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5. 미술
  • 3) 서화
  • (1) 회화

가. 일반회화

 고려 전기의 일반회화는 개국 초부터 정종대(1035∼1046)까지와 문종대(1047∼1083)에서 의종대(1147∼1170)까지의 2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550)洪善杓,<고려시대의 일반회화>(≪韓國美術史≫, 藝術院, 1984), 281∼287쪽. 건국 초기의 약 1세기는 새로운 왕조 운영의 정치이념으로 대두된 유학적 규범과 의식의 보급에 관련된 교화적 성격의 인물화와 초상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이 분야 발전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러한 초기의 회화 상황과 관련하여 먼저 주목되는 것은, 태조 왕건이 타계하기 한 달전인 태종 26년(943) 4월에 뒷날 제왕들의 귀감으로 삼게 하기 위해 유훈으로 남긴「訓要十條」이다. 태조는 훈요의 마지막 10조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한 바 있다.

나라와 집안을 다스리는 자는 자숙하고 계신하여 후환을 없게 하며, 널리 歷史를 보고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해야 하느니라. 周公과 같은 큰 성현도<無逸篇>을 成王에게 지어 바쳐 훈계하였으니 마땅히 이 내용을 그려 붙여 출입할 때마다 보고 觀省토록 하라(≪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여기서 그림으로 묘사하여 觀省의 자료로 삼으라고 한≪書經≫의<무일편>은 군왕으로 하여금 농사의 힘듬과 백성들 생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안일에 빠지지 말 것과 상벌을 바르게 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유교적 王道論의 전거이면서 또한 고려시대를 통해 가장 강조된 경서의 편명이었다.551)尹南漢,<儒學의 發達>(≪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6), 230쪽. 無逸圖는 이러한 내용들, 즉 농사 장면을 비롯한 백성들의 생활을 소재로 그린 鑑戒的 民生圖의 일종으로 豳風圖와 함께 조선시대 풍속화 발달의 근간을 이루었던 화제였다.552)洪善杓,<朝鮮時代 風俗畵 發達의 理念的 背景>(安輝濬 감수,≪風俗畵≫, 중앙일보사, 1985), 182∼187쪽. 이와 같은 회화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무일도가 태조의 유훈에 따라 통치계층의 수신을 위해 건국 초기부터 다루어지기 시작하면서 교화적 인물화의 전통 형성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治國의 이념으로 대두된 유학의 진흥에 따라 새로운 흐름을 보이기 시작한 초기의 이러한 회화 경향은 왕과 왕비의 眞影을 비롯하여 공신과 같은 선행자의 초상 제작의 사례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태조 23년 新興寺에 功臣堂을 세우고 그 동서 벽에 삼한공신들의 초상을 그린 것이라든지, 鳳進寺 大影殿 동서 벽면의 37공신상과 12장군상, 현종 22년(1031) 이전에 왕과 왕비의 진영을 봉안해 두는 眞殿인 景靈殿의 설립과 서민계층에서 부모의 형상을 그려놓고 제사지내는 풍조를 성종 9년(990) 효행이라하여 장려했던 사실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553)高裕燮,<高麗畵跡에 對하여>(≪韓國美術文化史論叢≫, 通文館, 1974), 235∼239쪽. 그리고 국자감 안에 공자의 사당인 문묘를 갖추고 그 벽에 정종 2년(983) 任老成이 송으로부터 가져온 文宣王 廟圖에 의거하여 각 성현들의 유영을 모셨던 사실도 이러한 초상화 발달의 배경을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554)朴性鳳,<國子監과 私學>(≪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6), 178∼180쪽.

 이와 같이 초상화는 교화와 享祀의 목적을 띠고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경향이 더욱 확산·성행되면서 우리 나라 인물화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이 한 점도 없어 당시의 초상화풍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이 어렵지만, 8세기 무렵을 전후하여 활동했던 率居를 중심으로 완성된 應物象形에 의한 形似的 기법의 계승과 초상화의 傳神寫照論의 영향 등을 통해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이런 인물·초상화 이외에 耽羅火山圖와 같이 특이한 자연경관을 사생한 실경도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탐라화산도는 목종 5년(1002) 제주도 화산작용으로 바다 가운데서 새롭게 솟아난 산의 모습을 목종 10년 6월에 태학박사인 田拱之(?∼1014)가 직접 가서 그려온 것으로 瑞山圖라고도 했다.555)≪高麗史節要≫권 2, 목종 10년 6월.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8, 古跡, 瑞山.
≪高麗史≫권 94, 烈傳 7, 田拱之.
이 그림은 충숙왕 4년(1317) 정월에 魏王館의 서리 낀 벽돌 담에 해가 비쳐 모란꽃과 같이 찬란한 모습을 이루자 곧 화공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그리게 했던 사실과 함께 자연의 특이한 모습을 담은 것으로, 고려 전기에 특히 성행했던 災異祥瑞思想, 즉 天變地異의 자연현상을 통해 정치의 성과를 가늠하고 위정자의 修省의 자료로 삼고자 했던 조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556)秦榮一,<≪高麗史≫五行·天文志를 통해 본 儒家秩序槪念의 分析>(≪國史館論叢≫6, 國史編纂委員會, 1989). 감계적 의미를 지니기도 했던 이러한 실경도는 성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라 실경산수화 발생 초기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특이한 자연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자세하게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사실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회화는 고려 초기를 통해 주로 실용적인 기능을 지닌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왕권의 안정과 문신귀족체제의 확립에 따라 문운이 극성을 부리던 문종대에 이르러 왕공·문신귀족들의 翰墨風流的 취향에 힘입어 餘技的 문인화가의 출현과 감상화의 본격적인 대두 등, 새로운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이 시기를 통해 전래되기 시작했던 북송의 그림과 회화사조의 자극을 받으며 활기를 더해 갔다.

 특히 고려왕실과 문신귀족들이 송대의 崇文的 문화와 동질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선진화 의욕에서 비롯된 중국회화의 유입현상은 문종 26년(1072) 두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가 본격적으로 재개되면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557)安輝濬,<高麗 및 朝鮮王朝初期의 對中繪畵交涉>(≪亞細亞學報≫13, 1979), 143쪽.문종이 국교회복 이듬해인 문종 28년 정월 太僕寺의 卿으로 있던 金良鑑을 사신으로 보내어 중국 그림들을 사들이고 또 화공들을 구하고자 했던 사실이라던가, 2년 뒤인 문종 30년 8월 공부시랑 崔思諒(?∼1092)을 송에 보낼 때 솜씨가 뛰어난 화공들 여러 명을 딸려 보내 相國寺의 벽화를 모사해 오도록 했던 일 등은 중국회화 유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던 당시의 동향을 알려주는 좋은 예들이다.558)郭若虛,≪圖畵見聞志≫권 6, 高麗國. 여기서 郭若虛는 崔思諒을 崔思訓으로 誤記해 놓았다. 북송의 神宗(1067∼1084)도 고려의 이러한 열의에 부응하여 그 당시 화원의 총수로서 이름을 날리던 郭熙의 秋景圖와 烟嵐圖 2폭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다.559)郭熙·郭思,≪林泉高致集≫, 畵記.

 중국 회화의 유입은 북송이 멸망하기 직전의 徽宗 재위기(1096∼1125)이 해당하는 예종과 인종대에 더욱 증가되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법화와 명화들이 들어오기에 이른다.560)李仁老,≪破閑集≫권 中, 鳳城北洞 安和寺. 政和년간(1111∼1117)대 송나라에 갔던 金富軾(1075∼1151)은 휘종으로부터 太平睿覽圖 2책과 함께 春郊耕牧圖·奇峰散綺圖·筠莊縱鶴圖·夏景豊稔圖 등을 宣示받고 그 秋成欣樂圖를 선물로 받아 왔으며, 예종 원년(1116) 7월에 파송되었다가 다음 해 5월에 돌아온 李資諒도 많은 서화를 가져 왔다.561)金富軾,<謝宣元太平睿覽圖表>(≪東丈選≫권 35).
韓致奫,<海東繹史≫권 46, 藝文志, 畵 寧和記聞.
≪高麗史節要≫권 3, 예종 11년 7월·12년 5월.
특히 이자량이 가져온 서화는 같은 해 6월에 궁궐 안에 天章閣을 설치하고 간직케 했으며, 뒤에는 이러한 서화들을 寶文閣과 淸讌閣에도 보관하였다.562)金綠,<淸讌閣記>(≪東文選≫권 64).

 인종 원년(1123) 중국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문인화가 徐兢이 자신들을 접대하는 館伴官들을 숙소에 초청하여 좌석 사방에 각종 법서와 명화들을 늘어놓고 좋아하는 것에 따라 원하는 대로 적어주었다고 적어놓은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화의 전래는 고려를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서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듯하다.563)徐兢,≪高麗圖經≫권 26, 館會. 그리고 이러한 공식통로 외에 당시 성황을 이루었던 양국간의 해상무역을 통해서도 상당량의 중국회화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와 같이 전래된 북송대의 中國畵蹟은 당시 고려회화의 수준 향상에 적지않은 자극제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송의 郭若虛가 1076년에 완성한≪圖畵見聞志≫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고려의 著色 山水圖 4권과 本國八老圖 2권, 行道天王圖 등이 華風에 점차 물들면서 기법이 정교해졌다고 했던 평은 이러한 두 나라 사이의 회화관계를 말해주고 있다.564)郭若虛,≪圖畵見聞志≫권 6, 高麗國. 그리고 문종 년간부터 유입되기 시작했던 곽희파 화풍은 이 시기뿐 아니라 조선 초기까지의 우리 나라 산수화 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종 즉위 초부터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곽희의 화풍은 그의 작품의 직접 전래와 함께, 그가 상국사의 서벽에 그렸던 溪谷平遠圖 등을 고려 화공이 이곳의 벽화를 모사해 옮기면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북송의 수도 汴京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상국사에서 모사해 온 벽화는 문종이 정성을 쏟아 창건한 興王寺 벽에 옮겨 그려졌다.565)徐兢,≪高麗圖經≫권 17, 王城內外諸寺. 그런데 이와 같이 옮겨진 그림들 중에는 불교회화와 함께 10세기 후반경 高益과 燕文貴가 그렸던 山水樹石圖라던가, 1065년의 큰 홍수로 피해를 입고 새로 보수하면서 그려진 곽희의 산수도와 같은 일반회화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66)相國寺의 畵蹟에 대해서는 鈴木敬,≪中國繪書史≫上(吉川弘文館, 1981) 231∼260쪽 참조. 그리고 당시 변경의 궁전과 각 관아에는 곽희를 중심으로 제작된 벽화와 병풍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송에 파견되었던 사신과, 수행한 화공들은 그림을 직접 볼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도 그와 그의 계파의 화풍이 수용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11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御製秘藏詮版畵는 불교판화이긴 하지만 당시의 산수화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도판 1>). 웅장하게 표현된 기암의 산모습과 주머니 모양의 공간 구성, 三遠法의 활용, 산봉우리의 細形針樹, 산허리에 돋아난 齒形突起 등은 關同, 范寬에서 곽희로 이어지는 북송대 巨碑派 산수화풍의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판화를 통해 표출된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기법은 당시의 고려 산수화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말해 주기도 한다.567)安輝濬,<韓國山水畵發達硏究>(≪美術資料≫26, 1980), 18∼19쪽.
李成美,<高麗初雕大藏經의 御製秘藏詮版畵-高麗初期 山水畵의 一硏究>(≪考古美術≫169·170, 1986), 27∼32쪽.

확대보기
<도판 1>御製秘藏詮版畵(권 6, 제2도 부분)
<도판 1>御製秘藏詮版畵(권 6, 제2도 부분)
팝업창 닫기

 한편 문종년간부터 활발해진 북송과의 문화교류를 통해 蘇軾(1036∼1101) 등의 문인화론에 바탕을 둔 시화일치사상과 여기적 회화관이 일차 전래되어 왕공 및 문신귀족들 사이에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풍조를 싹트게 하면서 문인화가가 출현하였다. 헌종은 9세부터 서화를 좋아하여 왕위에 오르고도 이를 익히는데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하며, 인종은 음률과 서화를 잘했고, 또 문종의 증손인 安平公 王璥과 현손인 廣陵公 王沔도 서화에 뛰어났었다고 전한다.568)≪高麗史節要≫권 6, 헌종 원년·권 10, 인종 24년·권 12, 명종 7년. 그리고 金富軾과 그의 아들 敦中은 묵죽을 잘 그렸다고 하며, 그와 정치적 이념을 달리했던 鄭知常은 묵매를 잘 그렸다. 이 밖에 尹孝敏과 인종의 동서였던 鄭敍도 이 방면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정서가 묵죽을 그린 후 읊었던 題畵詩는 당시 여기적 문인화가들이 지녔던 한묵풍류의 성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김부식은 문인화론의 기본이념 중의 하나인 氣韻非師論에 토대로 두고 신분이나 지위가 높거나 학력이 뛰어난 비생업적 문인화가들의 작품경지와 향유활동이 더 가치있다는 견해를 피력했으며, 그의 이와 같은 회화 인식은 창작과 감상 등의 회화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당시 왕공과 문신귀족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569)洪善杓,<高麗時代의 繪畵理論>(≪考古業術≫187, 1990).

 이 시기에는 여기적 문인화가들의 출현과 더불어 직업화가들의 활약 또한 두드러졌다. 예종과 의종년간에 활약했던 李寧은 그 대표적 인물로≪고려사≫열전에 이름이 올랐을 뿐 아니라, 인종 2년(1124) 사신 李資德을 따라 북송에 가서 중국 역대 황제 중 서화가로 가장 유명했던 휘종으로부터 그림솜씨를 크게 칭찬받고, 당시 翰林圖畵院의 待詔였던 王可訓·陳德之 등을 가르치라는 분부를 받기도 하였다.570)≪高麗史≫권 122, 列傳 35, 方技, 李寧. 그가 중국에 가서 떨쳤던 화명은 일본에까지 알려져 中山高陽의≪畵譚鷄肋≫에도 기록되어 있다.571)洪善杓,<17·18世紀의 韓·日間繪畵交涉>(≪考古美術≫143·144, 1979), 35쪽. 이러한 이녕의 명성은 그의 천재적 기량뿐 아니라 당시 고려화단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녕에 대해서는 그의 본관이 전주라는 사실 이외에는 출신과 생애 등에 관하여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李仁老(1152∼1220)의≪破閑集≫에 그가 예종 때 畵局에 있었다고 전하는 점이라던가, 또≪고려사≫에 의종조까지 궁궐 내의 繪事에 그가 주도했다고 하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늦어도 이 무렵에 생긴 圖畵院의 그림책임자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572)고려시대에 圖畵院이 존재했었음은 西京의 직제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그 설립년대는 분명치 않다. 다만≪破閑集≫에 보이는 “睿宗 때 畵局”을 하한년대로 간주한다면 그 이전 북송의 神宗·徽宗간의 발달된 圖畵院제도를 보고 그 무렵 설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녕에게 그림을 가르친 李俊異와 집안 대대로 畫名을 날린 李佺의 아버지 李存夫가 모두 內殿崇班을 지냈던 사실은 이녕을 포함한 당시 화원들의 신분상의 위치를 추구해 볼 수 있는 자료로 주목된다. 여기서 내전숭반이란 정7품에 해당되는 南班의 최고위 자리를 말한다. 남반은 궁내 잡직이나 공직상의 실무 기술자들, 즉 신분상으로 조선시대의 중인층에 해당하는 중간계층으로 이루어진 동반·서반 외의 제3직을 일컬으며, 정7품의 내전숭반을 限職으로 하고 9품 아래엔 官工匠들이 속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직제에 의거해 추측해 보면, 화원들은 신분상 중간계층으로써 남반직과 관련이 있었을 깃이며, 관직으로서의 限品도 조선시대보다 한 단계 낮은 정7품이었던 것 같다. 이녕의 손자가 역시 명화가였던 그의 아버지 李光弼의 후광으로 받은 직책이 종 9품의 隊正이었던 사실도 당시 화원들의 신분상 위치를 말해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화원들의 회화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이 실경산수화의 발전이라 하겠다. 예종대(1106∼1122)에 화공을 시켜 개성 陽和樓의 경관을 두어 폭 비단에 그리게 한 것을 시발로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禮成江圖와 天壽寺南門圖, 인종 때의 중신인 李之抵(1092∼1145)의 집에 걸려 있던 晉陽山水圖 등이 그려지면서 우리 나라 실경산수화의 주류를 이루었던 명승명소도 계열의 전통이 이 무렵 형성되었던 것이다.573)洪善杓,<東國輿地勝覽의 회화관계기록>(≪講座 美術史≫2, 1989), 23쪽.
―――,<실경산수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91∼93쪽.

 당시의 실경산수화는 전해지는 유품이 한 점도 없어 구체적인 화풍을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녕의 예성강도가 서화에 뛰어난 휘종의 상찬을 받았고, 또 그의 천수사남문도가 중국의 명품으로 오인될 정도로 그 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 같으며, 아울러 휘종이 높이 평가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수묵 산수풍보다는 궁정취향의 정교한 靑綠山水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와 같이 고려 전기의 일반회화는 문종년간에 이르러 감상화로서의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송대 중국회화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곽희를 비롯한 북송화풍과 문인화론 및 회화사조의 전래와 이에 따른 여기적 문인화가의 출현과 도화원의 설립, 화원들의 활약, 그리고 명승명소도 실경산수화 전통의 형성 등이 주목을 끈다. 특히 이들 회화 경향은 이 시기뿐 아니라 이후 우리 나라 전통회화 전개의 기반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확대보기
<도판 2>大宝積經 권 32 寫經畵
<도판 2>大宝積經 권 32 寫經畵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