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2. 지방의 교육기관
  • 1) 향교
  • (3) 향교의 운영실태

가. 시설과 재원

 향교의 기능은 先聖先賢을 봉사하는 기능과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는 교학 적 기능이었다. 이같은 기능을 담당하여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현을 봉사하 는 祠宇, 교육하는 장소로 명륜당, 재생이 기거하는 동·서재 등의 기본시설 과 기타 부속건물이 있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향교는 조선시대과 는 달리 이러한 기본시설이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廟·學이 같은 건 물 안에 있었던 듯하다. 李穀이 지은 다음의 기문을 보면 이러한 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본국 향교의 제도는 문묘와 학당이 같은 건물 안에 있어서 외람되다. 더구나 童子들이 들어와 大成殿 뜰에 모여서 떠들썩하니 외람됨이 더욱 심하다(李穀,≪稼亭集≫권 5, 記, 寧海府新作小學記).

 이와 같이 사우와 학당을 분리시켜 설치하지 않고 廊廡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199)朴贊洙, 앞의 글, 60∼62쪽.
朴龍雲, 앞의 책, 381쪽.
그러나<寧海府新作小學記>에는 대성전을 따로 설치하여 공자상을 모시고 左右廡를 지어 강학소로 삼았다는 것이라던가,<堤州鄕校記>에도 대성전과 학당이 따로 설치되었고 東西廡에서 강학하였다는200)權近,≪陽村集≫권 12, 記, 堤州鄕校記. 것 등을 보면 고려시대도 초기와는 달리 후기로 내려오면 문묘와 학당이 분리되었으며, 강학은 동서무에서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변화는 봉사적 기능의 중요성이 점차 고조되어 갔음을 의미하며,201)宋春永, 앞의 글(197b), 77쪽. 조선시대 향교로의 정형화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문묘에는 옛 성현의 圖像을 봉안하였다. 성종 2년(983) 5월에 박사 任老成이 송으로부터 오면서 文宣王廟圖 등과<72현찬기>를 가져왔으며, 선종 8년(1091) 9월에는 송의 국자감 예에 따라 72현의 도상을 국학의 벽상에 걸었다.202)≪高麗史≫권 62, 志 16, 禮 4, 文宣王廟 선종 8년 9월 경술. 이것은 고려 문묘제의 발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현의 도상은 국학에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서경이나 주현의 문묘에도 봉향하였던 것 같다. 충숙왕 12년(1325)에 평양부의 사우에 성현을 봉향하였으며203)≪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2년 10월 을미. 다른 주현의 문묘에서도 釋奠儀를 올린 것은204)≪高麗史≫권 63, 志 17, 禮 5, 諸州縣文宣王廟.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 성현의 상을 향교에 설치한 시기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서경을 제외한 다른 주현의 향교는 界首官鄕校에 먼저 설치되고 인종 때는 상당수의 향교에까지 확대되어 간 것으로 보이며,205)宋春永, 앞의 글(1987b), 76쪽. 그 시기는 선종 8년 국자감의 문묘제가 발족된 이후로 보인다.

 성현의 상은 묘·학이 한 건물 안에 있었던 고려 전기에는 도상을 봉안하 였으나, 묘·학이 분리된 고려 후기에는 塑像이나 위패를 만들어 봉안하였 던 것 같다. 충숙왕 7년에 왕이 은병 30개를, 宰樞는 재물을 내어 문선왕의 소상을 만들었으며,206)≪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7년 9월 무인. 그리고≪신증동국여지승람≫성주군 향교조에 소상은 개경의 대성전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 하였고, 성주향교의 문묘조에는 5聖 10哲은 옛날에는 소상을 썼으나 목사 康仲珍이 신주의 위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207)≪新增東國輿地勝覽≫권 48, 星州郡, 鄕校. 영해부 향교의 대성전에도 공자의 소상을 봉안하였으떠208)李穀,≪稼亭集≫권 12, 記, 寧海府新作小學記.<제주향교기>에도 향교에 先聖之神을 봉안하였다209)權近,≪陽村集≫권 12, 記, 堤州鄕校記.는 것 등을 보면 소상과 위패가 병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佔畢齋集≫의<謁夫子廟賦)에 “景泰 5년(조선 단종 2;1454) 金叔滋가 성주 교수로 가서 학생들을 거느리고 문묘에 입례하였는데, 大聖 이하 4성 10철이 모두 소상으로 오래되었다”고 하였다.210)金宗直,≪佔畢齋集≫文集 권 1, 謁夫子廟賦·年譜.≪신증동국여지승람≫개성부 향교조에는 “大成殿에는 5성 10철의 소상을, 동서무에는 70현의 위판을 봉향하였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보면 문선왕과 4성 10철은 소상을, 그 제자인 70현은 위패로 봉안하였던 것 같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고려의 향교는 조선시대의 향교와는 그 구조에 다른 점이 많았던 것 같으며, 이러한 변화는 여말 선초의 과도기에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된다.

 향교의 경비를 충당하려는 재정책은 學寶를 설치하거나 公廨田이나 鄕校田 같은 토지를 지급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태조가 서경학교를 설치한 후 흥학의 소식을 듣고 곡식 100석을 내려 그 이식으로 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으며211)≪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태조 13년. 성종 11년(992)에는 학사를 널리 짓고 田庄을 지급하여 學粮에 충당하도록 하였고212)≪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11년 12월 敎. 명종 8년(1178) 4월에는 서경학교인 諸學院에 공해전 15결, 서적위전 50결, 문선왕 油香田 15결 등을 지급하여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고,21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公廨田 명종 8년 4월. 우왕 14년에도 향교전을 지급한 사례를21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신우 14년 7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무신집권 후 오랫동안의 병화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으로 전제가 문란해져 공해전이나 학전의 관리가 어려웠고, 소속이 불명확한 토지(공해전·향교전)는 호강들에게 강점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공민왕 12년(1365) 5월에는 퇴폐한 교육을 엄히 하도록 하면서 호강에게 강점당한 토전이나 인구(노비)를 관에서 분별하여 장학에 충당하도록 하였다.215)≪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민왕 12년 5월 敎.

 향교 교육을 위한 재정이 부족하였을 때에는 국가적 지원책 외에도 수령 이 사사로이 마련해 주는 약간의 재원으로 이식을 받아 경비에 충당하기도 하였으나216)權近,≪陽村集≫권 12, 記, 延安府鄕校記. 그것은 열악한 것이었다. 이처럼 향교의 재정부족은 유능한 교 수관 확보의 어려움과 함께 향교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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