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3. 사서의 편찬
  • 2)≪삼국사기≫
  • (1)≪삼국사기≫의 편찬

(1)≪삼국사기≫의 편찬

 ≪三國史記≫는 인종 23년(1145)에 왕명에 따라 金富軾을「編修」라는 이름 의 책임편찬자로 하여 崔山甫·李溫文·許洪材 徐安定 朴東桂·李黃中·崔祐甫·金永溫 등 8명의「參考」와 鄭襲明·金忠孝 등 2명의「管勾」등 11명 의 編史官에 의해서 편찬되었다.419)단, 寶文閣의 관리인 管勾 2명은 參考와는 달리 內侍와 承宣의 국왕 측근직으로 직접 편찬보다는 국왕의 명을 받들어 행정적 지원에 관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管勾와 同管勾는 宋制에 비롯된 것으로, 고려에서는 寶文閣의 관직이었으며 中樞內臣으로 겸한 관직이었다. 管勾란 管理勾稽의 뜻을 가졌다.

 편찬 원칙은「述而不作」의 전통적인 역사 서술의 입장에서 기존 사료의 전재가 중심이며, 김부식은 편찬 당시 71세의 고령이었으므로 거의가 편찬자(참고와 관구)들에 의해서 이룩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김부식은 論贊이나 序文(進三國史表) 그리고 각권의 구획, 사료의 취사·선택 등에 관여하였을 것이다.420)高柄翊,<「三國史記」에 있어서 歷史叙述>(≪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9), 8쪽. 그러나≪삼국사기≫가 그의 책임 하에 편찬된 것은 사실이다.

 역사 편찬은 중앙집권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며, 儒敎的 王道政治의 구현을 상징하는 공적인 사업이다. 동시에 국사편찬은 왕통의 정통성을 천 명하고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는 성격을 지닌다.421)李基東,<古代國家의 歷史認識>(≪韓國史論≫6, 國史編纂委員會, 1979), 9쪽. 따라서≪삼국사기≫는 인종 당시의 정치적 필요성에서 편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고려가 건국된 지 200여 년이 경과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妙淸亂(인종 13년;1135)을 진압한 후 왕실의 권위를 확립할 적극적 조치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고려는 성종 12년(993) 이후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거란의 침입으로 史書가 소실되었으므로, 현종 때의≪七代實錄≫을 비롯하여422)≪高麗史≫권 95, 列傳 8, 黃周亮. 그 후 몇 가지 사서를 편찬한 바 있다. 이러한 고려 초의 역사 편찬은 통일신라 이후 무열계왕권의 확립과 유교정치의 발달 및 당의 史館制度의 영향에 따라 그 가능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그 후 宿衛學生들이 文翰機關에 참여하고 史官으로 진출함에 따라 여초의 국사편찬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423)申瀅植,<新羅人의 歷史認識과 國史編纂>(≪白山學報≫19, 1975;≪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1984, 224∼227쪽).

 더구나 여진의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면서 고려 내부의 귀족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즉 李資謙의 전횡은 물론, 大覺國師碑의 찬 술을 둘러싼 坡平 尹氏(尹瓘·尹彦頣)와 慶州 金氏(김부식)의 충돌은 仁壽節과 納妃문제를 둘러싸고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문벌가문의 대립과 충돌은 귀족사회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지배층의 분열과 모순을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부흥운동의 내분과 연결시켜 간접적인 현실 비판을 꾀하기도 하였다.424)申瀅植,<三國史記의 編纂과 硏究成果>(≪三國史記硏究≫, 一潮關, 1981), 8쪽. 여기서 김부식은 분열과 갈등을 국가의 우환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제시하였다.425)申瀅植,<三國史記의 性格>(≪梨花史學硏究≫15, 1984), 1쪽. 이러한 현상은 토인비가 고대 그리이스 도시국가(Polis)들의 자멸적 내란인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제1차 세계 대전과 대비시킨 사실과 뜻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426)盧明植,<쉬펭글러와 토인비>(≪西洋史學史論≫, 法文社, 1977), 409∼411쪽. 따라서 김부식은≪삼국 사기≫편찬에 諫議大夫(허홍재), 起居注(정습명) 등과 같은 간관을427)朴龍雲,≪高麗時代臺諫制度의 硏究≫(一志社, 1980), 75쪽. 많이 등용시켜 현실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와 같이≪삼국사기≫는 12세기 중엽 고려사회가 당면한 필요성에 따라 편찬되었다. 더구나 여진의 군사적 압력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은 뚜렷한 자아의식과 국가관을 요구하였다. 무엇보다도 거란침입에 의한 실록의 소실은 보다 새로운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촉진시켰다. 더구나 귀족 갈등을 목도한 김부식으로서는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자신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국민교화 내지는 국민화목을 도모하는 책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를 쓰게 된 동기를 김부식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 學士大夫들은 모두 五經·諸子百家之書·秦漢史書에는 널리 능통하지만, 우리 나라 사실은 망연하여 그 시말을 모르니 심히 가슴 아픈 일이다. 더구나 신라·고구려·백제가 3국을 세우고 서로 정립하여 禮로써 중국과 통한 바 있어≪漢書≫(范曄)나≪唐書≫(宋祁)에 모두 列傳에 기록된 바 있다. 그러나 국내(중국)의 것은 자세하나 국외(우리 나라-삼국)의 것은 간략하게 써 넣었으므로 실리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 더욱이 古記에는 문자가 거칠고 事跡이 빠지고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君后의 선악, 臣子의 忠邪, 국가의 안위, 인민의 理亂 등을 모두 드러내어 후세에 경계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3長의 才를 얻어 一家之史를 이룩하여 만세에 남겨두어 해와 별과 같이 밝히고 싶다(<進三國史表>).

 이와 같이 그는≪삼국사기≫의 편찬 동기와 목적을 밝히고 있다. 즉 이 책 의 편찬 동기는 첫째로 우리 나라 사람들(식자층)이 중국의 것(학문·역사)은 잘 아는데 우리 것은 모른다는 안타까움에서 우리 것을 알려야겠다는 점, 둘째로 중국책에 실린 내용이 간략하며 우리의 古記는 내용이 불충분하므로 보다 자세하고 충실한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점 등이다. 나아가서 이 책의 편찬 목적은 국가를 구성하는 왕(위)·신하(중간)·백성(아래) 3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해명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왕의 치적, 신하의 충성, 백성의 도리를 설명하는 것이 역사 서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삼국사기≫는「강렬한 자아의식」과「현실비판의 수단」으로서, 우리 역사를 다시 써서 후세에 교훈을 삼겠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다. 그러므로≪삼국사기≫에서 역사 서술은 국가를 구성하는 3자간의 도리를 통해서 이룩되는 것이며, 그들의 행동규범에서 후세의 선악기준을 삼겠다는 鑑 戒主義를 볼 수 있다.428)申瀅植,≪三國史記硏究≫(一潮閣, 1981), 11쪽.

 김부식은 철저한 유교주의자이면서도 불교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으며, 철저한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독자적인 自國意識을 가진 인물이었다.429)高柄翊, 앞의 글, 29∼32쪽. 그것은 중국의 예법으로 우리 나라의 법속을 규제할 수 없다는 논찬과 신라의 방언을 고집한 김부식사관에 잘 나타나 있다.430)申瀅植, 앞의 책(1981), 363쪽.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은 이 책이 편찬된 지 1세기 후에 시작되었다. 우선 李奎報는<東明王篇>(序)에서 이 책의 내용(특히 동명왕의 사적)이 지나치게 간단해서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없다는 평가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비판이 시작되어 權近은 사실이 중복되고 方言·俚語가 섞여 있어 善政과 嘉謨는 전해질 수 없으며 특히 春秋之禮와 어긋난다는 비난을 가하였다.431)≪東文選≫권 44, 表箋 進三國史略箋. 이러한 비판은 尹准·李克墩을 거쳐 安鼎福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이 책의 취약점은 ‘粗略하고 荒誕·鄙俚한 데’ 있다고 지적되었다.432)申瀅植, 앞의 책(1981), 11∼13쪽.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은 申采浩에 의해서 그 절정을 이룬다.

선학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兵火에 없어져 김부식이 참고할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가 편찬한 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그 실은 역사의 변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한 것이다(申采浩,<朝鮮歷史上-千年來第一大事件>,≪丹齋申采浩全集≫中, 118쪽).

 신채호는 김부식이 西京戰役의 승리에 도취되어 사대주의에 입각해서 사료를 삭제·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는 崔南善으로 이어졌고, 金哲埈의 경우에서 그 이론적 바탕이 마련되었다. 후자는≪삼국사기≫가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입장에서 자기 전통의 축소·빈곤화를 초래하여 우리 나라의 고대적 성격과 전통적인 체질을 부인하고 말았다는 주장을 폈다.433)金哲埈,<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韓國史硏究≫9, 1975), 82∼83쪽. 이러한 견해와 출발은 다르지만, 일제의 식민지사가들도 대체로≪삼국사기≫내용을 중국사료의 기계적인 삽입으로 간주하는 동시에434)末松保和,<舊三國史と三國史記>(≪朝鮮學報≫39·40, 1963), 56쪽.
飯島忠夫,<三國史記の日食記事について>(≪東洋學報≫15-3, 1925), 126∼140쪽.
상 대의 기록을 허구라고 규정하고 있다.435)津田左右吉,<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津田左右吉全集≫別卷 1) 참조.
末松保和,≪新羅史の諸問題≫(東洋文庫, 1954), 430쪽.

 한편 위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서 비판하며 삼국사기를 긍정적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김부식이 집필한 논찬의 분석을 통해서 종래의 중국 중심의 사대적인 역사서라는 비판을 반박하고, 자아의식에 입각한 객관성을 지닌 사서라고 김부식의 사관을 옹호한 경우이다.436)高柄翊, 앞의 글, 29∼32쪽. 다른 견해는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이라고 하여 발전된 역사 서술로 설명하려는 경우이다.437)李基白,<三國史記論>(≪文學과 知性≫26, 1976), 873쪽. 삼국사기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 가운데 다음은 그 내용을 計量史學 이론을 원용하여 분석한 것이다.438)申瀅植,<新羅史의 時代區分>(≪韓國史硏究≫18, 1977), 10∼32쪽.

≪삼국사기≫의 本紀 내용은 처음부터 신라를 국가체제로 인정하여 奈勿王을 어떤 역사적인 전기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본기 내용은 정치·천재지변·외교·전쟁이라는 네 항목으로 서술되어 그 항목들은 시기에 따라 일정한 포물선을 긋고 있었다.

 곧≪삼국사기≫는 자연의 변화(도전)와 인간(왕)의 활동(응전:정치·전쟁·외교)과의 상관관계를 기록한 것으로, 이 책을 사대주의적이라고 규정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 나라의 독자성·특수성을 강조하는 국가의식이 나타나고 있다.439)申瀅植, 앞의 책(1981), 16쪽. 실제로 조선 초기 유학자가 편찬한≪高麗史≫에서「世家」라 한 데 대하여,≪삼국사기≫는 天子의 기록이라는「本紀」로 표시하였다. 또≪고려사≫가 실지로 사용한 卽位年稱元法을 중국식인 踰年稱元으로 개작한 데 대하여, 그대로 즉위년칭원으로 쓴 것은 자주의식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자들이 말하는「鄙俚」하다는 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法俗을 그대로 썼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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