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1. 과학과 기술
  • 1) 천문 역산
  • (2) 천문 관측

가. 관측기구

 고려 초기에 천문·기상현상의 관측을 위한 시설이나 기구에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따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선 관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사천대 또는 태복감과 태사국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들 기능을 담당한 관청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관측 담당자의 직함으로 보아 여러 가지 관측을 실제로 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관측의 주요 부분을 실시하던 국가 관측기구 즉 지금으로 치면 중앙 천문대와 중앙기상대에 해당하는 시설이 있었다. 지금 개성 만월대에 유적으로만 남아있는 고려의 첨성대 자리는 언제부터 설치되었던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려 초부터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유물은 높이 3m의 기둥 5개 위에 약 3㎡의 돌판을 올려놓은 모양으로, 돌판의 네 귀퉁이에는 난간을 세웠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다. 이 석조물 자체는 고려 후기의 것일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고려 초기부터 천문 관측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이 첨성대 위에 어떤 시설물이 놓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앞에 소개한 고려 초의 관직에 이미 靈臺郎이나 春官正 등의 4官正이 있었음을 보더라도 천문 관찰전담자가 있었고, 그들은 渾天儀 등의 관측기구를 첨성대 위에 설치하고 천문을 관측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다음에 설명할 曆法의 독립적 발전을 이룩한 10세기 무렵에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고려사≫에 있는 여러 가지 관측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관측기구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단언하기 어렵다.

 시각 측정의 기구, 즉 시계에 대해서는 이미 삼국시대 이래 해시계·물시계 등 여러 가지의 기구가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역시 분명하게 어떤 시계를 만들고 사용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역시 관직의 이름으로 挈壺正 또는 司辰의 명칭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시각 측정장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종 때에 묘청이「漏刻院事」라는 직책을 담당했던 사실로 보아335)≪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妙淸條에 의하면 인종 12년 묘청은 三重大統知漏刻院事에 제수되었다. 물시계를 담당하는 누각원이란 기구가 별도로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초에는 蔣英實이 만든 自擊漏 등 여러 가지 물시계가 사용되었음이 알려져 있지만, 고려 초기의 물시계 가운데 이미 자격루 형태의 자동장치를 가진 물시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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