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1. 과학과 기술
  • 2) 지리
  • (2) 풍수지리학

(2) 풍수지리학

 고려시대를 통해 지리학이라 부를 수 있는 지식 분야의 중심을 이룬 부분은 역시 풍수지리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風水地理學은 물론 오늘 우리들의 지리학이나 지구과학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분야로서, 주로 사는 곳의 지리적 특성이나 죽어서 묻히는 장소의 지리적 형상-陽基와 陰宅-이 인간의 운명을 크게 좌우한다는 당시의 강한 믿음에 바탕을 둔 지식체계였다. 특히 당시의 풍수지리학은 圖讖思想과 어울려 더욱 강한 영향을 당시 사회에 미쳤는데, 고려왕조는 그 창건부터 풍수지리 및 도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 초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새 왕조 고려를 개창한 王建은 그의 정권 쟁취의 과정과 그 후 고려 태조로서의 통치이념에 모두 풍수지리실과 도참사상이 얽혀 있다. 우선 왕건에 의한 새 왕조의 개창을 예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신라 말의 승려이며 풍수지리의 대가 道詵(827∼898)이다. 도선은 왕건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부모를 만나 왕건의 왕조 창건을 예언한 것으로≪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게다가 왕건이 고려 태조로서 후손에게 남긴 고려 왕조의 통치이념「訓要十條」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 도선의 권위를 빌어 설파하고 있다. 제2조에 의하면 나라 안의 모든 사원은 이미 도선이 산천의 順逆을 고려하여 정해 준 곳이므로 함부로 사원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제5조에서는 왕건이 나라를 새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地德을 얻었기 때문임을 주장하고, 특히 서경은 지덕이 뛰어난 곳임을 강조해 놓고 있다. 이어 제8조에서는 지형을 볼 때 車峴 남쪽의 사람들은 반역적이기 쉬우므로 조심하라는, 역시 중요한 풍수지리적인 이론을 적어 놓고 있다. 이런 풍수지리의 이론이 그 후의 고려 역사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상당히 잘 알려진 일로, 고려 당대에 뿐만 아니라 그 후의 한국사에 중요한 몫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광종 9년(958) 과거제가 시작되자 잡과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地理業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가장 중요한 부문이었던 천문학이 제도화된 확실한 흔적을 보이지 않는 것과는 달리 지리학은 시험 요강이 정해져 시험대상이나 서적이름이 밝혀져 있을 정도이다. 그 교재들의 이름은≪新集地理經≫·≪劉氏書≫·≪地理決經≫·≪經緯令≫·≪地鏡經≫·≪口示決≫·≪胎藏經≫·≪謌決≫·≪蕭氏書≫등이다. 이 교재는 인종 14년(1136)의 것이므로, 혹시 이 가운데 한두 가지는 고려에서 만든 책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대개는 중국의 지리서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고려 초기부터 지리학에 관한 서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리학에 관한 한 고려사람들이 중국의 서적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천문학이나 그 밖의 자연현상에 대한 해석을 위한 서적은 중국의 것에 전적으로 의존해도 대체로 무방할 수 있었지만, 지리학은 중국의 땅과 전혀 다른 고려 영토에서의 지리학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려 개국과 함께 절대적 권위를 누리게 된 도선의 저술이라는 책들이 잇따라 등장하게 되었다. 예종 원년(1106) 3월에 편찬된≪海東秘錄≫은 바로 이런 많은 책들을 중국에서 들여온 책들과 비교 검토하여 이론적 내지는 실무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해동비록≫은 지금 전하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방대한 분량에 당시의 풍수지리 및 도참의 전모를 정리한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책의 완성에 이어 고려는 이듬해인 예종 2년부터 10년 동안에 걸쳐 서경에 龍堰宮을 완성했다. 이 때는 고려가 개국한 지 200년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고려 지배층 사이에는 개성의 지덕이 200년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앞서서 이미 고려 왕실은 여러 차례 離宮을 짓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개경의 지덕을 간접적으로 연장하려는 延基의 사상을 폈던 일도 있다. 문종 10년(1056) 왕은 도선의≪街岳明堂記≫에 예언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西江(예성강) 강변에 長源亭이라는 이궁을 지었고, 지금의 서울지역에 남경을 두기로 했다. 반 세기 이내에 숙종은 당시의 지리학자 金謂磾의 제안에 따라 실제로 남경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李資謙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거의 불타버리는 등의 혼란이 일어나자 인종 6년 서경출신 인사들의 지지를 받아 승려 묘청이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인종 12년 김부식 등의 적극적인 반대로 일이 주춤해지고 드디어 묘청일파의 반란사건으로 끝을 맺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이미 왕을 비롯한 그 측근은 몇 차례 서경에 행차를 하고 궁궐을 짓는 등 천도의 일부 준비가 진행되었을 정도였다. 고려 전기의 가장 중요하고도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묘청의 사건이 바로 당시의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려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학분야가 여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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