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2. 지방의 교육기관
  • 2) 서경학교
  • (2) 서경학교의 설치

(2) 서경학교의 설치

 태조 왕건은 3경의 하나인 서경을 적극적으로 경영하면서 이곳에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재통일하기 6년 전의 일로서 서경학교의 설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태조 13년 12월 서경에 행차하여 학교를 창설하였다. 이에 앞서 서경에는 학교가 없었는데 수재인 廷鶚을 서학박사로 삼아 머물도록 하였다. 정악은 學院을 따로 창설하고 6部의 생도를 모아 가르쳤다. 후에 태조는 興學의 소식을 듣고 비단〔綵帛〕을 하사하여 이를 권장하고 醫·卜 2業을 겸해 두었다. 또 곡식 100석을 내려 학보로 하였다. 寶는 방언으로 전곡을 시납하여 그 이식을 받아 오래도록 교육 경비로 쓰게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 태조 13년 12월).

 위의 내용에서 보면 몇 가지 의문점을 느끼게 된다. 첫째, 학교와 학원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둘째, 6부의 생도란 무엇인가. 셋째, 수재 란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첫째에 대한 견해로는 학원을 학교의 상위기구로 보고 정악을 학교에 소속된 교관으로 보려는 견해와,261)韓基彦, 앞의 책, 54∼55쪽. 서경학교는 학원보다 상위의 학교로서 서경의 교육을 통제 관리하는 기구로 보려는 견해,262)朴天植,<高麗前期의 國子監沿革考>(≪全北史學≫6, 1982), 72쪽. 서경학교를 먼저 세운 후 학원을 따로 두었다고 보는 견해,263)李丙燾,≪韓國史-中世篇-≫(乙酉文化社, 1962), 135쪽.
金庠基,≪高麗時代史≫(서울大出版部, 1984), 243∼244쪽.
학원이 설립되었다가 차차 기초가 잡히면서 서경학교는 서학박사제와 학원을 설치한 것이라는 학원 발전설과 서경학교를 이원적 구성으로 보려는 견해264)朴性鳳,<國子監과 禮學>(≪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1), 225쪽.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학교와 학원 설치기사를 태조의 서경행차 때의 기록으로 보고, 학교를 주제로 보아 학원은 학교를 보완 설명하는 자료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와,265)申千湜,≪高麗敎育制度史硏究≫(螢雪出版社, 1983), 16쪽. 서경학교는 국자감의 모방으로 보려는 견해,266)閔丙河,<高麗時代의 敎育制度>(≪歷史敎育≫2, 1957), 44∼45쪽. 서경학교는 중앙의 유학대학제도를 모방하여 설치한 分司의 형태로 보려는 견해267)辛虎雄,<高麗前期의 敎育政策과 官學>(≪關東史學≫1, 1982), 81쪽.가 있다.

 그러나 태조가 창업한 지 13년밖에 되지 않아 중앙의 관제가 신라와 태봉 의 제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비록 창업 초부터 서경을 경략하였다 하더라도 아직 교육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하였던 당시에 서경 한 곳에 명칭과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교육기구를 동시에 설치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서경학교란 구체적인 어떤 고유한 학교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서경에 설치한 학교」라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명칭으로 보이며「서경에 설치한 학교」란 곧 학원이라 생각된다.268)宋春永, 앞의 글(1985), 15쪽. 이와 같은 사실은 태조 13년 이후의≪고려사≫의 기록에서 서경학교라는 명칭을 찾아볼 수 없으나 학원이라는 명칭은 자주 산견되는 점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269)學院이라는 명칭은≪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條에, 諸學院이라는 명칭은≪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西京留守官條와≪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서경학교인 학원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 것 같다. 신라 말의 청주지방에서는 학원이라는 교육기구가 호족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창업 초에 서경에 설치한 학원이란 신라 말의 지방 교육기구였던 학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270)宋春永, 앞의 글(1985), 15∼16쪽.

 다음은 6부의 생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6부의 생도에 대한 견해로는 6부가 서경 관내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271)河炫綱, 앞의 책, 24쪽.
辛虎雄, 앞의 글, 80∼81쪽.
서경의 행정구획인 部坊里制로 보려는 견해,272)金庠基, 앞의 책, 243∼244쪽. 尙書 6部(吏·戶·禮·兵·刑·工部)로 보려는 견해273)李萬珪, 앞의 책, 198쪽.
韓基彦, 앞의 책, 54∼55쪽.
小田省吾,<朝鮮敎育制度史>(≪朝鮮史講座-分類史-≫, 朝鮮史學會), 136쪽.
등이 있다. 그러나 개경의 행정구획을 5부방리제로 하였던274)≪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2년 정월. 창업 초에 서경의 행정구획을 6부방리제로 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태조 17년 이전에 설치된 서경의 9개 관서 중 상서 6부와 같은 직능을 가진 관서는 兵部令뿐이며275)註 95) 참조. 개경에도 상서 6부에 입사할 생도를 모아 가르친 사실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상서 6부로 보려는 견해는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평양에는 고구려계의 잔여 귀족이나 양가 의 후예들이 전시대적 행정구획인 5부(동·서·남·북·중)지역이나 그 변읍 에 다수의 대소 집단세력이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에 태조는 개국 초부터 관부와 관원을 설치하고 명문 양가의 자제와 여러 주현의 양인을 사민시켜 평양을 충실히 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의 도성 안과 도성 밖의 近畿지역에는 고구려계의 세력과 사민집단세력, 서경의 관원들이 지배귀족을 중심으로 여러 부를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6부란 도성 안의 5부와 도성 밖에 살고 있던 이들 집단인 諸部를 가리키던 명칭이 아닌가 생각된다.276)宋春永, 앞의 글(1985), 17쪽.

 끝으로 秀才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수재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사람을 칭하는 명칭으로 보려는 견해277)韓基彦, 앞의 책, 54∼55쪽.
小田省吾, 앞의 글, 135∼137쪽.
와 성명 앞에 관직이나 관계를 썼던 일반 예로 보는 견해,278)朴天植, 앞의 글, 72쪽. 수·당에서 과거 합격자로서 관직을 제수받지 않은 자에 대한 칭호로 보려는 견해279)申千湜, 앞의 책, 130쪽. 등이 있다. 그런데 과거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또한 관직이나 관계로 사용하였던 예로 본다면 그러한 사례를≪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어야 함에도 이러한 사례가 잘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재란 관로에 진출할 수 있었을 정도의 재주가 뛰어나고 식견이 넓어 학문에 걸출한 자를 말하던 호칭이라 생각된다.280)宋春永, 앞의 글(1985), 18쪽. 정악을 서학박사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정악은 서경사람인지 아니면 개경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조가 서경에 행차할 때 왕을 수행하였던 개경인으로서 유학에 박통하였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학박사란 서학뿐만 아니라 유학을 교수하였던 학관직으로 성종 때 12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기 전에 최초로 파견한 學官職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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