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2. 문자와 언어
  • 2)언어

2)언어

 고려의 건국은 우리 나라의 언어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후삼국시대를 종결시키고 한반도 안에서 최초로 명실상부한 통일국가를 형성했다고 하는 정치사적 업적에 못지 않게 한반도의 중앙인 개성지역이 高麗語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성을 중심으로 한 고려 공통어는 그 때까지 유일한 문화어 기능을 하였던 신라 공통어 곧 慶州語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건국 초기의 개성지방은 이렇다 할 문화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문화활동은 전시대의 학문적·예술적·정치적 중심이었던 경주의 관행을 이어받는 형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어가 開城語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구체적 자료도 존재하자 않는다. 다만 개성지방은 과거 삼국시대에 고구려어의 옛 터전이므로 개성방언은 고구려어의 특성을 강하게 반영하는 북방계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있었을 터이므로, 거기에 문화적 우월성을 지닌 경주어가 들어오면서 그 남방계 신라어와 섞이는 현상이 일어났으리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에 문화적 우월성을 지니는 경주어가 원래의 개성어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고려 전기는 개성어를 底層으로 하고 경주어를 받아들여 개성 중심의 한반도 공통어를 정착시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국어사에서는 中世國語가 형성된 시기로 삼는다.

 한편 고려 전기는 대외적으로 북방의 여러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정치·군사적 충돌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였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중국 漢族과의 접촉으로 중국어와 한문자에 대한 인식은 공고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그들 한족과 그들이 만든 역사상의 여러 국가에 대한 事大慕華의 기풍 을 일으켰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중국과의 그러한 문화적·정치적 우호관계는 만주지역에서 변화무쌍한 흥망성쇠의 파노라마를 펼친 다른 민족들에게 더욱 가혹한 적대관계를 갖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고려는 말갈·거란·동여진 등의 침입에 끈질기게 항거하였다. 그 항거의 과정에서 고려는 그들 북방민족과 빈번한 군사적 접촉을 벌이기는 하였지만 그들과 문화적 교류를 가졌다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고려 전기의 언어가 북방민족의 언어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군사외교적 관계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화적·사회적 교류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들 언어를 외래어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성종 14년(995)에 童子 열 사람을 거란에 파견하여 거란어를 학습시킨 사례 같은 것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순전히 군사외 교적인 사건이요, 일상의 언어생활에 거란어가 간여하였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중국측과의 문화적 교류는 가속화되었다. 後周의 評使 雙冀가 고려에 들어와 벼슬하면서 과거제도가 실시된 광종 9년(958) 이후 고려의 중국문화에 대한 열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송나라와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확인된다. 광종 13년에 이미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보내고 송의 연호인 建德을 사용하였으며 광종 14년 고려 사람 金行成이 송나라 國子監에 입학하여 과거에 급제한 일도 있었다(경종 2;977). 1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거란과는 여전히 적대관계를 갖고 姜邯贊에 의해 거란병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송과의 우호관계는 더욱 돈독하게 유지된다. 현종 18년(1027)에는 송나라 사람이 서책 500여 권을 고려에 가져다 바친 일도 있었고, 때로는 송의 상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일까지 있었다(문종 9;1055). 송에서 고려에 귀화한 張琬이란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려 우대하였고(문종 11), 송의 사신들에게는 安興亭을 설치하여 특별대접을 하였다(문종 31). 심지어 임금의 동생이 송을 방문하고 임금이 행차할 때에 그 앞에≪仁王般若經≫을 받들고 나아가게 하는 것까지 송나라 제도를 따르기에 이른다. 이 무렵 개경에는 승에서 찾아온 상인과 관리들이 언제나 상당수 머물러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오늘날 고려 전기의 언어 실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집≪鷄林類事≫가 간행되었다.

 이≪계림유사≫는 송대의 孫穆이 지은 3권의 책으로 숙종 8년(1103)경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土風·朝制·方言의 3부와 부록으로 表文集이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현재 전하는 것은 방언과 토풍·조제의 일부분만 명대에 편찬된≪說郛≫(일종의 백과사전 비슷한 총서)와 그 후≪古今圖書集成≫의 한 편으로 끼어 있을 뿐이다. 그 책의 앞부분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손목은 奉使高麗國信書狀官이라 했으니, 그가 고려에 머물면서 관찰하고 수집하여 기록한 내용이 상당히 명확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방언이라는 표제 밑에 당시의 고려어를 356항목에 걸쳐 開封音이라고 추정되는 당시의 한자음으로 적어 놓았다. 따라서 이들 어휘의 국어사적 가치는 실로 귀중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송대의 한자음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않고 또한 방증자료들이 넉넉지 못하여 완벽한 해독에는 이르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고려 전기의 언어가 어떤 것인가를 헤아리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들 어휘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天文類 14항 鬼神類 2항 仙佛類 2항 數詞類 21항 時日類 10항 上下類 2항 四方類 1항 地理類 4항 水火類 8항 草木類 14항 禽獸類 38항 人事類 18항 親族類 27항 身體類 18항 穀 類 4항 飮食類 11항 金銀類 5항 麻布類 9항 衣裝類 13항 針線類 5항 染色類 5항 度量類 4항 一般類 120여 항

 이 책은 일찍부터 우리 나라에 알려져서 權文海의≪大東韻府群玉≫(조선선조대), 韓致奫의≪海東繹史≫(조선 영조대), 李瀷의≪星湖僿說≫(조선 영조대), 李義鳳의≪古今釋林≫(조선 영·정조대) 등에 옮겨 적혔다. 이제 그 내용의 일부를 살피면서 고려 전기 언어의 모습을 추정해 보기로 하자375)그 동안≪鷄林類事≫에 대한 연구는 여러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최근의 것으로는 姜信沆,≪鷄林類事 高麗方言硏究≫(成均館大出版部, 1980)가 있다.(괄호 안의 한글표기는 15세기 언해문헌에 보이는 것이다).

1. 天曰漢㮈(하) 2. 日曰姮() 3. 月曰契() 4. 雲曰屈林(구/구룸) 5. 風曰李纜() 6. 雪曰女欶(눈) 7. 雨曰霏微(비) 8. 雪下曰女欶耻(눈디-) 9. 雷曰天動(텬동) 10. 雹曰霍(-) 11. 電曰閃(-) 12. 霜露皆曰率(서리) 13. 霧曰蒙(-) 14. 虹曰陸橋(므지게)

 위에 인용한 14개의 낱말은≪계림유사≫의 방언부 첫머리에 나오는 天文類를 순서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여기에 발음표기의 수단으로 적힌 한자들은 원칙적으로는 그 한자의 음만을 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한자가 지니는 表意性을 완전히 배제하였다고는 볼 수 없는 일면이 있다. 가령 눈〔雪〕을 표기하면서「女欶」자(연약함·고움)를 선택한 것은 은연중 그 글자가 지닌 의미를 반영하고자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한자를 사용하여 다른 나라 말을 표기하려고 할 때, 중국인들이 취하는 본성적인 태도라고 생각된다.376)오늘날 Coca Cola를 可口可樂이라 함으로써 발음표시 속에 의미의 투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日曰姮」과「月曰契」는 분명히 서로 엇바뀌었음을 보여준다.≪계림유사≫원본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후대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난 것이라 여겨진다.「雪下」는「눈다다」로 풀이되는데 이와 같이 동사와 결합한 어구도 낱말과 함께 적혀 있음이 주목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한 어휘집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雹·電·霧에 해당하는 15세기 정음 문헌의 낱말은 발견되지 않는다. 현 대어 우박·번개·안개에 해당하는 15세기 낱말이 없으므로, 12세기≪계림유사≫의 표기는 여전히 안개 속에 묻혀 있는 셈이다. 그러나 雹에 대해서는「우박」의「박」이, 電에 대해서는 현대어「섬찟하다」할 때의「섬」이, 霧에 대해서는「뭉개구름」에서의「뭉」이, 이≪계림유사≫에 적힌 한자와의 연계를 암시하고 있다. 虹曰陸橋의 경우에서 그 육교는 그 한자가 발음표기로 적힌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그것은 15세기의「므지게」에 대응하는 데, 陸은「뭍」에 橋는 掛(또는 肩掛)와 연관되어「지게」와 통하기 때문에 그 당시 고려인이 이른바 訓音借로 적은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풍긴다. 또 雷曰天動에서 천동은 매우 이른 시기에 한자어로 굳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몇 개 안되는 어휘에서도 계열이 다른 것들이 섞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4개의 천문류 어휘의 검토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들 12세기 초의 고려어가 15세기 조선시대 초기 언어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며, 또한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신라어와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고려의 문물·제도·언어를 정리하면서 옛날 경주의 별명인「계림」을 책의 이름으로 끌어다 쓴 것부터가 언어의 계통적 흐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성을 중심한 고려의 중앙어 내지는 공통어가 신라문화의 전통을 이어간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과도 부합하는 현상이다.

 그러나≪계림유사≫에서 특별히 해독에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親族類인데, 이 부분을 살펴보면 혹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중세 및 현대국어와 연맥이 약하게 닿아 있는 북방계(고구려) 언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다음에 친족어휘를 살펴보자.

1. 祖曰漢丫秘(한아비) 2. 父曰丫秘(아비) 3. 母日丫秘 丫彌(어미) 4. 伯叔皆曰丫子彌(아미) 5. 兄曰長官(-) 6. 嫂曰長漢吟(-) 7. 姉曰女奈妹(-) 8. 男子曰眇喃(나히) 9. 弟曰丫兒(아) 10. 姝曰丫慈(아) 11. 女子曰漢吟(하님) 12. 自稱其夫曰沙會(사회) 13. 妻亦曰漢吟(하님) 14. 自稱其妻曰細婢(-) 亦曰陡臂(-) 15. 男兒曰丫妲(아) 赤曰同婆記(-) 16. 女兒曰寶妲() 亦曰古召育曹兒(-) 17. 父呼其子曰丫加(아가) 18. 孫曰丫寸丫妲(아아) 19. 舅曰漢丫秘(한아비) 20. 姑曰漢丫彌(한어미) 21. 婦曰丫寸(아) 22. 母之兄曰訓鬱(-) 23. 母之弟曰次鬱(-) 24. 姨妗亦皆曰丫子彌(아미)

 위의 예에서 ( ) 안에 적힌 15세기 국어의 어형과 대응을 이루는 祖, 父, 母 등은 그대로 현대국어에까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兄曰長官, 嫂曰長漢吟 등 15세기 국어의 대응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한다. 兄曰長官은 虹曰陸橋처럼 훈음차로 적은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되나 그 참모습은 찾아낼 수 없다. 嫂曰長漢吟에서「長」은 長官의 長일 것이고 漢吟은 처와 여자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사대부 집안의 婢女를 지칭하는 뜻으로 의미가 바뀐「하님」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한편 姉曰女奈姝로 적힌 낱말은 12세기 당시에 개성에서 통용되던 고구려계통의 낱말이었는데, 이것이 그 뒤에 신라어계통의 낱말「누의」에 밀려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추론해 볼 수 있다. 이처럼 15세기 조선 초기의 국어와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 가운데에는 혹시나 고구려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들이 있다. 삼국시대 땅이름 표기를 보면,「谷」이 신라어에서는「실」이고 고구려어에서는「」이라는 각기 다른 어형이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고구려계통과 신라계통의 어휘간에는 서로 다른 어형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계통과 신라계통이 같은 어형을 나타내는 것이 더 많았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12세기 개성언어의 특징은 저층에 깔려 있던 고구려어의 잔재가 신라어에 밀리어 신라어계통이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한자어가 서서히 고유어를 잠식해 가는 상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自稱其妻曰細婢 亦曰陡臂에서「細婢」는 한자어의 냄새가 짙고,「陡臂」는「妾(첩)」의 발음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15세기의「아, 」에 대응하는 남아, 여아는 또 다른 낱말「同婆記」「古召育曹兒」라는 난해의 어형을 제시하고 있는데 역시 오늘날 그에 대응하는 낱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자어「姨母」에 대응하는「天鬱」과「次鬱」도 마찬가지로 어형을 추적하여 옛말을 찾아낼 수 없는 잃어버린 고려어로 남아 있다. 이처럼 해독에 어려움을 겪는≪계림유사≫의 고려어 자료는, 그것이 사라져버린 북방계 언어일 수도 있고, 옮겨 적을 때 엉뚱한 글자로 잘못 적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계림유사≫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낱말을 하나 더 지적하자면, 그것은 時日類에 나오는「明日曰轄載」라는 항목이다.「轄載」는 현대어에서 한자어 來日에 밀려 사라져버린 낱말이 되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단언할 수는 없으나, 혹시「흐제」(또는 제)를 표기한 것이요, 이것이 오늘날「후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377)李基文,≪國語語彙史硏究≫(東亞出版社, 1991), 11∼22쪽.

 ≪계림유사≫가 비록 불완전한 어휘집이기는 하지만 이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면 그 당시 언어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音韻에 관한 것으로 두드러진 점은, 첫째 유성마찰음〔Z〕이 생성되었다는 것, 둘째 모음사이의「ㅂ」은 약화되지 않아서 아직 唇輕音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셋째 어두자음군(語頭子音群)도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즉 弟日丫兒, 四十曰麻刃은 각각 15세기 국어의「아」,「마」에 그대로 대응된다. 아마도 모음 사이와「ㅅ」의 약화에서「△」이 발생했음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또 袴曰珂背, 裩曰安海珂背, 二曰途孛 등은 아직 순경음「」이 생기지 않았음을 보이는 것이다. 白米曰漢菩蕯, 女兒曰寶妲은 각각 15세기 국어의「」,「」로 바뀐 것인데 12세기에는「」,「」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외에도 一曰河屯은 관형사형으로「」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基數形은「나」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扇曰孛采는 혀끝소리「ㅊ」앞에서「ㄹ」이 아직 탈락하지 않은「불체」를 나타내지 않나 생각된다. 箸曰折과 舌曰蝎도 각각「졀」「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이 15세기에는「져, 혀」로 되었으나 12세기에는 아직 음절끝소리로「ㄹ」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78)李基文,≪國語史槪說≫(民衆書館, 1961) 참조.

 ≪계림유사≫가 보여주는 어휘적 특성은 한마디로 고유어와 한자어의 이중구조를 명백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기초어휘는 고유어이지만, 수사·방위·기물 등은 점차 한자어로 대체되었음을 보여준다.

고유어의 예:足曰潑(발) 火曰孛(블) 手曰遜(손) 水曰沒(믈) 雌曰暗(암) 齒曰你(니) 한자어의 예:茶曰茶(차) 銅曰銅(동) 旗曰旗(기) 海曰海(해) 江曰江(강) 泉曰泉(천) 兵曰軍(군) 千曰千(천) 萬曰萬(만) 東西南北曰東西南北(동서남북)

 ≪계림유사≫를 통하여 12제기 국어의 문법형태소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명사는 독립형을 제시하고 있어서 격조사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주격조사가 {-이}임을 밝히는 예로 面美曰捺翅朝勳(치됴), 問物多少曰密翅易成(며치이셔), 木曰南記(남기) 같은 것을 찾을 수 있다. 용언의 경우에는 어간만 보여주는 것(暮曰占捺 或言占沒 져믈-, 讀書曰乞輔 글보一), -아/-어형으로 나타나는 것(凡洗濯皆曰時蛇 시샤, 凡飮皆曰麻蛇 마샤), 관형형으로 나타나는 것(高曰那奔 노, 深曰及欣 기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고려 초기의 언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개성이 공통어의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 개성공통어는 고구려계통의 언어를 저층으로 하고 신라계통의 경주어를 받아들였다. 셋째, 한자어의 확산이 두드러져서 어휘가 고유어와 한자어의 두 계열로 정차되었다.

<沈在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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