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3. 사서의 편찬
  • 2)≪삼국사기≫
  • (3)≪삼국사기≫의 성격

(3)≪삼국사기≫의 성격

 위에서≪삼국사기≫의 편찬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창작물이 아니라, 기존 문헌을 재편집한 것이다. 또한 김부식 한 사람만의 개인저서가 아니라 왕명에 따른 官撰史書로, 모두 11명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개인의 자의성은 최소화되었다. 따라서 김부식 개인의 주관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상·편찬자들의 의견 등이 수렴되어 이룩된 것이기 때문에 자못 객관성이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전통 역사서술의 형식에 맞추어 편찬되었지만, 중국문헌의「닮은꼴」이라고 하거나 무조건 사대적인 문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삼국사기≫는 당시 유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고려의 독자성과 자의성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엿보이고 있다.

 첫째,≪삼국사기≫는 삼국을 처음부터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인정하였고, 왕을 절대적인 지배자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태조왕·고이왕·내물왕대를 역사적 전환기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역사를 발전의 과정으로 보아 삼국의 멸망을 필연적 사실로 간주함으로써 진보적 循環史觀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둘째,≪삼국사기≫는 역사 내용을「하늘과 땅 사이의 관념적 사고」를 통해 서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천재지변과 같은 하늘의 변화와 정치·외 교·전쟁 등 인간(왕)의 활동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사 내용을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유교의 天人觀으로 확대되어 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였으며, 삼국시대가 절대왕권시대임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셋째,≪삼국사기≫는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에, 편찬 당시의 문벌귀족의 갈등과 모순을 고구려·백제부흥운동의 내분과 결부시켜 간접 비판을 꾀하였다. 지배층의 내분과 虐民者의 참혹한 최후를 역사의 귀감으로 삼았으며, 甄萱·弓裔의 멸망을 통일에 대한 분열의 결과로 설명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의 당위성을 제시하였고, 역사를 국민 교화와 계몽의 수단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넷째,≪삼국사기≫는 강렬한 자아의식과 국가의식을 강조하였다.<進三國 史表>에서 김부식은 내 것을 모르는 안타까움을 깨치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고, 중국 위주의 법 속에서도 우리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다. 왕후를 동반하는 巡幸이나 同姓聚妻가 중국적 관점에서는 非禮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고래의 관습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현실을 내세우려는 강렬한 자아의식의 표현일 수 있다.

 다섯째,≪삼국사기≫는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英雄主義史觀이 아니라, 개인의 멸사봉공의 의무와 도리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도리를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김유신을 특별히 다루었으며, 薩 水大捷에서의 乙支文德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삼국사기≫는 신채호 이후 많은 연구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단순히 유교 중심의 사대적인 改惡書라고만 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2세기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 중심의 관념 속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찾으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또한 전통사학이 추구하는 술이부작의 객관적인 서술 자세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으며, 정부 주도하의 관찬이라는 역사 편찬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삼국사기≫는 한국의 전통사학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여 조선 초기≪고려사≫등의 편찬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따라서≪삼국사기≫는 儒敎史觀에 입각한 사대적인 책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고 강렬한 자아의식을 강조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한국고대사의 기본사료를 제공해 주었으며 한국의 전통사학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역사서이다.

<申瀅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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