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3. 사서의 편찬
  • 2)≪삼국사기≫
  • (2)≪삼국사기≫의 내용

가. 본기

 일반적으로 紀傳體 사서는 本紀·志·表·列傳으로 구성된다. 본기는「국왕의 과거 사실의 기록」으로서, 전체 50권 중에서 28권(56%)이나 되어 지(9권;8%)나 열전(10권;20%)보다 훨씬 비중이 컸다. 더구나 신라 위주라는 비판이 있지만, 신라 5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 통일신라 7권으로 배당하여 비교적 적절한 안배를 하고 있다. 또≪삼국사기≫에서 중국 사서와 같이 국왕의 역사를「본기」로 표현한 것은 주목할 점이다.

 다음의<표 1>에서 보듯이, 중국 문헌은 열전 위주로 편제되어 있으나,≪삼국사기≫는 본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여 중국과 비교된다. 이러한 본기 위주의 서술체제는 왕권의 강화를 나타내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본기는 주로 왕의 직능을 표기한 것으로, 정치·천재지변·전쟁·외교 등 네 항목으로 대별된다. 이 내용은<표 1>에서와 같이 자연의 변화(천재지변:27.4%)와 인간(왕)의 활동(정치·전쟁·외교:72.6%)으로 되어 있다. 이 비율은 삼국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신라는 전쟁과 천재지변의 피해가 가장 적었으므로, 정치적 발전이 유리했을 것이다. 반대로 전쟁과 천재지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백제는 정치적 성숙이 어려웠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국초부터 전쟁(낙랑·대방·신라·마한)을 경험했던 백제는 일찍이 국가 성장이 가능했으나, 그로 인해 국력 손실을 가져와 국가 발전에 한계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440)申瀅植, 위의 책, 153∼155쪽.

중국 사서 총권수 본기 열전
史 記
漢 書
後 漢 書
宋 書
南 齊 書
魏 書
晋 書
隋 書
舊 唐 書
新 唐 書
宋 史
遼 史
金 史
元 史
130
120
130
100
59
130
94
85
204
236
496
116
135
210
12( 9.2%)
13(10.8%)
12( 9.1%)
10(10.0%)
8(13.6%)
14(10.8%)
10(10.6%)
5( 5.9%)
24(11.8%)
10( 4.2%)
47( 9.5%)
30(25.9%)
19(14.1%)
47(22.4%)
10( 7.7%)
18(15 %)
30(23.1%)
30(30.0%)
11(18.6%)
20(15.4%)
20(21.3%)
30(35.3%)
30(14.7%)
56(23.7%)
162(32.7%)
32(27.6%)
39(28.9%)
58(27.6%)
100(76.9%)
79(65.8%)
88(67.7%)
60(60.0%)
40(67.8%)
96(73.8%)
64(68.1%)
50(58.8%)
150(73.5%)
150(63.6%)
255(51.4%)
45(38.8%)
73(54.1%)
97(46.2%)
평 균   12.0% 23.0% 61.9%

<표 1>중국 紀傳體 文獻의 분석

≪史記≫의 경우 실제, 列傳은 70권이나 世家 30권을 합한 수치가 100권이 되었다.≪宋史≫의 경우에 世家를 列傳에 넣고 있어 列傳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또한 각 文獻은 총 권수가 실제로 표시된 권수와는 차이가 있어서 이 표에는 실제의 수치로 하였다. 즉≪新唐書≫는 표시에 있어서는 225권이지만, 권 23, 27, 28, 30, 43, 49, 71, 73, 74 등이 상·하로 되어 있어 실제는 더 많은 것이다.

 이러한 정치 기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진 정치기사를 분석하던<표 2>가 된다. 여기서 볼 때, 백제는 초기시대부터 築城·修官·設柵 기사가 많아 외침에 대항하는 데 국력을 집중하면서 왕권의 절대화가 일찍 이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여러 종족의 복합에 따른 어려움으로 인해, 왕의 巡行이 비교적 큰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는 어느 정도 안정된 성장을 걷게 됨으로써 임면기사가 큰 비율로 보여진다.

삼국\내용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신 라 48.3 26.8 10.1 14.8
고구려 36.4 24.1 18.3 21.2
백 제 29.8 31.3 20.6 18.3
평 균 38.2 27.4 16.3 18.1

<표 2>삼국사기 본기 내용의 비교(%)

항목 나라 비율 평균
築 城
(設 柵)
신 라 6.2 12.7
고구려 9
백 제 23
巡 幸 신 라 5.1 14.4
고구려 21
백 제 17
任 免 신 라 27.1 22.7
고구려 24
백 제 17
祭 祀 신 라 6.8 6
고구려 3
백 제 10
기 타 신 라 54.7 43.2
고구려 43
백 제 32

<표 3>정치 기사의 내용(%)

 다음 천재지변기사는 936여 회의 자연변이 기록으로서, 천재는 604회, 지변은 332회의 변괴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441)天災地變의 수치는 연구자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井上秀雄은 天災와 凶兆로 나누어, 전자는 544회, 후자는 225회 총 769회로 파악하였다(≪古代朝鮮史序說, 王者と宗敎≫, 1978, 296쪽). 朴星來는 咎徵(omens)과 祥瑞(auspices)로 파악하여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추구하였다(Portents in Korean History, Journal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Vol 47, 1978, 32∼90쪽). 천재는 인간생활에 직접 피해가 없는 天變(혜성·5위·일식 등)과 피해를 주는 天災(가뭄·홍수·태풍·서리 등)로 나뉘고, 地變은 지진·동물변·인변(세 쌍동이이상, 질병), 水變(해일, 水色變) 등이 있다. 이들 자연현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다음의<표 4>에서 볼 수 있듯이 천재로는 혜성·일식·가뭄·흥수 등이, 지변으로는 지진 등이 있다. 이들 천재지변은 단순한 자연변화가 아니라, 왕이나 통치자에게 주는 엄중한 하늘의 경고였고, 사건의 예견이나 징후였다.442)申瀅植, 앞의 책(1981), 192∼195쪽. 동시에 이것은 역사 서술의 일부로서, 하늘(자연)과 땅(인간)에 대한 관념적 사고에서 온 정치적 사건의 유발인 동시에, 통치권 유지의 합리화 내지 기능적 제한이 가능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443)Wolfram Eberhard, The Political Function of Astronomy and Astronomers in Han China(Chinese Thought and Institutions;John K. Fairbank(ed), 1957), 33∼48쪽. 대개 혜성이나 일식 및 지진 등은 사망·전쟁과 연결되었다.

항목\국명 신라 고구려 백 제 비 고
天 災 天 變 星 變 89 73 18 혜성·5위·위성
일 식 30 11 26
天 災 가 뭄 89 20 35
홍 수 30 6 6
태 풍 24 4 4
서 리 24 9 4
벼 락 24 9 7
地 變 지 진 61 19 16 지진·지열·산붕·지동
12 1 5
질 병 16 3 5

<표 4>대표적 天災地變

 셋째로 외교기사는 30여 개 나라와 620여 회의 교섭기록을 갖고 있다. 이 러한 외교교섭은 주로 중국과의 朝貢을 의미하는 것으로, 외교관계기사는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서의 자존과 선진문물의 수용은 물론, 한국사의 내적인 사회발전과정을 해명하는데 보완적 기능을 해주고 있다.444)徐榮沫,<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檀國大, 1981), 186쪽. 특히 삼국의 대중관계가 中華思想의 대외적 표시로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445)金庠基,<古代의 貿易의 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4쪽. 장수왕과 북위, 그리고 성덕왕과 당과의 관계를 보 면 고구려·신라의 국력이 강했을 때 외교에도 치중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와 신라의 입장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446)申瀅植,<朝貢外交의 意味>(≪新羅史≫, 梨大出版部, 1985), 200쪽.

삼국명\국명 신라 고구려 백제 東晉 北魏 北齊
신 라   9 15     2   3 9 12 196 15
고 구 려 9   1 3 3 11 86 8 7 21 30  
백 제 15 1   7 4 7 1 3 2 12 23 7

<표 5>삼국의 주요 교섭국

 삼국이 교섭한 나라는 연 32개국에 달하지만 실제로 큰 영향을 준 나라는 위의<표 5>에서 보듯이 10여 국에 불과하였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삼국과 남북조와의 관계보다 당과의 관계가 중심이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조공관계447)李春植,<朝貢의 起源과 意味>(≪中國學報≫8, 韓國中國學會, 1969).
申瀅植,<羅唐間의 朝貢에 대하여>(≪歷史敎育≫10, 1969).
와 宿衛外交 기사448)申瀅植,<新羅의 對唐交涉上에 나타난 宿衛>(≪歷史敎育≫9, 1966).
卞麟錫,<唐宿衛制度에서 본 羅唐關係>(≪史叢≫11, 高麗大, 1966).
및 宿衛學生들의 활동이 외교기사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449)申瀅植,<宿衛學生考>(≪歷史敎育≫11·12, 1969).
―――,<羅末麗初 渡唐留學生再論>(≪邊太燮敎授華甲紀念論叢≫, 三英社, 1985).
李基東,<新羅下代 賓貢科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交驩>(≪全海宗敎授華甲紀念論叢≫, 1980) 참조.

 끝으로 전쟁기사는 연 26개국과 480여 회의 대소 충돌 내용이 나타난다. 전쟁은 국가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국민 결속의 응집력 내지는 국가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었다.450)Morton H. Freid,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N. Y. Random House, 1967), 213쪽. 즉 삼국시대에는 2년마다 한 번씩 치루었던 전쟁이 국가의 성장에 중요했다. 이러한 전쟁기사는 삼국의 발전과정을 설명하여 주기 때문에, 백제는 일찍부터 대외전쟁을 통해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6세기에는 삼국이 한강유역 확보를 위해 치른 전쟁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 라 교 전 국 횟 수 전체횟수(대내전비율)
신 라
(통일이전)
고 구 려 28 105 174(60.3%)
백 제 70
가 야 7
고 구 려 신 라 28 64 145(44.1%)
백 제 36
백 제 신 라 70 106 141(75.2%)
고 구 려 36

<표 6>삼국의 對內戰 횟수(%)

 삼국의 전쟁에는 대내전(삼국간의 전쟁)과 대외전(외국과의 전쟁)이 있었다. 전자는 한강유역 확보를 위한 삼국간의 한반도 주도권의 쟁탈전이며, 후자는 遼東半島를 둘러싼 동아시아 제패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백제는 대내전을, 고구려는 대외전을 주도하였으므로 각기 정치적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 앞의<표 6>에서와 같이 백제는 말갈·낙랑·마한 등과의 싸움을 통해 일찍 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로 신라와의 대내전에서 큰 출혈을 감당해야 했으므로 국력의 소모를 가져와 5세기에는 고구려에, 6세기에는 신라에게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는 대내전에서 피해가 없었으나, 대외전쟁을 주도하여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세력의 동진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확보해 준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삼국사기≫의 전쟁기사는 전쟁이 왕의 정치적 반성이나 정치발전에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451)申瀅植,<三國時代 戰爭의 政治的 意味>(≪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289∼296쪽. 결국≪삼국사기≫의 본기 내용은 한국 고대사의 정치발전과정을 정리한 것이라 하겠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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