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4. 문학
  • 1) 한문학
  • (1) 한문학의 본격화와 그 양상

가. 본격화 과정

 고려 전기(태조 초년∼의종 말년)는 여러 국면에서 민족사의 전환이 진행되던 시기이거니와 문학사에 있어서의 전환은 鄕札文學이 쇠멸하고 漢文文學이 본격화되는 현상으로 집약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의 역사적 본격화는 작가 집단이 하나의 독립된 사회신분 범주로 분화되기를 기다려서야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관인으로서의 신분과 작가로서의 신분이 미분화상태였고 한문학 역량이 관인신분 획득의 도구로 쓰여지던 시대의 경우 한문학의 역사적 본격화는 크게 다음 두 가지 지표에 의해 파악된다. 그 한 가지는 한문학이 왕조의 政敎宣場 및 交聘이라는 공공적 경영의 실용적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서서 작가의 개인성에 입각한 사상·감정의 표현체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느냐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 개인성 측면의 기능이 그 시대 문화적 욕구대상들 안에 불가결한 요소로 편입·정착되었느냐이다. 전자는 대체로 양식의 채용 범위-특히 개인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양식의 채용 범위-와 작가들의 저작의식의 개인성의 정도에 의해 검증된다. 그리고 후자는 개인성에 입각한 작품의 저작·향유의 사회적 확대 정도에 의해 검증될 성질의 것이다. 여기에서 표현의 기교도 지표의 하나로 당연히 설정됨직하다. 그러나 한문이라는 언어를 문학적으로 구사함에 있어 정상 수준에 도달한 이후의 기교 문제는 그 측정 기준이 한결같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개인차를 넘어선, 한문학의 史的인 국면에서의 기교의 일반 수준의 문제는 앞의 두 가지 지표에 대체로 해소된다고 보기 때문에 굳이 따로 설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지표의 전자만 가지고 본다면 삼국시대에 이미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 같고, 양식에 있어서는 주로 시, 그것도 형식이 비교적 간편한 것을 채용했던 것 같다. 따라서 전자의 지표를 채우기에도 심히 빈약했던 셈이다. 첫번째 지표를 어느 정도 채우면서 후자까지도 일정하게 충족시켜 가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신라말·고려초이다. 즉 그 동안 중국에 유학하거나 본국에서 공적·사적 수학경로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장해 온 儒士系 문인들이 현저하게 사회적으로 대두한 후부터이다.

 이들의 대두는 역사 전환의 촉진소의 하나로 작용하였는데, 이들 유사계 문인들은 나말에서 여초에 이르는 혼란한 왕조교체기에 그 대응하는 방향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즉 어느 조정에건 入仕한 부류와 자의든 타의든 끝내 재야인으로 남는 부류가 그것이다. 朴仁範·崔承祐·崔凝·朴儒·崔彦撝 등이 전자에 속하고, 崔致遠·王巨人 및 亡名 智異山 隱者503)崔滋,≪補閑集≫下. 등이 후자에 속한다. 고려왕조 성립 이후 신라계 문사들-종래의 재야문사 및 경순왕과 함께 개경으로 옮겨진 옛 신라조정의 문관들-의 수와 그 거취는 묘연하다. 그런데 숫적 규모는 신라가 망하기 약 1세기 전인 문성왕 2년(840)에 당에서 돌려보낸 質子 및 學生이 105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리고 고려조정에서의 거취는 역시 입사와 재야 두 부류로 나누어졌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로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사례가 없다. 다만 신라계 2세라고 할 수 있는, 신라가 망할 때 9세 소년이었던 신라 元甫 崔殷含의 아들 承老와 광종 때에 과거에 급제한 崔亮 정도가 드러나 있을 뿐이다. 후자의 경우로는 망명 지리산 은자가 하나의 실마리가 되겠는데, 대략 다음 몇 가지 유형의 어느 한 가지에 속하거나 또는 두 가지 이상이 중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문학 역량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그 문학성향이 신흥 고려왕조의 經國之文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경우, ㉯승려와 對待되는 한문지식인이란 점에서 儒士이기는 하나 고려왕조가 수용·정착을 힘써 추진하고 있는 유교적 가치·典章에 대해 지적으로 소략하거나 그 의식·태도에 있어 소극적인 경우, ㉰옛 신라, 즉 옛 자기들의 왕조에 대한 회고의식에 잠겨 있거나 또는 志節意識을 가진 경우, ㉱그리고 기본적으로 현실을 거부하고 세속으로부터 도피한 경우가 그것이다. 왕의 초빙에 “나라에서 부르는 글이 골짜기에 들어오니 / 아뿔사 내 이름이 世間에 떨어졌군”504)崔滋, 위의 책, “一片絲綸來入洞 始知名字落人間.”이라는 싯구를 남기고 사라진 지리산 은자는 ㉱의 유혈에 들겠고, 역시 亡名인<崔致遠>의 작자는 ㉰와 ㉱를 아울러 가졌던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현종대의 張延祐에 의해 한역된 鄕札歌詞<寒松亭>의 작자도 이 작품만 가지고는 한문학과 직접 관련 지을 수는 없지만 작품의 내용이나 정조로 보아 신라유민계로서 ㉰의 유형에 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한문학의 본격화는 나말에서 여초, 대략 성종년간에 이르는 시기의 이들 재야문사들에 의해 그 단초적인 징후가 양성되기 시작했다. 최치원은 종래에 우리 나라 한문학의 시조로 인정되어 왔거니와 특히 한문학의 개인성을 지표로 하여 접근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본격화의 단초를 연 존재로 확인된다. 현재 수습된 그의 문집의 잔여분에서나마 양식의 채용 범위가 일정하게 확장되었고 저작의식의 개인성이 일정하게 제고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명성은 주로<檄黃巢書>같은 공용문장이 매개가 되었지만 그것이 한문학의 개인성의 측면에 대한 인식도 높여주는 계기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傳奇의 출현이다.505)이 시기의 전기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로는 林熒澤,<羅末麗初의 傳奇文學>(≪韓國漢文學硏究≫5, 韓國漢文學硏究會, 1980·1981)이 있다. 전기계의 작품은 대개 나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고려 초기에 들어와 주로 신라유민계 재야 문사 1세나 또는 2세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단된다. 전기는, 그 양식의 성격이 순전히 개인성을 지닌 것이란 점에서 이 시기 한문학의 본격화 징후를 밀도 높게 보여주는 셈이다. 유민계 문사들의 문학적 저작으로 이 밖에도 시를 비롯하여, 개인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양식을 채용한 것들이 의당 있었음직하다. 그러나 이런 저작들이 인멸되는 가운데에 유독 전기계 작품이 일부나마 전해지게 된 것은 그 서사적인 내용이 가진 흥미도 흥미려니와 무엇보다 작품내의 叙事가 擬 또는 準歷史事實로 인식되어 온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기록이야말로 한문학이 지닌 공공적 기능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였고, 따라서 역사기록이 문헌들 가운데에 역시 가장 우선적인 보존 대상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수긍될 것이다.

 한편 앞에서 예시한 삼국의 각 정권이 입사한 문사들의 경우는 실용적이며 공공성을 지닌 문장을 넘어 개인성에 입각한 한문학 작품을 쓸 때 시를 제외한 다른 양식에까지 채용하여 확대해 갈 만큼 정신의 잉여영역을 미처 갖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의 賓貢科에 급제하여 崔致遠·崔仁渷(彦撝)과 함께 문장으로「一代三崔」506)<奉化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라 일컬어지던 崔承祐조차도 그 문학적 저작은 시를 제외하고는 四六騈儷體로 쓰여진 공용문장 5권에 그친 사례가 이점을 잘 시사해 준다. 최승우의 4·6변(병)려체 문장 5권이 최치원의≪桂苑筆耕集≫과 같은 유형의 공용문장 위주였음은 그 스스로 문집을≪餬本集≫즉「餬口之本」이라 명명한 데에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3최 가운데 최언위 역시 태조∼정종년간에 왕명을 받들어 지은 고승들의 塔碑 이외에 남긴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최치원의 저작과 전기계 작품의 출현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한문학 본격화의 징후는 그 자체로서 확실한 하나의 역사현상으로 정착되면서 고려 전기의 전반기, 대략 靖宗년간까지를 관철하여 후반기로 이어진 것 같지는 않다. 고려 초기의 중국 문사들의 열성적인 영입과 과거제의 실제 추이 등을 살펴보면 이 시기 고려는 마치 한문·한문학을 비로소 수용하기 시작하기라도 하는 듯한, 이 분야에 있어서 일종의 무인지경적 상황을 보는 듯하다. 적어도 조정이라는 중앙부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광종대 徐弼의 유명한 항거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중국 문사 영입에의 열성과 광종∼성종대의 과거에서 雙冀와 王融 두 귀화인이507)王融이 귀화인임은 왕융이 지은<康州智谷寺眞觀禪寺碑>(≪釋苑詞林≫191)에서 崔承老가 왕융을 가리켜 ‘閩川拂衣者’, 즉 ‘(중국의) 閩 지방에서 (고려로) 歸隱해 온 사람’이라고 일컬은 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李穡의<賀竹溪安氏 三子登科詩序>(≪牧隱文藁≫8)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자세한 내용은 李基東,<羅末麗初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歷史學報≫77, 1978;≪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韓國文化硏究院, 1980, 270∼273쪽) 참조. 각기 세 차례와 열 두 차례에 걸쳐 知貢擧를 거의 독점한 사실, 그리고 여기에 맞물려 진행된 성종의 일련의 과거응시 推動策 등은, 다른 정치·외교적인 이유도 개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고려조정의 토착 한문학 역량이 공적 수요에 대응하기에 실제로 빈약했거나, 적어도 통치자의 이 방면에의 의욕 수준, 또는 중국을 의식한 이 시기의 통념적 기대 수준에 크게 미달했음을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점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므로 다분히 공공성을 지녔던 문장인 塔碑·寺碑類의 이 시기 저작상황에서도 드러난다. 찬자 판독이 가능한 현존 자료에서 태조∼정종년간 9건 중 7건이 최언위, 광종∼경종년간 7건 중 3건이 金廷彦, 2건이 왕융에 의해 지어졌다. 고려 전기의 후반기로 넘어가서는 찬자가 여러 사람으로 교체되어 등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 시기 고려조정의 한문학 역량의 인적 빈곤상을 드러내어 주는 현상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우리 나라에서 한문학을 수용하려는 일차적인 요구는 왕조의 정교선양 및 교빙에의 공공적 기능성으로부터 나왔으며, 관인이 되어 이러한 공공적 기능성을 가지고 실현하는 것이 문사들이 우선적으로 바라는 바였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생각하면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지표에 부합하는 한문학의 본격화의 정상적인 진행은 조정의 공공적 수요를 일정하게 충족시키고 난 다음의 잉여영역으로서의 실현일 터이다. 그런데 이 시기 한문학의 본격화 징후는 공공적 수요라는 本流路에 일종의 공동적인 국면을 둔 채 일어난 傍流 현상이었던 것이다. 傳奇 양식은 중국에서도 文言文學의 정통양식이 그 역사적인 생성의 누적으로 거의 완비된 체계로 이루어지고 난 당나라 중기에 들어와서야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예를 굳이 적용하지 않더라도 전기같은 양식은, 우리 나라 한문학 수용에의 일차적인 요구에 비추어, 고려의 건국과 함께 확대·상승된 政敎·典章·儀禮體系에 부응하여 확충되었을 정통양식, 특히 공공성을 지닌 그것들에 대한 역량의 일정한 성숙·충족이 있고 난 뒤에야 출현함직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 초기 신왕조의 정교·전장·의례체계에 부응하는 영역에서의 역량에 일종의 공동국면을 둔 채 전기같은 양식이 유행했다는 것은 한문학사 그 자체의 표면으로만 본다면 하나의 이상현상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 주로 6두품계인 신라 말의 재야문사 및 이들의 뒤를 이은 고려 초 신라 유민계 재야문사들의 사회적 처지상 상대적으로 앞서 발달할 수밖에 없는 자아의식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이 양식이 성행한 사실을 연결해 생각하면 역사적으로는 충분히 개연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성향의 한문학적 성과는, 이들 집단이 고려사회에서 최치원의 후손된 처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주로 침강적인 소멸과508)鄭知常,<栢栗寺>(≪新增東國輿地勝覽≫21, 慶州), “記憶崔儒仙 文章動中土 … 邈哉九世孫 結髮混卒伍.” 함께 더 이상 상승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공동을 채워 나가는 朝廷圈의 한문학 본류와 아무런 연관도 없이 한갓 부질없는 傍枝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문학이 가진 낭만의식이며 唯美風은 이 시기 조정권의 문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특히 전기계 작품들은 이 시기 조정권에서의 구시대 역사의 채록·편성에 자극을 주면서 실제적으르 사료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문학의 본격화는 결국 이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었는데 특히 성종대의 유학·과거 진흥을 위한 일련의 추동책이509)성종대에는 그 재위 16년 동안 원년과 9·11년을 제하고는 해마다 과거를 시행했다. 또 과거를 이렇게 시행할 수 있는 기반 조성을 위해 그 즉위 초기에 널리 諸州의 자제 260여 명을 뽑아 올려 중앙에서 공부하게 했다. 동 5년 7월에 귀향하고 싶어하는 학생 207명을 돌려 보내고는 그 후속 조처로 이듬해 8월에 12牧에 經學博士 각 1인을 醫學博士 각 1인과 함께 파견하여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8년 4월, 이러한 장려책을 폈는데도 불구하고 학업이 과거에 응할 수준에 이른 자의 수가 기대에 차지 않자 마침내 이 문제를 일정한 범위의 관료의 인사고과에 연계시키기에 이르렀다. ‘무릇 文官으로서 제자 10인 이하를 둔 자’를 그 職의 임기가 만료될 즈음 有司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여 포폄의 자료로 쓰게 하고, 12목의 경학박사로서 그 문하에 한 사람도 應擧者를 못낸 자는 비록 임기가 차더라도 그대로 유임케 하여 성과를 내도록 독려하는 것을 일정한 격식으로 삼게 했던 것이다. 성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14년에 文臣月課制까지 제정했다. 즉 나이 50세 이하로서 아직 知制誥를 거치지 아니 한 중앙에 있는 문신들은 翰林院에서 출제하여 매월 시 3편, 부 1편 씩을 지어 바치게 하고, 지방에 있는 문신들은 임의의 제목으로 매년 시 30편, 부 1편씩을 지어 매년 말에 바치게 하여 한림원에서 평가하여 왕에게 보고하게 한 것이다. 있은 이후로 급속히 진전되어 갔다.

 성종대의 유학·과거 진흥책들은 요컨대 한쪽편에 중국을 典範으로 둔 고려 왕조의 총체적인 문화적 약진 지향의 한 표현이며, 왕권 강화의 정치적 책략성도 전망하는 일부 문화적 구도의 내용 요소로 결합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종은「周·孔의 기풍」과「唐·虞의 다스림」에의 성취에 이르는 주요한 방도의 하나로「科目」을 내세웠는데,510)≪高麗史節要≫권 2, 성종 5년 7월 敎書. 이는 유학에 대한 이해의 소박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유학을 통한 새로운 문화적 약진 의욕의 한 표현으로 보아 마땅하다. 더구나 당시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태조가「禽獸之國」으로 규정한 거란과의 갈등이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 때라 중국을 전범으로 한 문화 약진을 통해 국가의 격을 높이 상승시켜 중국과는 다른 편에 있는 거란과의 문화적 낙차를 더욱 벌임으로써 대응하자는 대외관계의 문맥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학을 통한 문화 약진 지향의 주요한 방도의 하나로 과거를 힘써 시행했고, 제술업을 과거의 首位科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문학이 문화 약진 지향의 바로 중심부위에 두어져 있었던 셈이다. 경학은 문학과 함께 한문을 매개로 하는 문화의 양대 분야이다. 그러나 과거에서 명경업이 중시되지 못하고, 유사·문인 일반의 의식·사고에 있어서나 저작 실제에 있어서「經術」과「文章」이 미분화이거나 분화되었다 하더라도 극히 초보적인 단계에서 경술보다는 문장을 우위로 하는 이 시기의 일반적 경향이 또한 이 점을 받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제 시행을 통한 한문학 장려 그 자체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王의「樂慕華風」에 대한「民」의「不喜」의 정서를 대변한 李知白의 유명한 반발511)≪高麗史節要≫권 2, 성종 10년 10월.은 광종∼성종년간 국왕들이 주도한, 중국을 전범으로 삼은 문화약진정책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얼마나 급진적으로 추진되었는가를 반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한문학의 본격화를 하나의 역사현상으로 정착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어 문종대의 사학 발흥에 촉진되어, 예종·인종년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위로 朝官들은 辭采가 넉넉하고, 아래로 閭閻陋巷間에도 經館·書社가 여기저기 서로 마주할 정도이며, 卒伍·童稚에 이르기까지 鄕先生에게(漢文을) 배우기에”512)徐兢,≪高麗圖經≫권 40, 儒學. 이를 정도였다. 徐兢의 표현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문 내지 한문학적 역량을 지닌 사람들이 일종의 피라미드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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