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13년에 설치한 서경학교인 학원은 서경 경략과정에서 서경의 위상 이 바뀌는 것과 궤를 같이 한 것 같다. 서경은 광종 때에 西都라하여 副都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광종 때는 서경학교에 관한 흥학책은 찾아볼 수 없다. 성종 때에는 修書院을 설치하고 생도들을 시켜서 서적을 초하여 비치하도록 하였고,281)≪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西京留守官. 동왕 14년(995)에는 서경의 관제를 개혁하여282)성종 14년(995)에는 태조 때의 관제로부터 벗어나 西京留守官制를 설치하여 知西京留守事 1인(3품이상), 副留守 1인(4품이상), 判官 2인(6품이상), 司錄 參軍事 2인, 掌書記 1인(모두 7품이상), 法曹 1인(8품이상)을 둠으로써 정치적 행정기구로 바뀌어졌다. 서경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그 후 문종 때에는 서경유수관제가 확립되고, 외방에 문사나 문학 등을 설치하여 강학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동왕 10년(1056)에 서경유수관은 서경인 자제들의 과거 준비를 위한 교재를 갖추도록 조처하기도 하였다.283)≪高麗史節要≫권 4, 문종 10년 8월. 이같은 성종과 문종 때의 서경학교에 대한 흥학책은 서경인의 지적 수준이나 학문적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보이며 서경인의 교 육열을 자극시켰을 것이다.
서경의 행정기구가 확립되고 그 관원의 수가 늘면서, 서경의 정치적·경제 적 안정에 따른 서경인의 증가로, 창업 초에 설치한 학원이라는 한 교육기구 에서 서경인의 자제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시설이나 官班上 어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서경인의 자제들을 부별로 나누어 교육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기구를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종 때에는 태조 이래로 존속되어 왔던 학원을 諸學院으로 확대 정비하였던 것 같다. 문종 때에 제학원이 설립되었음은 문종 10년 8월에 서경유수의 요청으로 秘書閣에 있는 서적을 각인하여 제학원에 송부한 것이라든지 동왕 30년에 제정된 녹봉조의 문무반록에 제학원의 副使에게는 13석 5두, 판관과 의학원 박사에게는 8석 10두를 각각 지급하였다는 것을284)≪高麗史≫권 80, 志 34, 食賃 3, 祿俸 西京官祿. 보아 알 수 있다. 어떤 학원을 구체적으로 제학원이라고 말하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제학원의 관원으로 부사·판관 등이 있었던 것을 보면 유학과 을·서·산학 등의 잡학을 총괄하였던 기구로 짐작된다. 이 제학원은 유학교육을 위한 학원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 같으며, 제학원으로 확대 정비된 시기는 늦어도 문종 10년 이전이 라 생각된다.
문종 때에 확대 정비된 제학원은 이후 계속 존속되었으며, 숙종 7년(1102) 이후에는 諸學士院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에는 서경의 문무관반체계를 설정하고 서경을 5부로 나눔으로써 서경의 관료 질서체계를 더욱 강화시켰다.285)≪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西京留守官.
숙종 때의 이같은 관료체계의 확립과 함께 서경학교에 대한 재정비 작업 도 아울러 추진되었을 것이며, 제학사원은 이러한 과정에서 제학원을 학사 중심의 교육기구로 개편하고 유학 중심의 교육기구로 개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제학사원은 예종 11년(1116)까지 존속되었으며, 그 위상은 제학원보다 상위의 교육기구로 격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86)宋春永, 앞의 글(1985), 25쪽.
고려시대의 學士院은 翰林院의 전신으로, 태봉 이래의 元鳳省을 계승한 문한기구였다. 그리고 국왕의 詞命을 제찬하는 기구인 점에서287)≪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藝文館. 양인 이상의 자제 교육을 담당하였던 순수 교육기구와는 성격이 달랐던 것 같다. 그러나 국초에 교육기구가 정연하게 갖추어지지 못하였던 상황 하에서 원봉성이 인재 양성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288)許興植, 앞의 책, 13쪽. 주목을 끌게 한다. 숙종 7년 이후에 개혁된 제학사원은 예종 11년에 分司國子監으로 개혁되었다.289)≪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西京留守官 其屬官沿革 예종 11년. 분사국자감은 분사제도가 실시되면서 개경의 국자감을 본받아 제학사원을 통합 승격시켜 국자감에 준하는 교육기구로 개편한 것이다.
분사국자감의 직제 구성은 개경의 국자감의 직관체계와는290)개경의 국자감은 문종 때에 判事 1인(경관직)을 두었으나 예종 11년에 判事를 大司成(종3품)으로 고쳐 대사성이 실질적인 총장격이 되었으며, 그 아래에 祭酒(정4품), 司業(종4품), 丞(종6품), 國子博士(정7품), 大學博士(종7품), 注簿(종7품), 四門博士(정8품), 學正·學錄(정9품), 學諭·直學·書學博士·算學博士(종9품)를 두었다. 달리 判事·祭酒·司業은 모두 경관직이며 교관직으로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같은 학 관의 겸직은 귀족의 권력 집중과 예산의 절감이라는 점에서 널리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91)張東翼,<高麗前期의 兼職制에 대하여>(≪大丘史學≫17, 1979), 57쪽.
제학사원이 분사국자감으로 승격 개편됨에 따라 서경의 교육은 고려의 교육사상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훌륭한 문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 실은 예종 때 서경 진사출신인 鄭知常이 예종 7년 임진년의 省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등용되었으며 후일 당대 제일의 문사가 되었다는 것을 보아 서도 알 수 있다.292)≪高麗史節要≫권 8, 예종 9년 4월이나 인종 5년 3원 기사에 보면 西京의 학문적 수준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교육적 환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분사국자감은 인종 때에 妙淸의 난을 겪고 난 뒤에는 서경의 행정기구가 축소되면서 제학원으로 환원되었다.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의 행정기구는 監軍과 分司御史臺를 제외한 다른 관서를 省官시킴으로써29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西京留守官 其屬官沿革 인종 14년. 서경의 위치는 부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중앙정부의 예속적 지위로 격하되었다. 이에 따라 분사국자감도 문종 때의 제학원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인종 16년(1138)에 축소된 서경의 관부는 명종 8년(1178) 일대 개혁이 단행되어, 행정기구의 속관을 직능별로 분류하여 6조에 분속시켰다.294)河炫綱, 앞의 책, 133쪽. 명종은 관제 개혁과 아울러 서경학교에 대해서도 제학원의 관원을 경정하여 유학교육과 기술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던 것 같다.295)명종 8년(1178)에 서경의 관제를 更定하면서 諸學院에는 文師 1인, 記事 2인, 算士 1인, 記官 2인, 書者 2인을 두었는데 산학은 算士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20년(1233)에는 畢賢甫와 洪福源의 반란으로 서경이 폐허화되었으며,296)≪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증 20년 5월. 더군다나 원종 10년(1269)에는 崔坦과 李延齡이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귀부함으로써 몽고는 서경에 東寧府를 설치하여 慈悲嶺 이북의 지역을 지배하였다.297)≪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面京留守官. 그 후 충렬왕 16년(1290)에 서경을 돌려받자 서경의 행정과 교육은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298)≪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층렬왕 16년. 그러나 다시 서경의 행정기구가 축소되고 서경의 속관이 土官職으로 굳어져299)≪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西京留守官 其屬官沿革 공양왕 3년. 서경의 지위는 격하되었으며, 이와 아울러 서경학교인 제학원도 여말에 이르러서는 향교화하였다. 공양왕 2년(1390)에 개경과 서북면의 府·州에도 유학 교수관을 둔 것을 보면300)≪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공양왕 2·3년. 서경학교에도 유학 교수관을 두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는 서경학교인 제학원이 향교로 바뀌어졌음을 말하여 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