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2. 지방의 교육기관
  • 2) 서경학교
  • (1) 설치 배경

(1) 설치 배경

 고려시대의 지방에 설치한 최초의 관학교육기관은 태조 왕건이 세운 西京學校였다. 태조가 서경에 학교를 설치한 이유는 기록이 없어서 잘 알 수 없지마는 서경의 경략과정에서 이루어진 崇儒興學策과 관련이 있으며, 그 연 원은 통일신라기의 지방학교인 學院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서경은 일찍부터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요충지였으며, 241년간이나 고구려의 도읍지로서 정치·문화·역사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서북변경에 놓여져 있어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기가 어려웠 다. 특히 나말의 중앙집권체제가 이완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에는 서경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여 蕃人의 침노가 심하여 그 해가 적지 않았다.243)宋春永,<高麗時代의 西京學校>(≪大丘史學≫28, 1985), 7쪽.

 태조는 이러한 서경을 국방상 咽喉之地로 삼고,244)≪高麗史節要≫권 2, 성종 9년 9월. 왕권의 유지세력을 부식시켜 창업의 안정과 化民成俗을 도모하고자 하였다.245)宋春永, 앞의 글(1985), 11쪽. 그는 창업 초부터 서경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새로운 관부와 관원을 설치하고,246)태조 5년에 설치한 서경의 官府員吏는 廊官·衙官·兵部令·納貨府·珍閣省·內泉府令 등 6개의 관서에 45인을 두었다. 그 후 동왕 6년에는 內泉府를 珍閣省에 병합하고, 9년에는 國泉府令 具壇 1인, 卿 2인, 大舍 2인, 史 4인, 동 17년에는 官宅司를 증치하고 卿 2인, 大舍 2인, 史 2인, 都航司 卿 1인, 大舍 1인, 史 1인, 大馭府 卿 1인, 大舍 1인, 史 1인을 두어 태조 5년에 설치된 관부원리에 비하여 4개 관서와 그에 소속된 원리는 21인이 더 증치되었다(≪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西京留守官 其屬官沿革). 重臣과 양가 자제들을 옮겨 살게하면서247)태조 원년 9월에는 평양을 大都護府로 삼아 堂弟인 王式廉과 廣評侍郎 列評을 보내고 參佐 4, 5인을 두었으며 黃·鳳·海·白·鹽州 등 諸州의 戶民을 분송하여 살게 하였고, 태조 5년 11월에는 大丞 質榮·行波 등의 부형자제와 諸郡縣의 양가 자제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9월·태조 5년 11월). 북변을 자주 순행하였다.

 태조는 서경을 경략하면서 이곳의 사람들을 유교적 정신으로 교화시키고 자 적극적인 숭유흥학책을 폈다. 태조가 흥학책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한 사람들은 나말의 6두품 출신인 崔彦撝·崔凝·崔知夢·朴光胤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태조 밑에서 요직을 맡아 보필하면서 그의 유교적 정치이념과 교육정책의 실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경학교의 설치는 이러한 태조의 서경 경략과정에서 실시한 숭유흥학책의 하나로 보여진다.

 태조가 평양을 서경이라 일컬은 것은 태조의 서경 경략에 일대 정책전환 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248)河炫綱,≪高麗地方制度의 硏究≫(韓國硏究院, 1977), 146쪽. 태조 5년(923) 11월에는 大丞 質榮과 行波 등의 부형자제, 여러 군현의 양가 자제를 옮겨서 서경을 충실히 하고, 새로이 관부와 관원을 두고 在城을 쌓아 친히 牙善城의 백성이 살 곳을 정하였다.249)≪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5년 11월 신사.

 이처럼 중신과 양가의 자제를 사민하고, 새로이 관부와 관원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서경 행정기구의 일대 전환으로 이것은 서경 경영의 목적이 군사적인 면에서 정치상의 목적으로 바뀌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태조 5년에 6개의 관부에 45인의 員吏를 두었는데250)태조 5년에 설치한 서경의 관부는 廊官·衙官·兵部 納貨府·珍閣省·內泉府 등 6개 관서였다(≪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西京留守官 其屬官沿革). 이것은 태조 원년에 설치한 대도호부와 거기에 두었던 인원이 바탕이 되었으며, 후일 分司制度의 틀이 되었다.

 태조 5년에 설치된 서경의 행정기구는 그 후 세 차례의 개혁을 거쳐251)태조 6년에 珍閣省을 內泉府에 병합하였고 동왕 9년에는 內泉府令를 증치하 고 9인의 員吏를 두었으며, 동왕 17년에는 官宅司(6인), 都航司(3인), 大馭府(3인)를 증치하여 태조 5년에 설치된 관부와 관리에 비하여 4개의 관서와 21인의 員吏가 증치되었다. 성종 14년(995)까지 계속되었다. 태조 왕건은 동왕 5년 이후에도 8회나 서경에 행차하였으며252)태조 원년부터 26년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태조가 서경에 행차한 것을≪高麗史≫太祖世家에서 살펴보면 8년 3월, 9년 10월 계미, 12년 4월 을사, 13년 5월 임진, 13년 12월(서경학교설치), 14년 11월 신해, 17년 정월 갑진, 18년 9월 갑오 등 8회나 된다. 그 중에서도 동왕 13년(930)에는 두 차례나 행차하였다. 서경학교의 설치는 태조 13년 12월의 제2차 행차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태조는 서경을 도읍지로까지 생각하기도 하였으며,253)≪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5년 5월 갑신. 訓要 10條의 제5조 에서도 “西京은 水德이 순조로워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니 춘하추동 네 계절의 仲月(2·5·8·11월)에는 순수하여 백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안녕을 도모하도록 하라”254)≪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고 한 것을 보면 圖讖說을 바탕으로 서경을 도읍지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민심의 안정과 복리를 얻고자 하는 임시적인 방편으로 받아들인 것이지 국리민복의 근본으로 삼으려 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崔凝이 태조에게 불교와 음양설에 현혹되지 말 것을 간하자, 태조는 “다만 佛神의 음조와 산수의 영응을 생각함은 혹시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하기 때문으로 … 난이 평정되고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바로 풍속을 고쳐 교화함이 가할 것이다”라고255)崔滋,≪補閑集≫권 上. 하였다. 이것에서 불교나 도참설을 취한 목적이 민심의 안정과 국리민복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받아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가 서경을 중시한 이유를 도참설에서 찾아보려는 견해가 있으나,256)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乙酉文化社, 1948;亞細亞文化社, 1980), 7쪽. 정치적 목적과 민심의 안정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도참설을 이용하였다는 주장이257)河炫綱, 앞의 책, 151∼153쪽. 주목을 끈다. 창업 초기에 안으로는 호족연합적 상태 하에서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밖으로는 신라와 후백제가 병립하여 있었으며, 북으로는 야인의 침노가 심하였던 당시에 태조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 북방민족 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토착적 세력이 부식하지 못했던 황폐한 서경을 착목 의 대상으로 삼아258)河炫綱, 위의 책, 47∼48쪽. 서경을 경영함으로써,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이루게 해서 호족세력을 견제하며 북방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태조 왕건은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고자 서경 출신이 아닌 중신과259)태조 원년에 서경으로 보낸 王式廉은 왕의 堂弟이고 列評은 廣評侍郎이며, 태 조 5년에 서경에 보낸 大丞 行波는 태조가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자신의 두 딸(大西院夫人과 小西院夫人)을 왕건에게 바쳐 하룻밤을 모시도록 하였다. 이 같은 사실로 보아 行波가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없으며, 이후 그는 서경으로 옮겼다. 이런 점으로 보아 태조가 서경에 부식시킨 세력 은 왕권을 떠받쳐 줄 非西京 출신이었던 것 같다(≪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명문 양가의 자제를 옮겨 살게 하고, 새로운 관부와 관원을 설치하였으며, 서경인을 유교정신으로 교화시켜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고자 하였을 것이다. 서경학교의 설치는 이러한 태조의 서경 경략과정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된다.260)宋春永, 앞의 글(198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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