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1. 과학과 기술
  • 3) 의학
  • (1) 의료제도

(1) 의료제도

 고려 초의 의약제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적인 것은 과거에 의학부분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광종 9년 처음으로 시작된 과거제도는 여러 가지로 한국역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이지만, 바로 이 과거 속에 처음부터 醫業이 포함되고 있었다. 의업 이외에도 처음의 과거에는 明算, 卜 등 오늘의 수학과 과학분야도 잡과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과거는 이름뿐 실제로 고려 초기 동안 인재의 채용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못했다. 이는 잡과의 경우 더욱 심해서 반 세기가 지난 목종 11년(1008)까지 과거에 급제한 의업 합격자는 모두 7명밖에 되지 않았다. 50년 동안 새로 배출된 의사가 7명이라면, 이런 의사 배출기구는 그리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를 통해 의사는 과거제도를 통해 배출되었다기 보다는 전통적인 의료기관에서의 徒弟的 훈련에 의해 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1세기부터는 과거에서 의업이 제외되었다. 물론 의업만 제외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잡과가 모두 과거시험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그 후 고려사회에서의 의사 양성은 완전히 의료기관에서의 내부훈련 등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과거제도에 의업이 포함되었었다는 사실은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고려 초의 의업은 과거제도에 포함됨으로써 일정한 권위를 얻었고, 또 과거제도로 확정된 시험방법이 그 후 의료기관에서의 취재를 통한 의사양성에 도 대체로 계승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종 14년(1136)의 의업시험과목은 다음과 같다.341)≪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인종 14년 11월. 특히 당시의 의업이 의업과 呪噤業으로 나뉘어 있었음은 주의할 일이다.

의 업:≪素問經≫≪甲乙經≫≪本草經≫≪明堂經≫≪脈經≫≪鍼經≫≪難經≫≪灸經≫ 주금업:≪脈經≫≪劉涓子方≫≪瘡疸論≫≪明堂經≫≪鍼經≫≪本草經≫

 이들 시험과목은 전부 중국의학서로서, 대체로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기에 이미 들어와 있던 것들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교재를 어디서 체계적으로 공부시켜 어떻게 시험을 보았다는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고려사≫백관지를 보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즉 고려는 목종 때에 처음으로 太醫監과 尙藥局의 중요한 두 의료기관을 두었다.342)≪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典醫寺 및 권 77, 志 31, 百官 2, 奉醫署.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목종의 재위기간은 997년부터 1009년 사이이다. 고려의 대표적 의료기관인 이들 두 기관을 1000년 전후인 목종년간에 처음 두었다고 기록한 것은 바로 이 때쯤부터 과거에서 의업이 사라지고 의사의 양성이 의료전문기관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앞에서의 지적과 맞아 떨어진다. 즉 고려는 목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의료기관을 정비하고, 의업의 과거도 바로 이 기관에서 맡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 두 의료기관 가운데 태의감은 교육기관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의감 직함 가운데 박사와 조교 등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 해준다. 고려는 초기의 목종 때인 1000년경에 태의감·상약국을 설치하여 의료제도를 재정비하고, 그 때까지 실시되던 의업을 과거시험에서 삭제하는 대신 태의감이 의학교육을 담당하는 의과대학을 겸하게 했던 것이다.

 태의감은 목종 때에는 監·少監·丞·博士·醫正 등의 비교적 간단한 직제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반 세기 후인 문종 때에는 훨씬 복잡하고 많은 인원을 가진 기구로 바뀌었다. 문종 때의 태의감 인원은 다음과 같다.343)≪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典醫寺.

判事(종3품) 1명, 監(정4품) 1명, 少監(종5품) 2명, 博士(종8품) 2명, 丞(종8품) 2명, 醫正(종9품) 2명, 助敎(종9품) 1명, 呪噤博士(종9품) 1명, 醫針史 1명, 注醫 2명, 藥童 2명, 呪噤師 2명, 呪噤工 2명

 고려 후기에 태의감은 이름을 司醫署, 典醫寺 등으로 바꾸기도 했고 기구개편도 있었지만, 전기 동안은 대체로 문종 때의 이 구조가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의료기관이 역시 목종 때 처음 만든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상약국이다. 태의감이 의과대학을 겸한 의료행정의 총괄적인 기구였다면, 상약국은 그 기구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왕실의 건강을 우선적으로 담당한 기구였다. 따라서 그 중요성은 어떻든 기구는 태의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목종 때의 상약국은 비교적 간단한 기구로서 奉御·侍御醫·直長·醫佐로만 구성되었다. 이 기구 역시 고려 후기에는 掌醫署, 奉醫署 등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전기에는 같은 이름을 계속 지녔다. 역시 반 세기 뒤인 문종 때에는 기구가 확장되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344)≪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奉警署.

奉御(정6품) 1명, 侍醫(종6품) 2명, 直長(정7품) 2명, 醫佐(정9품) 2명, 醫針史 2명, 藥童 2명

 또 중앙의 의료 관련의 기구로는 東西大悲院과 惠民局을 들 수 있다. 태의감과 상약국이 왕실과 고급관료들의 의료기구였다면, 당시 서울이던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있었던 대비원과 혜민국은 일반 서민을 위한 구료기관이었다. 또한 이 밖에도 濟危寶가 있었는데, 이 기관은 그 때 寶의 하나로 서민의 구료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염출하려는 재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를 가지고 사업을 하는 방법으로서의 제위보가 처음 설치된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로, 고려 초인 광종 14년(963)의 일이었다.

 다른 중앙 의료기관과 달리 이들 서민을 위한 구료기관은 그 조직과 연혁이 모두 확실하지 않다. 다만 문종 때의 녹봉을 규정한 기록에 의해 대비원에는 품관으로 院使 副使·院直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또 대비원의 경우 정종 2년(1036)에 동대비원을 수리하여 굶주리고 병든 무의탁자들을 돕게 한 기록으로 보아 그 전부터 설치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민국은 대비원보다 훨씬 뒤인 예종 7년(1112)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서민을 위한 의료구호기관은 고려 후기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거의 이름을 유지해 가며 계승되었는데, 실제로 서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기보다는 주로 무의탁자, 굶주린 자 등의 구조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의사가 배치되어 있었고, 특히 전염병이 돌 때에는 그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아직 인구가 그다지 밀집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와 같은 대규모의 유행병은 적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고려 초기의 기록 가운데에도 疾疫·瘴疫·瘟疾·疫癘·疫疾·大疫 등으로 씌여진 경우는 거의 모두 유행성 질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의학 수준이 이런 전염병이 대해서 어떤 치료방법을 동원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분명히 기록된 처치 가운데는 神事와 佛事 그리고 도교적인 醮祭 등이 있는데, 기도를 통해 병마를 물리치겠다는 전통적 의학관이 두드러진다. 또 희생자를 처리했던 조치도 기록에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의약품을 어떻게 썼는지 또 위생적 처리로는 어떤 일이 행해졌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또 때로는 이런 상설기관 이외에도 救濟都監 등의 이름 아래 임시기구를 만들어 전염병 처치 등을 맡게 했다.

 중앙의 의료기관으로는 이들 이외에 한림원에도 의관을 두었다. 현종 때에 한림원이라 불리었던 이 기구는 고려 최고의 학문기관으로 뒤에는 예문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림원의 직제에 의하면 權務醫官 2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태의감과 상약국의 의관들과 직무가 어떻게 달랐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자리는 태의감과 상약국의 의관들이 겸직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원래 궁중의 차〔茶〕를 담당하던 茶房도 궁궐 안의 의약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방이 정식 정부기구의 하나로 인정되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므로, 이 역시 의약관계 직함이 겸칭된 경우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고려 전기의 중앙 의료기구에 대한 흥미있는 기록이 徐兢의≪高麗圖經≫에 남아 있다. 12세기 초의 고려를 직접 구경하고 돌아가 남긴 그의 기행문에 의하면, 당시 고려에는 普濟寺 동쪽에 약국을 두었는데 거기에는 太醫·醫學·局生의 세 가지가 있다고 서술해 놓았다. 이것은 당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이 고려에 있던 의료기관들을 그 이름 그대로가 아니라 보통 표현으로 바꾸어 기록한 것일 뿐이라고 하겠다.345)金斗鍾,≪韓國醫學史≫(探求堂, 1966), 173쪽에서는 徐兢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여, 이들 기관은 당시 宋의 의학을 배우기 위한 임시관제였을지도 모른다 고 보았다. 즉 태의감파 상약국의 두 기관을 가리킨 것으로, 태의감의 경우 중앙 의료본부로서의 기능과 의과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둘로 보아 이를「태의」및「의학」으로 나타냈고, 상약국의 경우「국생」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긍이 말한 고려의「약국」이란 어떤 특정한 기구를 가리킨 말이 아니라 당시 의료기구 전체를 나타낸 말로 보면 될 것이다.

 지방의 의약제도로 서경에는 국초부터 分司 형식으로 여러 중앙기구를 두 었는데, 醫學院과 태의감 등이 그것이다. 동경과 남경에도 의사를 1명씩 배치했고, 도호부는 물론 지방의 주·부 군·현에도 각각 藥店司를 그 규모에 따라 1명부터 4명까지 두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 인종 때에는 군대에도 藥員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초기부터 군대에 종군 의약담당자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