版社, 1983).

 사학과 연계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예종 5년(1110)의 판문으로 나타나는 과거제도에 대한 개혁이다. 즉 지금까지 과거에 직접 응시할 수 있었던 12도와 기타 문벌 자제들도 국자감에 예속시켜 3년 동안의 수학을 의무화한 것으로서 사학 12도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사학 12도는 종래 大學的 위치에서 국자감에 예속되는 하위적 위치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후 사학 12도의 교육이 국자감의 예속 아래 놓이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인종 17년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동당감시 이후에 행하는 諸徒儒生의 都會도 국자감에서 관할하여 50일 동안 학습시킨 다음 해산시키고 있다.14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私學 인종 17년 7월 判.

 한편 국자감에서의 교육이 활성화되자 사학 12도의 위상은 크게 변화하여, 본래 수업하던 스승을 떠나 다른 도에 옮겨 공부하는 경향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타개하기 위하여 인종 11년(1133)에는 스승을 배반하고 다른 도에 옮긴 자들이 동당감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150)≪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私學 인종 11년 6월 判.

 사학 12도의 위상에 대하여 주목할만한 자료는 공민왕 원년에 이색이 올린 상소이다.

進士 李穡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지방의 鄕校와 중앙의 學堂에서는 그 재능을 심사하여 12徒에 올려 보내고, 12도에서는 다시 이들을 종합하여 成均館에 올려 보내어, 기한을 정해서 그 덕성과 여기에 대한 등급을 매겨 禮部에 추천하게 하소서. 예부에서는 이들 중 합격한 자에게는 전례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고 합격하지 못한 자에게도 出身의 길을 열어 주도록 하소서. 관직에 있는 자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를 제외하고는 國學生이 아니면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소서’(≪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민왕 원년 4월)

 이 내용은 당시 교육의 위계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사를 준다. 즉 향교와 동서학당생을 12도에 올려 보내고 12도에서는 다시 성균관에 올려 보낸다는 내용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때부터 새로이 시행하자는 것이 아니고, 전례에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거에는 위와 같은 방법대로 행해 왔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위에서 제시한 이색의 상소는 전례를 계승하면서, 예종 5년의 판문인 “國子監에서 3년 동안 공부한 후에 과거에 응시하라”는 원칙이 예외의 규정에 의하여 많이 변질된 데 대하여 이를 바로잡아 성균관의 위상을 정비하려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색의 상소로 미루어 보면 고려 후기에는 12도 교육이 크게 위축되어 갔을 듯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충렬왕 때에는 安珦의 노력으로 학교 교육이 크게 활성화되어 “七官十二徒의 諸生이 경서를 끼고 수업하는 자가 거의 수백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151)≪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충렬왕 30년 5월.고 할 정도로 교육 중흥상을 보이고 있었다.

國學은 유명무실하고 十二徒와 東西學堂은 퇴폐하여도 수리하지 않으니 마땅히 수리하여 생도를 양육하고 一經이라도 능통한 자 있으면 錄名하여 아뢰도록 하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민왕 원년 2월).

 한편 이상에서 보이듯이 공민왕 원년에 반포된 교서를 통해 보면, 공민왕이 즉위할 즈음에는 국자감과 아울러 12도의 교육기능은 거의 마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왕 6년(1357) “中外의 學校를 수리하였다”는 기사가 보이지만, 사학인 12도의 교육시설도 중수를 보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고려사≫선거지에서 공민왕 12년의 교서에서 12도의 명칭이 나온 후, 공양왕 3년 폐지될 때까지 12도에 대한 내용은 거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申千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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