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4. 문학
  • 4) 불교문학

4) 불교문학

 고려 전기에 크게 융성한 불교가 문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살피기 위해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방대한 저울이다. 교리를 두고서 논란이 거듭되었으니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다룬 내용도 만만치 않은 것이 한 시대의 풍조였다. 걸출한 승려라면 각기 자기 입장에서 불교의 이치를 서술하는 데 힘썼으므로, 무엇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교리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면서 글을 쓰는 태도나 방식이 어떻게 변했던가 살피는 것도 긴요한 과제이다.

 불교 교리를 둘러싼 논란은 문화 일반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어 있고, 문학론이 전개될 수 있는 서로 다른 근거를 갖추고 있었다. 균여는 한문과 우리말 사이의 간격을 깊이 의식했고, 의천은 사변적인 글과 문학작품이 서로 보완적인 구실을 해야 뜻하는 바를 다양하게 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특히 주목된다. 균여는 사뇌가를 짓고, 의천은 한시를 적지 않게 내놓았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의천을 일반 문인의 경우와 같이 문집을 남겼으니 작가로 다루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가 하면 선종쪽에서는 사변적인 글보다는 시를 더욱 숭상하는 풍조를 일찍부터 보여주고 있었다.

 의천(1055∼1101)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11세 때 출가해서, 13세 때 이미 祐世僧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31세 때에는 송으로 건너가 여러 교단의 사상 동향을 파악하고, 많은 문헌을 수집해 왔다. 이듬해에 귀국해 興王寺에 머물면서 그 목록을 작성하고, 1천여 부·4천여 권에 이르는 불교 제종파의 저작을 간행하는 데 힘쓰는 한편 천태종에 입각한 불교통합과 혁신운동을 일으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죽기 바로 전에 국사로 책봉되어 大覺國師로 널리 알려졌다. 의천의 저술은 불교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불교의 자료집성과 관련하여≪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는 이름의 목록이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화엄학의 총서인≪圓宗文類≫를 방대하게 엮었던 것 중에서 두 권이 남아 있으며, 고금 승려들의 문학을 모아≪釋苑詞林≫을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본집 20권과 외집 13권으로 이루어진≪大覺國師文集≫이 몇 권이 결본된 채 전하는데, 일반 문인이 지을 수 있는 시문이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며, 국제적인 교섭에 필요한 서신도 적지 않았고, 화폐 사용을 청한 논설도 있으며, 본집 권 17에서 권 20까지에는 시가 실려 있다. 이처럼 다방면에 걸친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대로 사상의 핵심을 찾으려 했다.

지극한 이치는 그윽하고 미묘해서 갖가지 주장이 복잡하기에 문답할 때 인용하기도 매우 어려운데, 더구나 근래에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종파의 무리들은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좋아해서 언설이 어지러우므로, 드디어는 祖師님네들의 그윽한 뜻이 막히어 어려워졌으니 敎觀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어찌 큰 병통이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대각국사문집≫서두에 실린<新集圓宗文類序>에서 의천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말한 지극한 이치는 圓宗 즉 화엄종의 이치이다.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야 하겠는데, 그 동안 지엽말단적인 것들만 늘어놓는 학풍이 성행해서 이치가 흐려졌다고 개탄했다. 이렇게 말한 데는 균여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교리를 풀이한 관점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지만, 저술의 문체가 또한 마땅하지 못하다고 했다. 의천은 자기 시대가 末法의 시대임을 여러 차례 말했다. 이치의 근본은 흐려지고 말만 번거롭게 된 것도 그 징후라고 생각했다. 화엄종이나 천태종이 장황한 이론을 늘어놓는 데 힘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의천도 그런 쪽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기 주장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번거롭고 장황한 것을 더 보태지 않으면서 핵심을 찾으려고 애쓴 것이 균여의 경우와는 반대되는 새로운 방향이다.

 균여는 義相의 맥을 이으려고 했는데, 의천은 元曉의 후계자가 되고자 했다. 멀리 경주 芬皇寺를 찾아가서 원효에게 제사를 지내는 글<祭芬皇寺曉聖文>을 지었다. 법을 구하는 사문 의천은 해동교주 원효보살에게 글을 올린다 하고서, 그 동안 풍속이 야박하고 어지럽게 되자 사람은 떠나고 도는 멸했으므로 끼친 가르침을 이을 수 없었다고 했다. 원효가 나서서 백가가 다투는 실마리를 화합시키고 일대의 공정한 논의를 내놓던 것을 찬양하고, 수많은 고승의 저술을 두루 보았으나 원효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했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말했다.

미묘한 말씀이 그릇됨을 슬퍼하고 지극한 도가 쇠잔함을 애석히 여겨, 멀리 이름난 산을 찾고 없어진 책을 두루 구하다가, 지금은 鷄林의 옛 절터에서 다행히 살아 계시는 듯한 모습을 우러르고, 鷲嶺의 옛봉우리에서 그 때의 법회를 만난 것 같습니다.

 원효의 疏에 따라≪金剛經≫을 강하고 나서 지었다는<依海東疏講金剛經慶而有作>에서도 원효를 찬양했다. 불법을 닦자는 것은 의혹을 없애기 위함인 데 그 동안 수많은 책을 공부했으나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원효를 만나 비로소 찾았다는 감격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의로운 말씀은 글을 꾸미지 않아도 불심에 맞나니,

분황사 스님이 풀이하신 바에 따라 경의 뜻을 찾으리.

거듭 나기만 하며 외로이 어두운 밤을 헤매다가,

오늘 만남은 겨자가 바늘을 만나듯 기적이로다.

 

義語非文契佛心

芬皇科敎獨堪尋

多生孤靈冥如夜

此日遭逢芥遇針

 그러나 원효의 민중불교를 잇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왕실불교·국가불교를 재건하면서 지나친 폐쇄성을 극복하고 가능한 대로의 포용성을 가지고자 한 것이 기본방침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통합의 노선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화엄종을 새롭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태종을 일으키고자 할 때 의도한 바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깨달음의 단계가 낮을 수밖에 없다고 천시되는 무리까지 명분상으로 끌어들여 보살이 따로 없다고 하고, 수행방식으로 이치를 따져 공부하는 것과 함께 참선에도 힘을 쓰자 하고서 圓融·會通의 고답적인 논리를 마련했다.

 의천의 주장은 敎觀幷修라는 말로 요약된다. 敎라고 하는 이론과 觀이라고 하는 실천, 교종에서 힘써 하는 공부와 선종에서 내세우는 수행을 함께 해야 비로소 그 어느 쪽에서도 막히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의 상황을 보더라도 귀족불교를 누르고 국가불교를 이룩하는 데 선종과의 제휴가 절실하게 요망되었다. 천태종의 교리가 이미 그런 방향을 택했으며,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도 새로운 길을 여는 결단이 촉구되었다.

法은 말이나 형상이 없지만, 말이나 형상을 떠난 것은 아니다. 말이나 형상을 떠나면 미혹에 빠질 것이고, 말이나 형상에 집착하면 진실을 모를 것이다. 다만 세상에는 온전한 재능이 없고, 사람은 온통 아름답기 어렵기 때문에 교리를 배우는 사람은 흔히 마음속은 버리고 밖의 것만 구하고 참선을 익히는 사람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버리고 마음속만 밝히고자 하니, 이것은 둘 다 지나친 고집이며 두 변두리에 머무르는 짓이다. 마치 토끼뿔이 길다느니 짧다느니 다투고, 허공의 꽃이 짙다느니 옅다느니 하며 싸우는 것과 같은 노릇이다.

 <講圓覺經發辭>두번째 글 서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이 어느 한쪽만으로는 온전할 수 없는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교관병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풀어 밝혔다. 이 비슷한 말을 후대 사람들도 흔히 했는데, 시초는 바로 의천이다. 나중에 知訥이 선종의 견지에서 교종까지 아우르고자 한 주장은 이와 상통하는 바 있으면서 강조점이 달라졌다. 의천은 온통 이론만 논술하는 글을 남기던 단계와 역설이나 비유에 가득찬 연설을 애용하며 시를 중요시하던 단계의 중간 위치에 선다고도 할 수 있다.

 이치를 논술하는 데만 힘쓰는 불교는 말이 진실을 담을 수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따금씩 지적하더라도 논리적 사고에 의한 산문에 의지했다. 그런데 법이 말이나 형상을 떠난 것이라고 하자면 자연 논리적 사고의 산문으로는 불편을 느끼게 된다.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을 부득이 말로 나타내자면 시가 더 적합하다. 의천이 적지않은 시를 남겼던 이유는 일반 문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추었던 데만 있지는 않다. 산문에다 담을 수 없는 미묘한 무엇을 시로 표현했다고 보면,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불교적인 상징과 시의 짜임새가 얽혀서 빚어내는 효과를 더욱 주목하게 된다.

고요하게 만물을 다 비추는 바요,

무수한 세계마다 커다란 도량이다.

나는 바로 敎를 전하기에 급하고,

그대는 또한 참선하기에 바쁘다.

참된 뜻을 얻으면 둘 다 아름답겠으나,

정을 따르면 양쪽이 상처를 입는다.

원융함에 어찌 취하고 버릴 것이 있으리,

법계가 바로 내 고향이 아닌가.

 

海印森羅處

塵塵大道場

我方傳敎急

君且坐禪忙

得意應雙美

隨情卽兩傷

圓融何取捨

法界是吾鄕

 교를 전하는 입장에서 참선하는 사람에게 준 시이다. 제목을<寄玄居士> 라고 했는데, 현거사는 선종의 승려가 아닌가 한다. 교종과 선종이 각기 자기대로의 길만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 데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작품의 짜임새는 그 이상의 표현 효과를 갖추고 있으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여덟 줄인 五言律詩인데, 두 줄씩 짝을 이루는 것이 묘한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다. 처음 두 줄은 무리하게 지적하면 진리가 무한하다는 것을 말했다. 그 다음 두 줄은 자기와 상대방이 각기 다르게 택한 일을 하기에 바쁘다고 했다. 세 번째로 자리잡은 두 줄은 자기나 상대방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마지막 두 줄은 생각을 바꾼다면 누구나 무한한 진리와 합치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네 부분이 아무런 설명적 연결이 없이 서로 대립되고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미처 말하지 않은 뜻이 숨어 있다.

 각자 자기대로의 길을 주장하며 바쁘게 움직일 것은 아니다. 혼자서 성패를 가늠할 것이 아니라 무한한 진리와 합치되어 法界가 바로 내 고향이라는 데 이르러야 한다. 이 시가 뜻하는 바는 다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무한한 진리라는 것은 교종에서 맡아 풀이하니 종파 사이의 다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길을 의천 역시 교종의 입장에서 찾았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무한한 진리라고 한 것과 합치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다시 문제된다. 그런 것을 구태여 내세우지 않는 선종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막을 도리는 없다.

한가하기만 한 듯이 뜻을 세우지 않고,

광음마저 아낄 줄 모른다면야.

경이며 논이며 닦는다고 말은 하지만,

담벼락이나 바라보고 있는 줄 어찌 알리.

 

悠悠無定志

不肯惜陰光

雖曰攻經論

寧知目面墻

 그런데 위의<自誡>라고 제목을 붙여서 자기 자신을 경계한 시에서는 말이 달라졌다. 법계가 내 고향이라는 이론만 되풀이해서야 담벼락이나 바라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 스스로 뜻을 세워야 하니 과제가 만만치 않고, 다시 초조해진다. 의천은 세상을 온통 바로잡고자 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기 마음을 정하는 것이 더욱 다급했다. 그래서 논설도 펴고 시도 지었다. 시는 불교계의 범위를 벗어나서도 널리 평가되었을 만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의천의 뒤를 이은 이름난 제자는 戒膺과 惠素였다. 계응은 국사의 시호를 받아 無碍智國師로 알려져 있다. 의천의 뒤를 이어서 천태종을 펴는 데 전념했다고 하지만, 興王寺에 머물지 않고 멀리 覺華寺에 들어갔다. 흥왕사의 승려가 찾아가 배우다가 떠날 때 지어준 시가 전한다. 예종이 불러서 대궐로 오게 되었는데, 시를 지어 소나무와 학과 벗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장에 갇힌 새처럼 되었다고 한탄하고,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호소했다. 해소는 김부식과 특히 가까운 사이였고, 서로 화답한 시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의천의 후계자가 두 파로 나뉘었음을 말해준다. 의천이 국가불교를 수립하겠다는 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귀족불교가 아닌 왕실 불교가 따로 있기 어려웠다. 의천이 희망했던 바를 불교적인 논리 자체에서나마 살리자면 타협을 거부하고 차라리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계응은 그 길을 택했던 것 같다. 의천이 이룩해 놓은 교단의 세력을 그대로 지니고자 하면, 문벌귀족과 제휴를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도 짐작된다. 혜소는 그런 쪽이 아니었던가 싶다.

 ≪破閑集≫에는 계응과 혜소의 시를 함께 실어놓아서 흥미롭다. 둘 다 오늘날의 강원도 홍천군에 자리잡고 있던 寒松亭을 찾아서, 신라 때의 4仙이 거기서 놀 적에 3천 명의 무리가 한 그루씩 심었다는 솔숲을 두고 지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은 자못 딴판이다.

그 옛날 어느 집 자제가,

삼천 그루나 푸른 솔을 심었던가.

그 사람의 뼈야 이미 썩었겠으나,

솔잎은 오히려 무성하기만 하다.

 

在昔誰家子

三千種碧松

其人骨已朽

松葉尙茸容

 이것은 계응의 시다. 그 곳에다 솔을 심은 사람이 누구든 죽어 없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당연하다고까지 했다. 구태여 뼈가 이미 썩었다는 끔찍스러운 말까지 했다. 없어지고 만 것에 대한 회고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끝난 바에 집착하지 말고, 높은 지위에 힘입어 어떤 형태로든지 삶을 연장시키려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만 푸르게 무성한 소나무와 같은 보람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 같다.

아득한 시절에 놀던 신선은 멀리 갔어도,

푸르고 푸른 소나무 홀로 남았도다.

오로지 샘물 밑에 달이 있어서,

방불하게 그 모습 상기하게 한다.

 

千古仙遊遠

蒼蒼獨有松

但餘泉底月

髣髴想形容

 이것은 혜소의 시이다. 멀리 가고 없는 신선을 흠모하며, 그 모습을 다시 찾고자 했다. 소나무만으로는 부족해 우물 밑에 비친 달까지 찾아내서 위대한 인물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자 했다. 두 작품을 함께 소개한 李仁老는 계응의 시가 天趣를 자연스럽게 나타낸 것을, 혜소의 시가 비록 짜임새가 있기는 하지만 따를 수 없다고 했다. 천취란 애써 찾거나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나는 생각이자 표현이다. 이 두 사람, 그 가운데서도 계응은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의천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아무리 불교적인 내용을 갖추고자 하는 것이라도 불교적인 상징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절실한 느낌을 나타낼 수 없고, 관념적인 문구에 매이게 된다. 이런 폐단을 적극적으로 타파하자면, 선종에 의한 자기 각성이 필요했다. 계응도 그런 맛을 풍겼지만, 坦然(1070∼1159)은 한층 더 신선한 경지를 열었다. 탄연은 선종의 승려였다. 그 동안 선종이 궁지에 몰렸던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禪門九山으로 분열되었다가, 왕실불교 또는 국가불교를 표방하는 교종 때문에 다시 위축되었고, 문벌귀족과 제휴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밀려나 있었다. 선종을 다시 일으킬 만한 고승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탄연만은 선종도 왕실과 가까울 수 있음을 입증해서, 大鑑國師라는 시호를 얻기까지 했다.

 탄연은 사상적인 활동이 알려져 있지 않고, 명필로 이름을 얻었으며, 격조 높은 시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선종에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각성을 사상적인 논설로 펴기보다는 예술적 감각으로 표현하는 데 더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기에 오히려 설명을 하거나 무엇을 주장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시를 지어 나타내려고 했다.≪補閑集≫에 전하는<文殊寺>를 들어보기로 한다.

방이 하나 어찌 밝고 큰지,

온갖 시름이 모두 잠잠해 지네.

길은 돌구멍을 뚫어 통하고,

샘물은 구름 근원을 질러 떨어지네.

횐 달이 처마 기등에 걸려 있고,

서늘한 바람 숲 골짜기를 움직이네.

누가 저 윗사람을 따라,

맑게 앉으며 참 즐거움을 배우리.

 

一室何寥廓

高緣俱寂寞

路穿石罅通

泉透雲根落

皓月掛簷楹

凉風動林壑

誰從彼上人

淸坐學眞樂

 언뜻 보면 절간 풍경을 읊었다. 절에 가니 높은 스님을 따라 배우자고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어느 말이거나 그 자체로서 생동하는 맛을 지니면서 은근하게 풍기는 바가 놀랍다는 것을 알아야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이다. 방이 밝고 커서 온갖 시름을 잠잠하게 한다는 대목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묘사한 것이면서 높은 스님의 정신세계를 암시했다. 절에 이르자면 돌구멍을 뚫어 통하는 길을 거쳐 샘물이 떨어지는 데를 가로 질러야 한다는 말도 험난한 편력을 아울러 나타냈다. 흰 달이며, 서늘한 바람이며, 툭 틔였으면서 소박하기만 하다. 참 즐거움은 새삼스럽게 배워야 할 무엇이 아니고, 시를 제대로 읽으면 저절로 알 수 있다.

 탄연이 활동하던 시기인 예종 때에는 예종 자신이 선종과 노장사상에 적지 않게 심취했고, 郭輿라던가 李資玄이라던가 하는 사람들도 귀족불교의 엄격한 제약에 진저리가 났음인지 참선을 하고 신선을 찾았다. 그러면서 어디든지 매이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시로 나타냈다. 그러나 이러한 기풍은 정신적 사치이거나 자랑삼아 하는 도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참선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른 경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탄연의 시는 그 시기의 선종 취향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야단스러운 데라고는 도무지 없기에 이채롭다.

<趙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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