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5. 미술
  • 1) 건축
  • (4) 목조건축

(4) 목조건축

 고려 전기에 건립된 목조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얼마간 남은 고찰 자료들을 바탕으로 추정할 수 있는 신라 목조건물의 모습과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鳳停寺 極樂殿의 건물 모습을 바탕으로 당시의 중국이나 일본의 건물을 참고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신라의 목조건물에 관해서는 寫經表裝에 그려진 佛殿圖와 雁鴨池에서 출토된 목조건물의 부재 및 석조건물에 나타난 목조건축적 요소 등과 중국·일본의 목조건물을 참고하여 고찰한 연구가 있다.549)金東賢,<木造建築樣式>(≪考古美術≫163·153, 1987), 84∼86쪽.

 이에 의하면 기둥은 배흘림이 있는 圓柱로, 斗栱은 柱頭 위에 檐遮를 끼워 첨차 끝과 중앙에 小爐를 올린 平三斗形 두공과, 一出目의 상두형 두공이 있고, 또 주두 위에 첨차형 부재만을 올린 일본에서 말하는 ‘후나히지키〔舟肘木〕가 있다. 주두나 소로의 모습은 굽의 단면이 뚜렷한 弧形으로 만들어졌고, 첨차 끝은 翹頭形으로 처리되었다. 건물 軸部나 屋蓋架構는 중국이나 일본과 큰 차이가 없고, 內陣과 外陣의 기둥 높이가 같은 경우와 내진 기둥을 높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보는 대들보와 퇴보가 있었으나, 덧보의 사용 여부는 확실치 않다. 기둥 사이에는 人字形 台工과 童子 台工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고, 처마는 홑처마와 겹처마가 있었고, 서까래는 圓材로, 부연은 角材로 만들고, 귀는 扇子椽으로 만들었다. 천장은 架構되었으며 격자천장이 많았고 外周가 경사지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붕은 맞배·우진각·팔작 지붕의 여러 형태가 있었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목조건물은 중국 당대의 건물이나 일본 奈良時代의 건물과도 상통되고, 일본의 소위「和樣」라고 불리우는 건축양식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 건물과 이상에서 추정한 신라의 건물을 비교하면 보의 형태는 어느 쪽에 속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뚜렷한 배흘림이 있으면서도 가는 기둥이나 주두와 소로의 굽이 反曲된 곡면으로 만들어진 점, 그리고 주간 昌防, 중앙에 가구된 대공이나 대들보 위에서 덧보를 받치는 包台工과 덧보 중앙에서 마루도리를 받치는 마루대공 등의 형식이 인자형 대공의 발전 형식이라는 점, 그리고 전체 가구형식은 얼마간의 변화는 있었을 것이나 신라의 목조건물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천장가구가 없는 연등천장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구한 경우에는 천장에 가리우는 옥개 가구재는 장식적 의장이 가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기둥 위에 놓인 두공과 창방 중앙에 놓인 변형 인자형 대공 위에 가로로 길게 걸쳐진 뜬장혀는 일본의 唐招提寺 강당과 흡사하고, 옥개 가구형식은 일본의 當麻寺 본당의 가구와 매우 닮았다. 이와 같은 여러 특징은 고려시대 전기에 건립된 목조건물이 신라의 목조건물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던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봉정사 극락전의 건물에서 두공의 첨차 끝을 교두형으로 바꾸면 거의 그대로 고려 전기에 건립된 목조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봉정사 극락전은 사찰의 법당 가운데서도 규모가 작은 건물에 속하며, 고려 전기에는 이보다 훨씬 큰 법당 건물도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궁궐 건물 가운데는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이 건립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 건물의 모습이나 가구 방식은 좀더 다양하고 변화도 많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金正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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