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5. 미술
  • 1) 건축
  • (3) 가람 배치

(3) 가람 배치

 고려시대 전기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왕과 고승·귀족에 의한 창사가 많았는데, 뚜렷한 기록이 없는 더욱 많은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믿어진다. 또 이 시기에 창건된 사찰의 遺址도 얼마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사찰유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몇몇 寺址 이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가람 배치에 관한 이 시기의 보편적인 실태는 잘 알 수 없다.≪고려도경≫의 사찰에 관한 기록 속에도 가람 배치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단지 安和寺는 산지에 건립되어 본전인 無量壽殿에 이르는 사이에 많은 문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산지가람인 듯하다. 廣通普濟寺(演福寺)는 평지가람으로 본전인 羅漢寶殿 옆에 5층탑을 세웠고 나한보전 뒤에 승방을 둔 가람이나, 회랑에 관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 가람 배치가 신라의 高仙寺와 같이 金堂院과 塔院을 좌우로 병치한 것인지 또는 일본의 法隆寺 西院伽藍과 같이 회랑에 둘러싸인 공간 안에 동쪽에 금당, 서쪽에 탑을 배치한 가람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서는 발굴 조사되어 그 가람 배치의 모습을 알게 된 몇몇 사지에 대해 개관함으로써 고려시대 전기의 가람 배치를 살피도록 하겠다.

 佛日寺:불일사는 광종 2년(951)에 모후 劉氏의 원당으로 창건되었으며, 그 유지는 북한 板門郡(경기도 개풍군) 山蹟里 佛日洞의 寶鳳山 남록 비교적 넓은 대지 위에 있다. 유적의 발굴은 1959년에 실시되었다. 寺域은 동서 약 230m, 남북 115m이며 동서 세 구역으로 구획된 중앙과 동구는 북으로 더욱 확장되어 최북단 건물지까지는 175m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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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3>佛日寺址 伽藍圖
<도판 3>佛日寺址 伽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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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구 가람은 남으로부터 중문·석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 중심에서 서쪽 약 32m 떨어져서 서회랑지가 있었다. 회랑 남단에는 서문지가 있고, 북으로는 강당 옆까지 계속되고 그 북쪽에는 또 한 구역의 회랑에 둘러싸인 건물지가 있었다.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나 그 양쪽 끝에 큰 홈이 있는 판석이 있었다. 석탑은 높이 7.94m의 이중기단 위에 선 5층탑이나 지금은 개성 시내에 옮겨졌다고 한다. 금당은 탑 주변보다 약 2m높은 곳에 있었고, 기단은 정면 25m, 측면 17m이고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보인다.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이었다.

 서쪽구역의 가람은 중앙구보다 낮게 놓였으며, 여기에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 있는 회랑에 둘러싸인 공간 중앙에 정·측면 3칸의 건물이 있고, 북회랑 중앙에는 평면 장방형의 건물이 있었다. 또 이 구역 서남쪽에는 담장에 둘러싸인 舍利壇이 있었다. 동쪽 구역은 중앙 구역과 담장으로 구획된 것 같으며, 그 북방부에서 여러 건물지가 노출되었으나, 파괴가 심하여 그 규모·배치 등을 알 수 없었다.542)水谷昌義,<高麗佛日寺の調査硏究>(≪朝鮮學報≫110, 1984).

 興王寺:흥왕사는 문종 원년(1067)에 창건되었으며, 그 유지는 開豊郡 鳳 東面 興王里에 있다. 1948년에 간단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이에 의하면 가람은 중심곽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두 개씩의 또 다른 가람을 갖는 형식의 사찰이었다. 중심곽은 동쪽과 서쪽에 평면 8각의 목조탑을 배치하고, 그 뒷쪽 중앙에 금당, 금당 뒤에 규모가 큰 강당을 배치하였으며, 탑 남쪽 중앙에 있는 중문에서 동서로 뻗은 회랑이 북으로 구부러져서 강당 좌우 앞쪽까지 확인되었다. 중심곽 좌우에는 역시 문과 법당이 배치된 별도의 가람이 있었으나, 그들 건물에 대한 상황은 조사가 충분치 못하여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543)黃壽永,<高麗興王寺址의 調査>(≪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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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興王寺址 伽藍圖
<도판 4>興王寺址 伽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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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萬福寺:만복사지(<도판 5>)는 南原市 玉亭洞의 해발 285m의 麒麟山 남쪽 기슭에 있다. 사찰의 창건은 문종대(1047∼1083)로 알려져 있으나544)≪新增東國輿地勝覽≫권 39, 南原 佛宇. 신라 말의 道詵에 의해 창사되었다는 말도 전한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신라 말에 창건된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고, 고려 초기로 보이는 유물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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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5>萬福寺址 伽藍配置 推定圖(정유재란 전)
<도판 5>萬福寺址 伽藍配置 推定圖(정유재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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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에 대한 발굴은 1979년부터 수차에 걸쳐서 寺址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발굴결과 건물의 배치는 현 寺域 남단 중앙부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었고, 중문 좌우에는 복랑으로 된 회랑이 동·서로 뻗었으나, 동회랑과 서회랑 및 북회랑은 확인되지 않았다. 중문 뒤에는 정·측면 5칸의 목탑지가 있어 그 기단은 일변 13m 정도로 추정되었다. 탑 서쪽에는 남향한 법당지(서금당)가 원래부터 기단 일부와 기단 위의 큰 석조불상대좌가 노출되어 있었고, 기단은 동서 24.7m, 남북 19.2m이며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었다. 탑 동쪽에도 역시 남향한 법당지(동금당)가 있었고, 건물은 정·측면이 3칸인 방형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탑 북쪽에도 정면 5칸, 측면 4칸인 법당지(북금당)가 있었으며, 이 건물 북쪽에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기단이 동서 29.8m, 남북 20.85m의 비교적 규모가 큰 강당지가 있었다. 이 밖에도 강당 서쪽이나 사역 동변 중앙부 등에 건물지가 있었고 동금당 뒤에는 5층석탑이 섰고, 다시 그 북쪽에 석불상이 있다. 이와 같이 사지에 대한 발굴 결과는 후대의 개조·변화 등으로 매우 혼란된 상태였다. 그러나 가람의 중심부는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각각 남향한 금당 또는 금당적인 법당을 배치하고 그 뒤에 강당을 배치한 것이 이 사찰의 기본 형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545)≪萬福寺 發掘調査報告書≫(全北大博物館, 1986).

 위와 같이 몇몇 고려 전기에 창건된 사찰 유지의 발굴을 통해 가람 배치의 모습을 대강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여러 구획이 병치된 가람이 많고, 또 그러한 구획 가운데 중심구획의 가람이 전통적인 가람 배치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형식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람이 다구획으로 된 것은 고구려의 定陵寺, 백제의 彌勒寺, 신라의 皇龍寺 등에서 볼 수 있었으나, 정릉사의 경우는 과연 창건 때부터 그러했는지 의문이다.546)金正基,<高句麗定陵寺址 및 土城里寺址發掘報告槪要와 考察>(≪佛敎美術≫10, 1991), 19∼22쪽. 또 미륵사의 경우에도 세 구획의 가람이 각각 같은 형식으로 세 미륵을 한 구씩 본존으로 봉안했기 때문에 나타난 형식이며,547)≪彌勒寺≫(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9), 488∼489쪽. 황룡사의 창건 가람은 궁을 사찰로 바꾸는 데서 나타난 모습으로 생각된다.548)≪皇龍寺≫(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4), 371∼372쪽. 따라서 이들 모두 고려 전기의 사찰의 경우와 같은 이유로써 나타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오히려 통일신라의 佛國寺 가람 즉 동쪽에 전통적인 쌍탑식 가람을 두고, 서쪽에 원당을 나타내는 極樂殿 일곽을 배치한 형태가 더욱 발전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중심곽의 가람 배치의 형식은 불일사의 경우 탑 좌우에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있으나, 그 기본은 백제의 기본적인 가람 형식인 1탑식 가람배치로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흥왕사의 경우 탑의 형식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탑 형식인 평면 8각의 탑이나, 가람은 통일신라에서 보편화된 쌍탑식 가람 배치였다. 만복사는 탑의 평면이 방형이며 동·서 금당이 남향했다는 변화는 있으나, 고구려의 기본적인 가람 형식인 1탑 3금당식 가람 배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고려 전기의 평지 가람에 속하는 사찰은 그 사찰에 따라 백제, 신라, 그리고 고구려적 요소를 띠고 있으며, 지금 단계로서는 뚜렷한 고려적 가람 배치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여러 구획의 가람이 병치된 사찰이라는 것이 고려 사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도 안화사의 경우와 같이 산지가람이 있었음이 짐작되나, 그것의 건물 배치형식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에 일반화 된 것으로 보이는 一柱門을 지나 四天王門, 樓閣을 지나 본당이 지형에 따라 배치되는 형식이 이 시기에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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