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4. 문학
  • 1) 한문학
  • (2) 고려 전기 한문학에서의 상상력·의식·풍격

가. 제1기(태조∼정종)

 앞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 한문학사의 첫머리에는 신라 말의 연속으로서의 傳奇系가 자리하고 있다. 각종 문헌에 편입되어 각 문헌 그 자체의 문맥 속에 매몰되어 온 이 계열 작품들로서 기왕에 표출되어 온 것에 새로이 2편(아래의 ㉴·㉵)을 추가하여 목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崔致遠(≪太平通載≫), ㉯調信, ㉰金現感虎(이상≪三國遺事≫), ㉱首揷面枏(≪大東韻府群玉≫), ㉲溫達, ㉳薛氏女, ㉴都彌(이상≪三國史記≫), ㉵白雲·際厚(≪三國史節要≫)

 ㉮·㉯는 전기임이 확실한 것이고, ㉰는 전형에서 다소 일탈될 정도로 확장된 것이고, ㉱는 온전한 1편 전기의 縮約態인 것으로 보인다. ㉲∼㉵는 본래 전기적 양식의식으로 쓰여진 것이 역사편찬자의 일정한 첨삭을 거친 것으로 생각된다.

 ㉮는 최치원의 바로 다음 세대에 지어졌거나 늦어도 그 다음 세대를 넘지 않을 것임은 작품 말미 부분의 “모란을 심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는 구절로 알 수 있다. ㉯가 고려에 들어와 오랜 후대에 지어진 것이 아님은 작품 초두의 “옛날 신라의 서울이었을 때”라는, 신라에의 회고적 情調가 유난히 개연하게 표출되어 있는 점으로 단서를 삼을 수 있다. ㉰는 그 원저작 시기가 신라 말 어느 때로 추정되고, ㉱는 ㉮와 함께 문종대 朴寅亮의≪新羅殊異傳≫에 실려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이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본다. ㉲∼㉵는 그 원저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단서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편입되어 있는 사서 안에서의 다른 인물 서술과 대조해 보면 전기양식의 세례를 받은 흔적이 역연하다는 점이 신라 말 이래 이 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추측케 한다. 특히 ㉲와 ㉴는 각기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회고적 관심의 바탕에서 관련 사료 또는 전설을 작품화한 것으로 보여, 어쩌면 후삼국에서 이 시기에 이르는 사이 각각 그 계통의 문사에 의해 지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기의 전기는 대개 구전설화나 문헌자료에서 자료를 취하여 지어졌다고 추측되고, 따라서 상상력·의식·주제 등 작품의 내포에 있어 작가의 몫이 자연히 한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일정한 對自的인 轉身이 없이는 지어지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양식이다. 바로 이 점이 한문학의 역사적 본격화와 관련하여 주목되게 된 것이다. ㉲∼㉵는 아직 이 시기 전기로서의 정립에 보다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므로 일단 논외로 해야겠거니와, ㉮∼㉱의 경우 우선 공통적으로 애정 모티브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점은 ㉲∼㉵도 마찬가지다. ㉲∼㉵를 일단 유보하고 ㉮∼㉱만 가지고 보더라도 우리 한문학의 역사에서 이처럼 애정 모티브의 집중 현상을 보인 경우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현상은 비슷한 시기 당나라 전기의 그러한 성향을 수용한 것으로만 간단히 치부하고 말 수 없는 우리 내부의 사회사·정신사적인 의미를 분명히 가지고 있을 것이나 현재로서는 하나의 과제로 미루어 둘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애정 모티브가 주제 그 자체로 발전한 것은<수삽석남>뿐이며,<최치원>과<조신>·<김현감호>에서는 상위의 다른 주제에 종속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수삽석남>에서도,<조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신분갈등 모티브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 비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최치원>은 幽媾를 그 情節 구성의 중심축으로 한 점에 있어서나, 시의 삽입을 구성의 주요 성분으로 삼은 점에서나, 그리고 그 시풍의 艶麗함과 시가 도달한 수준에 있어서나 후세 金時習의≪金鰲新話≫의 일부 작품에 방불한 작품이다. 삽입시의 대량적 구사와 정절의 짙은 색정성에 있어서 8세기초 무렵 당의 張鷟의<遊仙窟>의 영향을 받은 자취가 역연하나, 의식이나 주제의 방향에 있어서는 거의 對蹠的이다. 요컨대<최치원>은 주인공 최치원의 고독하고 답답한 情懷와 현실 허무의식이 짙은 음영으로 배어있는, 비극성이 농후한 작품이다. 저승의 두 미녀와의 짙은 색정은 이러한 주제성향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데에 아주 적합하게 쓰이고 있다. 주인공 최치원의 고독·답답함과 현실 허무의식은, 실존 최치원의 행적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결말에서「遊心沖漢」이라는 초월계로의 登陟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동기는 다르나 고독과 현실 허무의식의 결과 초월계로의 안주가 모색된 것은<조신>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서는 태수의 딸과의 삶이 樂보다는 전적으로 苦의 국면에서 묘사되고 있음이 전자와는 달라서 불교적 상상력이 강하게 투과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은 고려 초기 신라유민계 재야문사들의 고뇌의 소산임에는 일치할 것 같다.

 애정 모티브를 도입한 네 작품에서<수삽석남>만이 그 결말이 희극적이고 나머지 셋은 모두 비극적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낭만의식이 작품 산출의 기반적 자질이 되고 있음을 본다. 이 네 작품뿐 아니라 위의 목록 ㉲∼㉵ 작품들도 모두 짙은 낭만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최치원>·<김현감 호>·<수삽석남)의 구성에는 신화적인 상상력이 지배적으로 개입되고 있다. 이 신화적 및 불교적 상상력과 낭만의식은 전시대로부터 이어와 이 시기에 이르러 전기양식으로 일종의 극적 확충과 표출을 보이고는 일정한 변용·굴절을 겪으며 다음 시기로의 먼 파장으로 흐르다가 유학정신의 성장으로 傍邊의 잔류로 가게 된다.

 이 시기 문학에서 신화적 상상력이 이처럼 개입되는 것은 근원적으로 이 시기가 아직 신화적 세계관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 시기의 공공성 저작인 역사기록이 웅변해 주고 있다. 우선 잘 알려진≪舊三國史≫는 대체로 왕권 확립의 기틀이 잡혀진 성종년간 전후에 편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규보의<東明王篇>에 협주로 남아 있는 그「蕪拙한 文字」의 잔편을 통해서나마 아니 오히려 문자가 무졸함으로 해서 더욱 이 시기 신화에의 주관적인 열정을 행간에서 감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종 말기에 쓰여진<駕洛國記>의 경우 이런 저작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銘까지 첨가되어 있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 명은 신화에의 고양된 열정으로 차 있다. 의종대 金寬毅의≪編年通錄≫으로부터≪高麗史≫에 전재되어 있는<高麗世系>역시 한미한 왕건의 가계를525)≪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조에서 “朕亦起自單平”이라 하였다. 삼국이래 전해 오던 신화들을 빌려 신격화한 한문 작품이다. 이 저술은 필시 예종이 일찍 읽었다는≪編年通載≫로부터 김관의의≪편년통록≫으로 전재되었을 것인즉 바로 이 시기 왕권수립 과정의 산물로 보아 무리 없을 것이다.≪고려사≫에 전재된 김관의의 이 저작은, 김관의에 의해서인지 아니면≪고려사≫편찬자들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문 과정에서 일정한 수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신화적 사실만 단순히 기술해갈 뿐 신화에의 주관적 열정은 이미 제거되어 있으나, 앞의 두 사례로 보아 원저작은 그렇지 않았음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설령<고려세계>가 저작 주체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정치적인 책략의 일환이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책략이 실효를 거둘 기반, 즉 신화적 세계관이 두루 퍼짐이 없이는 그런 책략을 쓸 필요가 없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금석으로 전해온, 왕명을 받들어 지은 고승들의 탑비는 대개 최치원이 이 방면에 남긴 작품들을 전범으로 삼은 듯하나, 최치원의 그것들에 비해 훨씬 格套性이 강하다. 우선 대개는 서두에 비의 주인공에 이르기까지의 선종 법맥을 인도·중국으로부터 추적해 와 주인공에게 연결시켰다. 그리고 가계, 태몽, 출생과 어린시절, 출가 및 본국 법사에게의 투신, 중국에서의 구도, 귀국, 왕으로부터의 우대, 弘法·順化·送終·樹碑과정의 순서로 서술하고 나서 銘詞로 끝맺는 이 단선 구성의 격식을 거의 지키고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불교적 신성존재들을 매개재로 삼은 태몽, 어렸을 때의 이를테면 葷菜혐오 등으로써 불교적 根機가 생래성을 지닌 것으로 표현되는 점은 최치원의 작품에서도 보이지만 이 시기의 탑비에서 하나의 格套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중국의 대사와의 만남에서 두 사람 사이의 전생인연 모티브가, 최치원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또 하나의 例套로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최치원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의 변화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사적 변화도 빈약하여 전반적으로 다분히 기능적이다. 태조∼정종년간에 이 방면의 글을 도맡아 쓰다시피한 최언위가「三崔」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지만 그 역량에 있어서는 최치원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 고승들을 추모하는 큰비는 세속 고려왕조의 신성원리로서의 불교의 지위를 엄연히 상징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비문에는 이 신성원리를 담지한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묘사가 빈약한 국면에서 왕실 귀족의 기복 성향과 결합된 당시 불교 세속화의 한 단면이 드러나고 있다.

 이 시기의 시 작품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전기<최치원>의 삽입시와 주로 궁정에서의 송축을 목적으로 한 작품 몇 편이 있다. 장장 63句의 7언 기조장단구까지 그 가운데에 들어있는 난숙한 솜씨의 삽입시에 비하면, 궁정의 송축시 계열은 일반적으로 그 수준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그 시풍이 유미적인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궁정의 송축시들은, 뒷 시기에서도 그러했지만 주로 詠物의 형태로 지어졌다. 광종대 趙翼의<玄鶴頌>을 위시한 이들 영물체 송축시 계열은 대개 궁정에 있거나 헌상한 새·꽃·나무 등을 즉물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나서 송축적 의미의 서술로 결말짓는 것이 예사다. 따라서 감각적 섬세성이 이 계열 시들의 두드러진 풍격적 면모다. 이 감각적 섬세성은 이 시기의 시뿐만 아니라 그 뒷 시기의 시에도 일정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영물은 송축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때로 諷諫으로도 쓰였다. 최승조는 그의<東池新竹>에서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宸遊何必將天樂 임금님 노시는 데에 꼭 天樂으로만 할까,

自有金風撼玉聲 가을 바람에 이 대나무 절로 옥소리 내네.

 유학자 최승로는 그답게≪詩經≫에서의「美」뿐만 아니라「刺」까지도 아울러 실현해 보이고자 애쓴 듯하다. 고려의 궁정문학은 광종대부터 이미 시작되었거니와 최승로 같은 이가 따로≪禁中雜著詩藁≫를 엮었다는 데에서 그 創作·享受의 양적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한편 姜邯贊의 문집≪樂道郊居 集≫·≪求善集≫을 이룬 작품들은 이 문집의 제호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어쩌면 궁정시의 감각적 唯美風과는 다른 성향의 풍격이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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