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3. 사서의 편찬
  • 1) 7대실록·고려실록
  • (1) 7대실록

(1) 7대실록

 七代實錄이란 太宗·惠宗·定宗·光宗·景宗·成宗·穆宗의 7대에 걸친 고려 초기실록을 말한다. 현종 원년(1010) 제2차 거란침입으로 개경이 함락 당하여 전적이 모두 소실됨에 따라 현종 4년 9월에 吏部尙書·參知政事 崔沆을 監修國史, 禮部尙書 金審言을 修國史, 禮部侍郎 周佇·內史舍人 尹徵古·侍御史 黃周亮·右拾遺 崔冲을 修撰官으로 임명한 기록이 보이지만,379)≪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4년 9월 병진. 무슨 史書를 편찬하였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380)高柄翊,<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歷史叙述>(≪金載元回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9), 56쪽. 高柄翊은 이 글에서 “이 때 구체적으로 어떤 史書가 엮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하고, 七代實錄과는 다른 史書가 편찬되었을 가능성을 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시대에 대량으로 修史官을 임명한 최초의 기록이다. 史館의 직제를 보면 監修國史·修國史·同修國史·修撰官·直史館으로 구성되어381)≪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春秋館. 있는데, 위의 수사관 임명은 사관으로 하여금 관찬사서를 편찬케 하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본래 우리 나라의 사서 편찬은 삼국시대로부터 비롯하여 고구려는 국초에≪留記≫, 영양왕 11년(600)에 太學博士 李文眞이≪新集≫, 백제는 博士 高興이 근초고왕 30년(375)에≪書記≫, 신라는 大阿飡 居柒夫가≪國史≫를 편찬하였는데, 모두 중국의 正史인 司馬遷의≪史記≫처럼 개인편찬 사서이다. 중국의 사서 편찬은 처음 개인편찬 내지 家學을 거쳐 당에 이르러 정사를 史館에서 편찬하는 관찬사서와 分纂體制로 바뀌었는데, 고려도 국초에 사관을 설치하여 이 체제를 답습하였다. 分纂이란 사관에 많은 史官이 배속되어 손을 나누어 공동으로 사서를 편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종 4년에 편찬된 사서가 사관이 주관한 관찬사서이며 분찬사서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382)金成俊,<高麗七代實錄의 編纂과 史官>(≪民族文化論叢≫1, 嶺南大, 1981, 91쪽;≪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 一潮閣, 1985, 138쪽).

 현종 4년 9월부터 최항 등이 편찬하기 시작한 사서의 성격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서는 이 때 사관의 한사람으로 수찬관에 임명된 황주량의 경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목종 7년(1004) 4월에 장원 급제하여383)≪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選場. 현종 4년 9월에 侍御史로서 수찬관이 되고, 동왕 20년 11월에 國子祭酒·翰林學士를 거쳐 덕종 원년(1032) 3월에 中樞使로서 수국사가 되었다. 그리고 동왕 3년 정월에 政堂文學·判翰林院事, 7월에 이부상서, 靖宗 4년(1038) 11월에 門下侍郎平章事, 동왕 9년 정월에는 드디어 人臣의 최고위직인 守太保·兼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上柱國으로 승진하였다. 한편≪高麗史≫열전을 보면, 거란의 제2차 침공 후 황주량이 조서를 받들어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기까지≪七代事跡≫36권을 찬집하여 바쳤다. 또<高麗世系>에 의하면≪太祖實錄≫은 정당문학·수국사 황주량이 수찬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황주량의 경력에서 다음 몇 가지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황주량이≪태조실록≫과≪7대사적≫두 가지 사서의 편찬에 참여한 듯이 보이는 것, 둘째로≪7대사적≫은 편찬연대를 명시하고 있지 않은 것, 셋째로 7대실록의 일부인≪태조실록≫은 그가 덕종 3년에 정당문학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찬술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 등이다.

 그런데≪7대사적≫은 황주량이 현종 4년에 수찬관으로 임명되어 송의≪歷代名臣事迹≫을 본받아 편찬한 사서로서, 7대실록과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384)周藤吉之,<宋代の三館秘閣と高麗前期の三館と特に史館>(≪高麗朝官僚制の硏究≫, 東京, 法政大出版局, 1980), 435∼436쪽. 여기서 周藤吉之는 黃周亮이 찬수한 것으로 보이는≪七代事跡≫은 부문별로 편집된 것이고,≪太祖實錄(七代實錄)≫은 編年體로 되어 서로 편찬체제가 다른 史書라고 하였다. 이것은 잘못이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황주량은 현종 때 사관 수찬관이 되어 관찬사서의 편찬에 종사하다가, 덕종 원년 3월에 중추사·수국사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동왕 3년 정월에는 정당문학·판한림원사를 제수받고 있는데,<고려세계>에 그가 정당문학·수국사로서≪태조실록≫을 편찬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덕종 3년 정월에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를 제수받을 때 수국사도 겸하게 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7월에는 이부상서로 전보되고 있으므로,≪태조실록≫은 덕종 3년 정월에서 7월 사이에 편찬이 완료되어 헌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태조실록≫이 7대실록의 일부인 것을 감안하면 7대실록도 이 때 완성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해야 할 것은 황주량이 사관의 차석인 수국사로서 7대실록을 편찬하여 바친 점이다. 당시 사관의 장관이었던 감수국사에는 현종 4년(1013) 9월에 최항이 임명되었다가 동왕 14년 12월에 內史侍郎平章事 李龔이 그 후임이 되었으며, 덕종 원년 3월에는 다시 王可道로 바뀌었다.385)≪高麗史≫권 5, 世家 5, 덕종 원년 3월 계사. 왕가도(처음 이름 李子琳)는 성종 14년(995)에 장원급제하여386)≪高麗史≫권 73, 志 21, 選擧 1, 選場. 여러 벼슬을 거쳐 현종 18년 정월에 참지정사에 이르고 동왕 20년 8월에 개경의 羅城을 축조하는 데 큰 공로가 있어 輸忠創闕功臣으로 책봉되고 王氏의 성을 하사받았다. 덕종 즉위년(1031) 10월에 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가, 동왕 원년 3월에는 감수국사를 겸하게 된 것이다.387)≪高麗史≫권 5, 世家 5, 덕종 원년 3월 계사. 이 때 왕가도는 李端·柳韶 등과 더불어 거란에 대한 강경론자에 속하였다. 덕종 2년 9월에 천리장성 축조문제로 거란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 출병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실망 끝에 귀향하여 신병을 요양하다가 덕종 3년(1034) 5월에 죽었다. 그가 하향할 때 “骸骨을 빌어 고향에 돌아갔다”388)≪高麗史≫권 94, 列傳 7, 王可道.고 한 것을 보면 왕의 윤허를 얻어 모든 벼슬을 사임하고 귀향한 것 같은데, 겸직이었던 감수국사는 다른 사람에게 제수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면 수국사였던 황주량이 감수국사로 승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황주량은 아직 벼슬이 낮았기 때문에 승진하지 못하고389)監修國史는≪高麗史≫百官志 春秋館條에 侍中이 겸한다고 되어 있다. 世家(前期)에 나오는 監修國史의 임명 기사를 분석해 보면, 崔沆과 같이 政堂文學(정3품)으로 겸한 일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초기에 한 번 있었을 뿐이고, 실제는 정2품의 門下侍郎平章事, 中書侍郎平章事가 가장 많으며 다음이 門下侍中으로 나와 있다. 공석으로 남겨 두었으므로, 왕가도는 여전히 정당문학·수국사로서≪태조실록≫을 비롯한 7대실록의 편찬을 마무리지었고, 그가 죽은 직후에 진헌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390)金成俊, 앞의 글, 123쪽. 그러므로 앞서 현종 4년에 최항 등이 수사관으로 임명되어 사서를 편찬하기 시작한 것은 그 후 수국사·감수국사 등의 제수와 결부시켜 볼 때, 하나의 계속적인 사업으로서 덕종 때에 이르러 정당문학·수국사 황주량의≪태조실록(7대실록)≫편찬과 연결되어 완성되는 것으로 결론지어야 할 것 같다.

 한편≪7대사적≫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高麗史≫黃周亮傳에서 제2차 거란침입 때에 황주량이 조서를 받들어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기까지≪7대 사적≫36권을 편찬하여 바쳤다고 하였을 뿐, 그가 어떤 직임을 갖고 언제 완성하였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어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七代實錄≫과≪七代事跡≫은 별개의 사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고려사≫세가에서 현종 4년 9월부터 최항 등이 사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 것과≪고려사≫열전에서 황주량이≪7대사적≫을 편찬하였다고 한 것은 문맥상 같은 성질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때의 사서편찬을 둘로 나누어 현종 때에 황주량이 먼저 단독으로≪7대사적≫을 편찬하고,≪7대실록≫은 그 후 편찬을 계속하여 덕종 때에≪태조실록(7대실록)≫을 완결지었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사리에 맞지 않는 어색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7대사적≫을≪7대실록≫과 달리 황주량이 현종 때 단독으로 편찬한 것이라 한다면, 몇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 즉 당시 황주량의 상위직으로서 엄연히 정당문학·감수국사 최항과 예부상서·수국사 김심언이 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7대실록≫이나≪7대사적≫등의 관찬 사서가 개인편찬이 아니라 수사관의 공동편찬 즉 분찬이었음이 틀림없고 보면,≪7대사적≫이 36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인 것도 문제이지만 하위직인 수찬관 황주량이 단독으로 편찬하여 헌상할 수 있는 성질의 사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7대사적≫은≪7대실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와 같이 덕종 3년에 20여 년의 긴 우여곡절을 겪으며 완성된≪7대실록≫은 그 후 어떻게 보존되어 내려갔을까. 鄭摠의 말처럼 조선 초기에 고려국사를 편찬할 때 高麗實錄이 전부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391)≪東文選≫권 93, 進讎校高麗史序. 그렇다 고≪7대실록≫이 원형 그대로 남아 내려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늘날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는 현존≪고려사≫의 초기 부분이 너무 소략하여 연구에 많은 애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거란의 침입으로 궁중의 서적이 모두 소실되어≪7대실록≫이 간략을 면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고려사≫의 초기 부분도 그렇게 소략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황주량이 편찬한 36권의≪7대실록≫은 적은 분량이 아니므로 거란의 침공 때문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7대실록≫은 원형이 언젠가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충숙왕 원년 정월에 “政丞致仕 閔漬, 贊成事 權溥에게 명하여 태조 이래의 실록을 略撰하였다”고392)≪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원년 정월 을사. 한 기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태조 이래의 실록이라 함은 태조부터 어느 왕까지의 실록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 도 목종까지의 7대 실록은 포함되어 있었을 것 같다. 이 때 태조 이래의 실록은 왜 간략히 편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여러 병란으로 태조 이래의 일부 실록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기 때문에 略撰實錄을 만들게 된 것 같기도 하다.≪7대실록≫자체가 거란침입으로 사료가 소실된 후에 편찬되어 간략하였으나 그 분량이 36권이나 된 데 대하여, 오늘의≪고려사≫세가는 목종까지 3권이고,≪高麗史節要≫는 2권인 점으로 보아 이≪7대실록≫도 그대로 후세까지 존속한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고려사≫편찬 때까지 전해진 고려실록 중≪7대실록≫은 이 약찬실록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현존≪고려사≫의 초기 부분이 소략해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이상 논급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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