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3. 사서의 편찬
  • 1) 7대실록·고려실록
  • (2) 고려실록

(2) 고려실록

 고려는 국초에 사관을 설치하여 사서편찬의 실무를 관장하였다. 사관을 정확히 언제 설치하였는지는≪고려사≫백관지 춘추관조에 국초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광종 26년(975)에 건립한 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393)<高達寺元宗大師惠眞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207쪽.의 명문을 지은 金廷彦의 직함이 大丞·翰林學土·內奉令·前禮部使·參知政事·監修國史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광종 26년 이전에 설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관의 직제는 감수국사·수국사·동수국사·수찬관·직사관으로 구성되어 있어 당과 송의 제도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의 사관에는 관직으로 監修國史·修撰·直館만 보이고 있지만, 송의 사관에는 당제에 修國·同修國史가 추가되어 있다. 송의 관제는 당제를 계승하고 고려는 당제를 모방한 것으로 기록에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는 사관의 직제를 정할 때 당제를 주축으로 하여 송제를 증감시켰음을 알 수 있다.

 사관의 기능을 보면 “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맡는다”고 되어 있는데,394)≪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春秋館. 고려는 이에 의하여 송나라처럼 時政記를 편집한 것이 아니라 日曆만 수찬한 것 같으며, 이는 고려실록 편찬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송나라는 고려보다 문서기록이 복잡하여 집정의 시정기, 起居郎·起居舍人의 起居注가 편찬되고 이것이 사관에 송부되면 수찬관이 일력을 작성하였다.395)周藤吉之, 앞의 글, 380쪽. 그러나 고려에서는 시정기를 편록한 것 같지는 않고, 여러 관아의 기록이 사관에 보내지면 史官이 일력을 편찬한 것 같다.

 일력에 관하여 좀더 살펴보면 명종 원년(1171)에 궁중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都校署令 朴仁碩이 침착하게 歷代日錄 및 黃白等物(문서류)을 피난시킨 일이 있고396)<朴仁碩墓誌>(≪朝鮮金石總覽≫上), 433쪽. 또 충숙왕 때 韓宗愈는 藝文春秋館의 檢閱로 있을 때 충숙왕을 따라 원에 들어가 行官日錄을 기록하였다는397)≪東文選≫권 125, 韓宗愈墓誌. 사실이 보인다. 이것으로 보 면 예문춘추관의 사관은 일록을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기록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朴仁碩墓誌銘에 보이는 역대 일록도 史館의 사관이 기록한 역대의 일력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공양왕 원년(1389)에 사관 崔蠲이 “史官의 임무는 군왕의 언행 정사, 백관의 시비·득실을 直書하는 일”이라 하고, “사관은 史草(史藁) 2부를 작성하여 임기가 끝나면 1부는 예문춘추관에 바치고 1부는 집에 보관하여 후일에 대비해야 하며, 또 경외의 대소 아문은 시행한 일을 일일이 예문춘추관에 보고하여 기록을 입증할 만한 증거로 삼게 하자”고 상소한 것을 윤허하였다.398)≪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春秋館. 이것으로 보면 고려시대에 왕의 언행·정사와 백관의 시비·득실은 물론 사관의 사초 및 경외 각사의 문서는 모두 예문춘추관에 송부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일력이 편찬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춘추관의 기능은 고려시대의 사관의 그것과 똑같은 문구로 표현되어 있고, 이에 의거하여 세종 때 춘추관에서 송나라 고사에 따라 시정기를 편찬하기 시작하고,399)≪世宗實錄≫권 66, 세종 16년 11월 무인. 또 승정원에서는≪承政院日記≫가 찬집되어400)≪文宗實錄≫권 12, 문종 2년 2월 병술.
≪經國大典≫권 3, 禮典, 藏文書.
사초와 더불어 고려시대와 같이 실록 편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일력 등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편집된 고려실록의 경우 태조로부터 충숙왕까지 27왕의 실록이 편찬된 것은≪고려사≫·≪고려사절요≫및 기타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충혜왕 이후의 실록도 편찬에 착수한 것 같기는 하나 완성시키지 못한 것 같이 보인다.401)≪高麗史≫권 126, 列傳 39, 林堅味. 이렇게 편찬된 고려실록은 조선초에≪고려사≫를 편찬할 때까지는 존재하고 있어서≪高麗國史≫의 서문을 쓴 정총도 시조 이래로부터 역대의 실록이 모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402)≪東文選≫권 93, 進讎校高麗史序. 이와 같이 고려실록은 조선 문종 원년(1451) 9월에≪고려사≫편찬이 끝난 후 춘추관에 수장된 것 같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실록의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7대실록≫즉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의 7대에 걸친 고려 초기의 실록은 현종 원년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어 궁궐이 불타고 서적이 모두 소실됨에 따라 3년 후인 현종 4년(1013) 9월에 정당문학·감수국사 최항 등 여러 수사관에 의하여 편찬되기 시작한다.403)≪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4년 9월 병진. 그러나≪7대실록≫의 편찬은 자료수집이 어려웠던가 20여 년이 지난 덕종 3년(1034)에 정당문학·수국사 황주량의 노력으로 겨우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404)金成俊, 앞의 글(1981, 77∼78쪽;앞의 책, 1985, 124쪽). 그런데 열전에 의하면 황주량은 제2차 거란 침입 후 조서를 받들어≪7대사적≫을 편찬하여 진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7대사적≫은 현종 4년에 그가 단독으로 수찬한 사서로서≪7대실록≫과 별개의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해석임은≪7대사적≫은 관찬이며 分纂史書라는 점에서 이 당시 황주량은 사관의 수찬관이었으므로 그보다 상위직에 감수국사 최항과 수국사 김심언이 건재하고 있었던 만큼,≪7대사적≫은 하위직인 수찬관 황주량의 이름으로 편찬 진상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7대실록≫과≪7대사적≫은 별개의 사서가 아니라, 덕종 3년에 황주량이 정당문학으로서 편찬 진상한 책이름은 다르나 동일한 사서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원래 고려시대에도≪7대실록≫을 편찬한 후 역대 왕의 실록이 그 때마다 수찬된 것 같으나, 기록에는 편찬 사실이 전하지 않는 것도 있다. 즉 9대≪德宗實錄≫은 편찬의 직접적인 상황은 보이지 않으나≪고려사≫德宗贊에 “실록을 상고컨대”라고405)≪高麗史≫권 5, 世家 5, 덕종 李齊賢贊. 하여≪덕종실록≫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3대≪宣宗實錄≫은≪世宗實錄地理志≫黃海道 白川郡 氈城의 註에 그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어406)≪世宗實錄地理志≫권 152, 黃海道, 白川郡, 氈城.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종(8대)·정종(10대)·문종(11대)·순종(12대)·현종(14대)의 실록은 그 편찬기록이≪고려사≫와≪고려사절요≫등의 사서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수찬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록의 소홀로 편찬기록이 빠진 것 같다.

 그 후 숙종(15대)·예종(16대)·인종(17대)·의종(18대)·고종(23대)·원종(24대)·충렬왕(25대)·충선왕(26대)·충숙왕(27대)까지의 13대의 실록은≪고려사≫·≪고려사절요≫등에 그 편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즉≪肅宗實錄≫에 대한 기록은 인종 2년(1124) 3월 하순의 李德羽卒去記事에 보인다.407)≪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2년 3월 기사. 곧 이덕우는 文翰으로 자임하여 일찍≪숙종실록≫을 편수한 공로로서 호부시랑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이덕우는 예종 5년(1110) 5월에 中書舍人(종 4품)이었고, 동왕 7년 8월에는 殿中監(종 3품)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만큼, 그가 호부시랑(정4품)으로 승직한 것은 예종 5∼6년경이었을 것 같다. 그러므로≪숙종실록≫을 편찬한 것은 예종 5년 이전이 될 것이다. 한편≪睿宗實錄≫의 편찬에 대하여는, 예종이 죽자 인종 즉위년(1122) 5월에 참지정사·수국사 韓安仁은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하였는데, 그는 곧 송 왕조의 고사에 따라 전왕의 업적을 史冊에 실어 후세에 남길 것을 건의하여 실록편수관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408)≪高麗史≫권 97, 列傳 10, 韓安仁. 이에 그 해 9월 중순≪예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寶文閣學士 朴昇中, 翰林學士 鄭克永, 寶文閣待制 金富軾을 편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한안인 등은 물론 수국사로서 실록 편찬에 동참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종이 즉위하자 곧 전왕의 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편수관을 설치한 것을 보면 전왕이 돌아가면 신왕은 곧 편수관을 두어 실록을 편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안인은 인종 즉위년 12월 李資謙에게 피살되고, 정극영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유배되었으며, 동왕 4년 5월에는 박승중도 이자겸모반사건에 연좌되어 귀양갔다.≪예종실록≫이 언제 완성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고려사절요≫예종 원년 12월조에 史臣 金富佾의 사론을, 동왕 7년 8월조에는 史臣 金富儀의 사론을 싣고 있는 점이다. 그들은 정극영·박승중의 후임으로 편수관이 된 것 같이 보이는 만큼, 그들의 사론은 실록편수관으로서의 사론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실록에는 사신의 贊과 論이 수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409)周藤吉之, 앞의 책, 437쪽.

 ≪고려사≫김부식전에 의하면, 김부식은 의종 즉위년(1146)에 樂浪郡開國侯로 책봉되어≪仁宗實錄≫의 찬수를 위촉받았다. 그리고≪고려사≫인종세가에는 사신 김부식의 사찬과 사신 金莘夫의 사론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김 부식이 찬수한≪인종실록≫에서 취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毅宗實錄≫은 명종 때에 문신 文克謙과 무신 崔世輔가 편찬한 것이다. 본래 실록 편찬은 문신 중에서도 문필이 뛰어난 자를 수사관으로 선임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례적으로 무신이 실록 편찬에 참여하게 된 것은 무신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처음 문극겸이 수국사가 되어 무신이 의종을 살해한 것을 直書하려고 하자, 무신이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상장군 최세보를 同修國事(史)로 임명하여 문극겸을 견제하고 마음대로 사실을 개찬하였으므로410)≪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6년 12월. 탈락이 많이 생겨 부실해지게 되었다.≪의종실록≫편찬에는 이 밖에 林民庇·兪升旦·金良鏡 등이 참여하였음을≪고려사절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明宗實錄≫은 고종 14년(1227) 9월에 감수국사·평장사 崔甫淳, 수찬관 金良鏡·任景肅·兪升旦 등이 편찬하여 사관에 보관하고, 1부는 해인사에 수장하였다. 權敬中·李奎報·趙文拔 등도≪명종실록≫편찬에 참가한 기록이 보인다.≪고려사≫권경중전을 보면≪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연대를 나누어 편찬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고려실록도 朝鮮王朝實錄과 같이 편년체로 기록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411)申奭鎬,<韓國の修史事業>(≪朝鮮學報≫89, 1978), 7쪽. 그리고 신종·희종·강종의 3대 실록은 원종 8년(1267) 10월에 감수국사 李藏用, 동수국사 柳璥, 수찬관 金坵·許珙 등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는데,412)≪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8년 10월 임오. 오랜 몽고의 침구 때문에 편찬이 늦어진 것 같다.≪고려사절요≫를 보면 희종 5년(1209) 6월의 기사에 사신 任翊의 사론을 싣고 있어, 임익도 그 3대 실록의 편찬에 참가한 것을 알 수 있다.

 ≪高宗實錄≫은 충렬왕 3년(1277) 5월에 감수국사 柳璥, 수국사 元傅, 동수국사 金坵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다.413)≪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5월 임인. 그러나 충선왕 원년(1309) 2월에도≪忠憲王(高宗)實錄≫을 편찬케 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414)≪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2월 무인.≪고종실록≫은 충렬왕대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충선왕대로 넘어왔음을 알 수 있지만 언제 완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려사≫원부전에 의하면, 그가 유경·김구와 같이≪고종실록≫을 찬수할 때 前樞密副使 任睦의 史藁(史草)를 얻어서 보니 백지였기 때문에 수찬관 朱悅이 이를 탄핵하려고 한 것을 유경과 원부가 저지한 기록이 보인다. 이는 崔瑀의 집권시대에 사관이 권력에 눌려 직서하지 않은 것을 잘 말하고 있는 좋은 사례이며, 또한 이 때 수찬관 중에 주열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元宗實錄≫도 충선왕 3년(1311) 11월에 편찬을 명하였으나415)≪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선왕 3년 11월 경자. 충혜왕 전 원년(1331) 9월의 기록에도≪忠敬王(元宗)實錄≫의 편수를 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416)≪高麗史≫권 36, 世家 36, 충혜왕 전 원년 9월 병신. 충선왕대에 완결짓지 못하고 충혜왕대로 넘어온 것을 알 수 있지만 역시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렬·충선·충숙왕의 3대 실록은 충목왕 2년(1346) 10월에 李齊賢·安軸·安殼·安震·李仁復에게 편수케 하였다.417)≪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2년 10월 경신. 이와 같이 고려실록은 대체로 전기에는 전왕이 돌아간 후 곧 편수관을 임명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시대와 그 이후에는 전쟁, 정권의 불안정, 국력쇠퇴 등으로 제때에 편찬하지 못하고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충렬왕 33년(1307) 11월에는 전왕인 충선왕이 직사관 尹頎에게 명하여 선대의 실록 185권을 원에 반출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반대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418)≪高麗史≫권 32, 世家 32, 충렬왕 33년 11월 병술.≪고종실록≫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때이므로, 선대 실록은 적어도≪태조실록≫에서≪강종실록≫까지 185권에 달하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당시 고려실록은 상당히 많은 분량이 현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金成俊>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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