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1. 무신란과 초기의 무신정권
  • 2) 이의방 정권

2) 이의방 정권

 무신란 직후 성립된 무신정권이 어떠한 인물들에 의해 장악되었는가를 알아 보는 방법의 하나로 명종 즉위년(1170)의 인사발령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 인사발령에서 무인만을 가려보면 다음과 같다.

정중부:참지정사 양 숙:참지정사 이소응:좌산기상시 이 고:대장군·위위경·집주 이의방:대장군·전중감·집주 기탁성:어사대사 채 원:장군

 위에 의하면 무신란 직후 출범한 무신정권은 무신란에서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인물들과 무신란을 주도한 인물들의 연합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즉 정중부·양숙·이소응·기탁성 등이 온건한 태도를 취한 인물들인데 반해, 이고·이의방·채원 등은 무신란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무신란을 주도한 무인들이 장악하였던 것 같다. 이는 이후의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정중부를 제외한 이의방·이고·채원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명종 원년(1171) 이고는 이의방과 채원의 연합에 의하여 제거되고 3개월 후에는 채원도 이의방에 의하여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職을 사양하고 두문불출했다 한다.

 이고와 채원이 제거된 후의 무신정권은 李義方 1인의 독차지였다. 그러나 정중부의 세력도 전연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 같다. 이의방이 두문불출한 정중부에게 술을 들고 찾아가 父子의 義를 맺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의방은 정중부와의 이러한 타협을 통해, 그의 집권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고위 무신들의 반발을 무마해 보려 하였다. 무신란 전에 낮은 직위에 머물렀던 이의방으로서는 집권 이후에도 고위 무신들을 도외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고려 무신들에 대한 이의방의 회유는 重房에 대한 그의 정책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무신란 이후 중방의 권한은 크게 확대되었는데, 무신란 이후 최초로 성립된 것이 이의방정권임을 감안하면 중방의 역할이 강대해 진 것은 곧 이의방정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장군의 합의기구인 중방의 권한 확대에는 고위 무신들에 대한 이의방의 정치적인 배려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의방은 고위 무신들에 대한 회유와 아울러 난에서의 행동세력으로 그가 이용했던 하급 무인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천한 신분출신으로서 무신란에 적극적이었던 하급 무신들이 이의방정권 아래에서 크게 진급했던 것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한편 명종 3년에는 문신들의 出仕路였던 지방관에 무인들을 임용함으로써 무인들에게 벼슬로 나아가는 길을 넓혀 주었는데, 이 또한 하급 무신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된다. 지방관에의 무인 임용은 고위 무신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급 무신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의방정권은 문신들의 반발에 직면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金甫當의 난이 그것이다. 명종 3년 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 김보당은 東北面知兵馬事 韓彦國 등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가 난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이의방·정중부의 제거와 의종의 복위였다. 김보당은 張純錫·柳寅俊을 南路兵馬使, 裵允材를 西海道兵馬使로 삼아 군사를 일으킨 한편, 장순석 등을 巨濟에 파견하여 그곳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을 받들고 慶州로 나오게 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이의방은 이의민으로 하여금 의종을 살해하도록 했는데, 의종의 죽음으로 김보당세력은 힘을 잃고 무너지고 말았다.

 김보당의 난은 불과 3개월만에 진압되고 말았지만, 그 난이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다. 김보당은 죽음에 임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무릇 문신으로 공모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함으로써,016)≪高麗史節要≫권 12, 명종 3년 9월. 많은 문신들이 살륙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癸巳의 亂」이라고 부르는데, 이 때 희생된 문신의 수가 매우 많았음은 경인년에 일어난 무신란과 이 사건을 합하여「庚癸의 亂」이라고 일컫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문신들의 정치적 지위가 더욱 약화되었음은 물론이다.

 김보당은 무신란을 전적으로 부인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무신정권에 참 여한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017)黃秉晟,<金甫當亂의 一性格>(≪韓國史硏究≫49, 1985), 39쪽. 실제로 그는 의종대의 정치에 대 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무신란 직후에 환관 鄭諴의 고신에 서경한 인물들의 탄핵을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018)≪高麗史節要≫권 12, 명종 원년 9월. 그와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종 2년 右諫議大夫로서 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던 사실만으로도019)≪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日 1.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문신으로서는 비교적 무신정권에 깊숙히 관여했던 김보당과 한언국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김보당이 거병의 명분으로 이의방·정중부의 제거와 의종의 복위를 내세웠던 점으로 미루어, 의종의 폐위와 이의방의 정권 장악을 못마땅하게 여겼음이 분명하다. 의종대의 정치에 불만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무신란 이후 전개된 정치상황 역시 그들의 기대와는 판이했던 것이다. 일반 군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등, 무신란 자체가 애초에 난을 주도한 인물들이 의도했던 것보다는 훨씬 확대된 방향으로 전개되었음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다.

 이의방정권은 명종 4년에 일어난 趙位寵의 亂을 계기로 몰락하였다. 西京留守·兵部尙書 조위총은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의종을 살해하고 장사지내지 않은 것을 성토함과 동시에, “듣건대 開京의 중방이 의논하기를 근래 북계의 여러 성이 거칠고 강하므로 이를 공격하여 토멸해야 한다 하고 이미 크게 군사를 발하였으니, 어찌 우리가 앉아서 죽음을 당하겠는가. 모두 병마를 규합하여 속히 서경에 모여라”는 내용의 격문을 동북 양계의 여러 성에 보냈다.020)≪高麗史≫권 100, 列傳 13, 趙位寵. 이에 岊嶺(또는 慈悲嶺) 이북의 40여 성이 호응하여 그 기세가 자못 떨치었다 한다. 이의방은 中書侍郎平章事 尹鱗瞻으로 원수를 삼아 3군을 이끌고 조위총을 치게 하였으나 도리어 절령역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김보당의 난과 조위총의 난은 모두 양계에서 일어났고 또 정중부·이의방을 토멸하기 위한 반란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그러나 김보당의 난에 있어서 주동이 된 인물들은 兵馬使機構에 소속된 문신 관료들이었다.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중심이 되고 지병마사 한언국, 兵馬錄事 李敬直·張純錫 등이 공모했던 것이다. 즉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병마사의 병력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 김보당의 난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조위총의 난을 일으킨 중심 인물들은 서북면의 토착인이었다. 서북면의 토착세력인 都領들이 중앙에서 파견된 병마사와 수령들을 살해했던 것이다.021)邊太燮,<武臣政權期의 反武臣亂의 性格-金甫當의 亂과 趙位寵의 亂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19, 1978).

 도령은 양계 州鎭軍의 지휘관이었다. 그들은 중앙의 무반에 비해 정치·경 제적으로 훨씬 낮은 처우를 받아 왔으므로 그들의 불만을 표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한편 그들의 지휘 아래 있던 양계인은 모두 주진군에 편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兵農一致의 군인이었던 것이다. 조위총의 난이 쉽게 진압되지 않았던 것도 그들이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과 같은 군인들이 무신란 이후 중앙에서 크게 부상한 데에 자극되어 있었다. 즉 그들이 조위총의 선동에 호응하여 난에 가담한 것은, 무신란 이후 하급 무신들과 일반 군인들의 진출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022)金塘澤,<高麗 武人執權 초기 民亂의 性格>(≪國史館論叢≫20, 國史編纂委員會, 1990), 123∼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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