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2. 지방의 교육기관
  • 1) 향교
  • (2) 향교의 설치와 변천

(2) 향교의 설치와 변천

 고려시대의 지방학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태조 13년(931)에 설치한 西京學校가 효시이다. 그러나 서경학교는 고려의 副都인 서경에 설치한 학교 로서 고려의 정치적 변천과정에서 서경의 위치가 변천함에 따라 그 명칭과 규모·성격 등이 몇 차례 바뀌었으며,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향교화하였다.157)宋春永,<高麗時代의 西京學校>(≪大丘史學≫28, 1985), 32쪽. 그러므로 서경학교는 비록 고려시대에 설치한 최초의 지방 관학이지만, 처음 에는 향교와 그 성격이 달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의 향교 설치 의 시기에 관해서는 인종 때로 보려는 견해가 있으나158)고려시대 향교의 설치 시기를 仁宗朝로 보려는 견해는 한국교육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의해 주로 주장되었다.
韓基彦,≪韓國敎育史≫(博英社, 1963).
李萬珪,≪朝鮮敎育史≫(乙酉文化社, 1947).
渡部學,≪朝鮮敎育史≫(東京, 講談社, 1975).
韓東一,≪朝鮮時代 鄕校敎育制度硏究≫(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81).
성종 때로 봄이 옳은 듯싶다.

 지방 교육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성종은 지방의 자제 260명을 뽑아 개경에 불러올려 학업을 닦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효과가 미진하자 성종 5년 7월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207명의 학생을 그들의 향읍으로 귀향하도록 허락하였으며 1년 뒤인 성종 6년 8월에는 귀향생을 지도하기 위하여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각 1인씩 파견하였다. 이같은 조처는 성종 2년에 지방관제가 정비됨과 아울러 나말려초기의 향호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던 지방학교인 학원이 중앙의 지배와 통제하에 들어가 재정비되어 향교로 개편되었음을 의미하며,159)宋春永,<高麗時代 鄕校의 變遷史的 考察>(≪歷史敎育≫41, 1987), 49∼50쪽. 전국의 주요 거점인 12목에는 향교가 발족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성종 6년에 경학박사 등이 교육하는 중앙 통제하의 학교가 있었다는 것은 성종 8년 4월의 교서를 통해 알 수 있다.160)≪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8년 4월 敎. 그 내용은 학교를 확장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과거를 통하여 俊士를 뽑으며, 박식한 儒士를 얻어 왕의 정치를 돕고자 한다고 밝히고, 교육에 성과를 거둔 羅州牧의 경학박사 全輔仁을 포상하라161)全輔仁에 대한 포상은≪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8년 4월 敎 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수령이나 학관의 지방 교육에 대한 책임을 물어 포폄하도록 하였다.162)≪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8년 4월 敎. 그리고 성종 11년(991) 정월에 “서울에는 庠序를 열어 儒術을 높이고, 외방에는 학교를 설치하여 생도를 권과하라”163)≪高麗史節要≫권 2, 성종 11년 정월 敎.고 하였다. 이러한 교서의 내용을 보아서도 지방에 학교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향교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지만 이들 지방학교는 향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종·문종 때에 이르면 지방 행정제도가 확립되고 향리에 대한 통제를 제도적으로 강화함으로써164)현종 9년(1018)에는 州縣의 대소를 J의 과다에 두고, 그에 따라 향리의 숫자 를 정하였으며(≪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그 해에 향리의 公服도 규정하여(≪高麗史≫권 72, 志 26, 輿服, 冠服 長吏公服) 향리를 통제하 였다. 문종 5년(1051) 10월 判文에서는 향리의 승진 규정을 9단계로 나누었음을 볼 수 있는데(≪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이같은 조처로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가 큰 읍을 중심으로 침투되어 갔다. 이처럼 성종 6년의 향교 발족은 지방 행정뿐만 아니라 지방 교육도 중앙의 지배하에 들어가 국가의 통제를 받으면서 점차 정비 보급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현종 9년(1018)에는 4都護府·8牧·56郡·28鎭·20縣이 설치되었던 전국의 주요 지역에는 상당수의 學官이 파견되었으며 문종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학관의 파견이 확대되어 갔다.165)≪高廳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條에 보면 南京·大都護府·諸牧·大都督 府에 文師(9품)를 각 1인씩 두었고, 防禦鎭 및 州郡에는 文學 각 1인을 둔 것을 보면 전국의 주군현에 상당수의 학관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종 이후 지방 관학인 향교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감에 따라 지방의 학생들에게는 교육 받을 기회를 많이 제공해 주었고 이로 인하여 鄕 貢의 숫적 증가와 이에 따른 향공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이같은 향공의 숫적 증가에 따른 질적 저하를 막고 지방세력 의 중앙 진출을 조금이나마 막아보고자 界首官試의 엄정한 관리를 통하여166)≪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현종 15년 12월 判. 향공의 질적 향상을 꾀하려 하였다.

 고려의 향교는 예종과 인종 때에 이르러 그 확립기를 맞는다. 예종은 학 문을 좋아하는 왕으로서 국학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령으로서 문 과 출신자는 학사 사무를 겸하도록 하였다.167)≪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예종 즉위년 判. 곧「修明學校」가 守令事目의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지방 교육이 수령의 치하에 들어가 행정적 지배를 받 게 되었다.

 인종은 학문을 좋아했던 왕이었다. 재위 24년간에 李資謙의 난과 妙淸의 난을 겪으면서도 학제와 과거제를 재정비하여 문풍을 크게 진작시킴으로써 고려 교육사에서 분수령을 이루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을 치루고 난 후 동왕 5년(1131) 3월 서경에 행차하여「維新敎書」를 반포하였다. 그 속에서 지방관학을 진작시키고자 “諸州에 學校를 세워 敎道를 넓히라”고 하였다.168)≪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인종 5년 3월 詔. 이처럼 지방 교육을 강조한 것은 이자겸의 난을 겪고난 뒤 정치적 면목을 일신하여 민심의 안정과 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그 동안 침체하였던 향교 교육을 강화하고자 취해진 조치라 생각된다.

 그런데 인종 5년 3월에 반포한 지방 교육에 관한 조서를 근거로 향교의 설치 시기를 인종 5년으로 보고, 그 명칭은 鄕學이었다는 설명이 오늘날까 지 정설화되다시피 되었다. 이같은 견해는 인종 5년 3월에 반포한 교서 외에 金守雌가 쓴<幸學記>라던가,169)≪東文選≫권 64, 記, 金守雌幸學記. 인종 20년의 판문170)≪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인종 20년 2월 判. 중에 향교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의 지방 관학의 보급 상황을 감안하면 향교의 설치 시기를 인종 초로 보려는 견해는 옳지 못한 것 같다. 따라서 인종 5년 3월의 “諸州立學 以廣敎道”란 주현에 향교를 세우고 가르치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다. 곧 지방 교육을 진흥시키고자 향교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는 향교를 널리 설치하고, 이미 향교가 설치된 지역이라도 그 시설이 미비된 지역의 향교는 시설을 정비하여 널리 교육의 장으로 넓히라고 지시한 것으로, 향교의 발전적 측면에서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171)宋春永, 앞의 글(1987), 57쪽. 이렇게 보면 인종 때에는 여러 주군현에 상당수의 향교가 설치되거나 재정비되어 전국 규모로 발전하였으며, 그 교육 수준 또한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인종 20년 이전에 晋州·富平·江華 등지에 향교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고,172)朴贊洙,<高麗時代의 鄕校>(≪韓國史硏究≫42, 1983), 45쪽. 김수자의<행학기>에 “글 읽는 소리가 중앙에서 멀리 외방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옛날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한 것이라던가,≪高麗圖經≫儒學條에 “經館書社가 늘어섰고 백성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스승을 따라 경전을 수업하였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향교의 명칭 또한 향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향교로 봄이 옳은 듯하다. 향교라는 명칭은 김수자가 쓴<행학기>에 처음으로 보이지만, 그것 은 성종 이후 지방 관학이 보급 정비되어 가면서 사용된 지방 관학의 공통 된 명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의 주·부·군·현에 설치된 학교는 州 學·府學·郡學·縣學 등으로 불렸겠지만 이들 전체를 부르는 명칭은 향읍 의 학교라는 향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향교라는 명칭은 고려 후기에 오면 서 그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173)李成茂,<朝鮮初期의 鄕校>(≪漢坡李相玉回甲紀念論文集≫, 敎文社, 1970), 237 쪽에 보면 고려의 향교가 대체적으로 고려 후기 때 세워지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보아서도 고려의 지방 관학기 구의 명칭은 향교로 봄이 옳은 듯하다.

 인종 때에 향교가 전국적으로 설치·발전되었지만, 무신정권 이후 약 1세 기간에는 문무가 교체되고, 몽고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되어 민생이 도탄 에 빠짐에 따라 중앙과 지방의 교육이 부진하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무신 집권기에는 교육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고종 7년(1220)에 李世華가 白翎鎭將으로 가서 그 곳에 향교를 설치하고 학업에 힘쓰도록 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많이 나오니 고을 사람들이 경모하였다.174)李奎報,≪東國理想國集≫後集 권 12, 墓誌 李世華墓誌.
≪東文選≫권 123, 墓誌.
그리고 李奎報가 猾島로 귀양가던 도중에 保安縣에 이르렀을 때 이곳의 교 생들이 술을 가져와 위로하니 답례로써 시를 지어주었다175)李奎報,≪東國李相國集≫全集 권 17, 古律詩 十二月移寓保安縣.는 것을 보면 무신정권기에도 향교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교육과 과거는 무신집권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文翰官을 확보하여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176)李成茂,<武臣執權下의 文人知識層의 動向>(≪嶺南大 三十周年紀念國際學術會議論文≫, 1977), 275쪽.
許興植,≪高麗科擧制度史硏究≫(一潮閣, 1981), 34쪽.

 庚癸의 난 이후 쇠퇴하였던 지방 관학은 개경 환도 후인 몽고 간섭의 초 기까지에도 교육적 기능을 다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충렬왕 때에 비록 유 학교육을 부흥시키려는 興學策을 폈으나 그것은 국학을 부흥시키려는 데 중 점을 두었을 뿐, 지방 관학의 부흥을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무신정권 이후 내우외환으로 교육이 부진하였던 실상은 수십년 동안을 유사들은 전쟁 에 동원되었고, 독서자는 열 중 하나 둘도 안되며, 老儒는 죽어 六籍(六經)이겨우 전할 정도였다.177)李齊賢,≪櫟翁稗說≫前集 2.

 그러나 충선왕과 충숙왕 때의 적극적인 흥학책으로 향교 교육은 점차 회 복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은 즉위년에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려고 사 정쇄신을 위한 7개조의 교서를 내려 인재를 등용하는데 世家의 자제에 한하지 말고 茂才碩德하고 孝廉方正한 유사가 있으면 그 고을수령이 천거하도록 하였다. 또 藝文館으로 하여금 군현에 茂才者가 있으면 직첩을 주어 訓導에 임하도록 하여17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薦擧 충선왕 즉위년 11월. 지방 관학의 교수관 확보를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충숙왕은 학교는 풍속을 교화하는 근원이므로 교육을 엄히 하여 인재를 뽑아 쓰도록 하였으며,17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충숙왕 12년 敎. 化民成俗은 반드시 학교로 말미암는다고 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유능한 유사를 관할 고을수령이 천거하여 쓰도록 하였다.180)≪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薦擧 충숙왕 12년 10월 敎. 이같은 조치는 지방 교육을 진작시키는 활력소가 되었을 것이다. 충선왕 5년(1313)부터 충목왕 2년(1346)까지 33년간에 9개의 향교가 중수되거나 새로 설치되었다는 것은181)朴贊洙, 앞의 글, 55∼56쪽. 고려 후기의 향교 교육이 회복되어 간 것을 말하여 준 다. 그렇다고 충선왕 이후의 향교 교육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병화로 향교가 소실되어 옛터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182)≪江陵鄕校誌≫, 花浮山鄕校律詩序. 廟學이 퇴폐되고 교생은 학업을 게을리할 뿐만 아니라 그 수도 몇 명 되지 않았다는183)安軸,≪謹齋集≫권 1, 記, 襄陽新學記.
李穀,≪稼亭集≫권 2, 記, 金海府鄕校水軒記.
것은 중앙정부의 노력에 비하여 지방 관학의 성과는 생각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 같다.

 고려 후기의 향교 교육은 공민왕 이후에야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 민왕은 유능한 인재를 골라 쓰고자 山林鄕曲에 經明行修하고 茂才高節한 유사가 있으면 천거하여 탁용하도록 하였으며,184)≪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薦擧 공민왕 원년 2월 敎. 학교는 風化의 근원이니 퇴폐한 학사를 수리하여 생도를 기르도록 하고 경학에 능통한 자를 보고하도록 하였다.185)≪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민왕 원년 2월 敎. 李穡은 향교와 학당에서 생도들의 재능을 심사하여 유능한 자는 12徒에 올리고, 12도에서도 다시 심사하여 成均館에 올려 일정한 과정을 수학한 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186)≪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공민왕 12년 5월 敎. 이같은 조처는 학교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공민왕은 개경과 지방의 학사를 수리하도록 하였고,187)≪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공민왕 6년 정월. 동왕 12년(1363) 5월에는 “근년에 전쟁으로 교육이 퇴폐하니 성균관·12도·동서학당 및 제군현의 향교는 교육을 엄히 하고, 土田·人口(노비)를 豪强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겸병한 것은 관에서 분별하여 學糧에 충당하도록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188)≪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공민왕 12년 5월 敎. 공민왕은 과거제도에 있어서도 원의 鄕試·會試·殿試를 처음으로 채택하여 규정으로 삼도록 하였다.189)≪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공민왕 18년. 또 공민왕 23년 3월에는 각 도의 향시 유생으로서 다른 도의 시험에 응시하는 자가 있으면 회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190)≪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料目 1, 공민왕 23년 3월 敎. 이것은 예비고시를 교육과정의 승급시험 으로 정비함으로써 지방 교육의 정상화를 가져와191)許興植, 앞의 책, 47쪽. 향교의 부흥에 하나의 활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창왕은 州縣學에서 貢士가 정해진 수에 차지 않으면 수령에게 그 책임을 물어 죄를 다스리도록 하교함으로써19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料目 1, 신창 敎. 수령의 지방 교육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공양왕 원년(1389) 12월에 대사헌 趙浚 등은 지방 교육을 진작시키고자 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병화로 퇴폐한 학교를 부흥시키 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곧 중앙에서 각도에 교수관을 1인씩 파견하여 군현 을 돌면서 교육을 엄히 하도록 하고, 지방에 한가로이 살면서 유학을 학업 하는 유사들을 뽑아서 그 지역의 교도로 삼아 교육에 힘쓰도록 하고, 인재 를 많이 양성한 교도관은 차례를 뛰어넘어 관직을 높여 주도록 할 것을 상 주하였다.193)≪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被 공민왕 원년 12월. 이같은 상소에 따라 공양왕 2년에는 개경의 5부와 서북면의 주·부에 유학교수관을 설치하였고,194)≪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양왕 2년 2월. 그 이듬해에는 각도의 목·부에도 교 수관을 설치하였다.195)≪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정월조에 “置各道牧府儒學敎授官”이라 하였고,≪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공양왕 3년조에 “置各道牧府儒學敎授官 四年罷 尋復之”라 한 것을 보면 공양왕 4년에 일시 폐지되었다가 곧 설치하였던 것 같다.≪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4년 6월조에 “復置諸道州郡儒學敎授官”이라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으며, 공양왕 4년 6월에는 유학 교수관의 설치가 더욱 확대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개경에는 5부 학당을, 외방에는 향교를 설치 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다.196)≪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이러한 조치로 여말에는 儒風이 크게 진작되었 고 향교 교육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려 말의 지방 교육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주도한 사람들은 신진사대부 들이었다. 이들은 주자학을 새로운 정치적·사상적 이념으로 수용하고 연구 하였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유학의 학풍은 唐宋絶句를 중심 으로 한 詞章 중심에서 修己治人을 위한 경학풍으로 바뀌어 갔다.197)許興植, 앞의 책, 97쪽. 이에 따라 유학교육에서는 유교의 경전인 4서 5경이 교육과정으로 정착되었고 과 거에 있어서도 예부시의 출제 과목으로 중요시되었다.198)宋春永,<高麗時代의 鄕校敎育政策>(≪歷史敎育論集≫11, 1987), 95∼96쪽.

 여말의 향교 교육을 부흥시키려는 신진사대부들의 흥학책은 교육을 통한 주자학의 보급과 확대였다. 그 후 조선을 개국하는데 앞장선 신진사대부들 에 의해 여말의 향교 교육은 조선시대의 향교로 정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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