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1. 무신란과 초기의 무신정권
  • 4) 경대승 정권

4) 경대승 정권

 慶大升이 정중부의 제거를 결심한 데에는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이 文克謙과 韓文俊을 탄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다. 이로 인해 송유인은 조야의 비난을 모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 이전부터 정중부의 제거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행하지 못하고 있던 경대승이 이러한 기회를 이용했음은 당연하다. 이제 정중부를 제거하더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전개되지 않을 것으로 경대승은 예견했을 것이다. 조야의 인심이 자신에게 모아질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문극겸과 한문준은 모두 문신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좌천을 비난하고 송유 인에게 등을 돌린 인물의 대부분은 문신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의 이러한 불만이 정중부의 실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사실은 곧 문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이 때까지 건재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의 고위 관직 대부분을 여전히 문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분석까지 있고 보면,024)E. J. Shultz, Institutional Development in Korea under the Ch'oe House:1196∼1258, Unpublished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i, 1976, p.79. 이러한 해석은 타당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경대승집권기인 명종 13년 重房이 동반의 관직을 줄일 것을 청하는 등, 문신들의 지위에 타격을 가할 만한 조치를 취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신들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위관직을 문신들이 점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건재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질적인 권력을 누가 장악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문신들의 불만이 정중부 실각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송유인으로부터 탄핵당한 문극겸은 무신란 직후부터 이의방에게 기용되어 무신정권의 성립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즉 그는 오랫동안 무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탄핵에 불만을 품었던 인물들은 문신 아닌, 무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무인들이었기에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에게 불만을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송유인의 越權에 불만을 품은 무인들은 경대승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설사 지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경대승의 쿠데타를 방관했음은 분명하다. 쿠데타 당시 중방의 태도를 미루어 보아 그러하다.

 중방은 무신란 이후 국가의 최고 권력기구로 등장하였다. 모반사건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는 모두 중방에서 처리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방의 기능은 경대승의 집권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王(명종)의 성품이 유약하여 모든 나라일이 여러 장군들에 의해서 결정되고, 왕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는 기록으로025)≪高麗史節要≫권 12, 명종 13년 2월. 알 수 있는 일이다. 여기의 장군들이 중방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방의 이러한 지위나 역할로 미루어, 만일 고위 무신들 대다수가 경대승의 쿠데타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면, 이에 대한 응징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물론 경대승의 제거를 제의한 무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주장을 편 무인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생각된다. 사실 중방의 방해가 있었다면 경대승의 집권은 불가능했을런지도 모른다. 결국 경대승의 쿠데타는 적지 않은 중방 무인들의 협조 내지는 묵인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경대승은 中書侍郎平章事를 지낸 경진의 아들이었다. 경진이 중서시랑평장 사에 오른 것은 무신란 이후인데, 그의 가계는 무신란 전에 이미 무반 가문으로서 매우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무반 가문들과 광범위하게 혼인을 맺었던 점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일인데, 경대승의 동생은 무신란 발발의 도화선과 같은 역할을 했던 이소응의 사위였으며, 장군 孫碩은 그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문에 힘입어 경대승은 의종 22년 15세의 나이로 校尉에 蔭補되었다.

 경대승이 무신란을 겪은 것은 17세 때였다. 당시 그의 활동을 알려주는 기록이 없어, 그가 무신란에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 분명하지는 않다. 그런데 후술되겠지만, 무신란 이후 그가 취한 행동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무신란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이해된다. 당시 그의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추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신란 이후 빠른 승진을 거듭하였다. 정중부를 제거할 당시인 명종 8년에 그는 이미 장군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교위에 음보된 후 10년만의 일이었다.

 경대승의 빠른 출세는 그가 禁軍의 지휘관이었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신란 이후 금군의 정치적 역할이 크게 증대되었기 때문에, 당시 금군의 지 휘관은 정치적인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경대승이 금군의 지휘관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의 아버지 경진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宋群秀 등과 함께 行首職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송군수는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금군의 지휘관은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임명될 수 있었음을 알려 준다. 실제로 고위 무신들이 금군의 지휘관에 자신의 자제를 임명하기 위해 다투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026)曺元正의 경우, 그는 자신의 아들이 尙書 史正儒의 아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동궁 牽龍指諭에 임명되지 못하자, 국왕인 명종에게 항의하였다 한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趙元正). 결국 경대승은 무신란에의 참여에 의해서가 아닌, 가문의 배경에 의존하여 출세한 인물이었다.

 경대승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의 열전이 무신란 이후 집권한 무인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高麗史≫叛逆傳에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그 이전이나 이후의 무인집권자들 모두가 반역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경대승만은 일반 열전에 올라있는 것이다. 경대승의 전기를 일반 열전에 수록한 것은≪高麗史≫의 찬자였다. 그런데 동 찬자의 그와 같은 편찬 방침에는 경대승 당대의 인물들, 특히 문신들의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참고되었을 것이다. 경대승 당대 문신들의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그를≪高麗史≫叛逆傳에서 제외시켰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당시의 문신들은 그를 이의방·정중부 등과는 다른 인물로 파악했음이 분명하다.

 경대승이 문신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면, 무인들에게는 부정적인 인물로 비춰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경대승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고된다.

(경대승은) 항상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復古의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기대어 중하게 여겼다(≪高麗史≫권 12, 世家 12, 명종 13년 7월).

 문신들이 왜 경대승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의 기록이다. 경대승이 품었다는 ‘復古의 뜻’의「복고」는 무신란 이전의 상태고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대로라면, 경대승은 무신란이나 그로 인해 성립된 무신정권을 부정했던 인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대승이 ‘복고의 뜻’을 품었다고 한 표현에는 적지 않은 과장이 섞여있다 고 생각된다. 경대승 자신의 표현 아닌, 문신들의 그에 대한 평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문신들은「복고」에 대한 자신들의 바램을 경대승을 통해 드러낸 것이 아니었나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표현이 무신란과 무신정권에 대한 경대승의 인식과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무신란과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경대승은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의 뜻을 품었다 한다. 그런데 무인들이 불법적인 행동을 취한 것은 무신란 이후였다. 그 이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무신란으로 인한 상황의 변화가 무신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경대승이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분개했다는 것은 곧 무신란 이후의 변화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경대승의 정치적 성격은, 그가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난 후 朝士 들이 하례하자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 있는데 어찌 하례하는가”라고 하여027)≪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李義旼을 제거할 뜻을 분명히 했다는데 이르면,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무인들은 무신란의 성공과 함께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했다. 폐위된 의종을 이의민이 살해한 것은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립을 내세워 기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의민에 의한 의종의 살해는 그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취해진 행동이 아니었다. 이의방정권의 존립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의방은 난의 진압을 위해서는 기병의 명분부터 제거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이의민에 의한 의종 살해는 무신란과 이후의 무신정권 성립에 기여한 무인들의 의사가 집약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금을 시해한 자’라는 이의민에 대한 경대승의 비난도 이의민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닌, 무신란과 이후의 무신정권 성립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인물 모두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국왕의 살해는 기존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부인과 다를 바 없다. 국왕은 자기 당대의 정치세력을 대표했을 뿐만 아니라 王朝를 상징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신란 이후 국왕이 폐위되고 또한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곧 무신란이 커다란 변화를 수반했음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 등은 기존체제를 거부하고 변화를 추구하고 나선 장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행위를 맹렬히 비난한 경대승은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결국 무신란 이후의 변화에 대한 불만이 경대승으로 하여금 무신란이나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대승이었지만, 그는 심리적으로매우 불안해 했었다. 이러한 그의 불안은 정적의 위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都房을 조직하여 이에 대처하였다.

 도방은 경대승의 사병조직이었다. 이러한 사병조직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으로 그에 의해 최초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방의 주된 구성분자는「死士」였다. 이 사사 가운데는 경대승이 쿠데타 당시 거느렸던 30여 인의 사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京城에 도둑이 많이 일어났는데, 스스로 경대승의 도방이라 칭하였다. 관리가 체포하여 이를 가두면 경대승이 즉시 이를 석방하였다”라는 기록에 따르면,028)≪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이들 도방원은 도둑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 도둑의 실체가 무엇인가 여기에서 논의할 겨를이 없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들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경대승이 이러한 자들을 쿠데타에 동원했고 도방에 불러들였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어렵다.

 사사 혹은 도둑은 개인적인 완력을 사용하여 생계를 유지한 자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안정된 사회 분위기에서는 환영받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기에 그들은 등장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신란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용어들이 무신란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만으로 미루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029)鄭杜熙,<高麗武臣執權期의 武士集團>(≪韓國學報≫8, 一志社, 1977), 78∼80쪽. 따라서 이들의 등장을 통해서도, 무신란 이후는 개인의 용력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도방에는 牽龍이 소속되어 있었다. 경대승이 견룡 金子格을 시켜서 도방을 거느리게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김자격은 견룡의 지휘관으로서, 아울러 도방을 통솔했을 것이다. 그런데 견룡은 禁軍이었다. 국가의 군인이 개인의 사병으로 이용된 구체적인 예를 확인한 셈이다.

 경대승이 사사나 도둑 그리고 금군을 도방의 구성원으로 삼은 것은 기존의 법질서를 무시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사병의 조직 자체가 기존 질서의 파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대승 역시 무신란 이후의 변화에 냉담할 수 없었음을 알려 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한다.

 경대승은 도방원에게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날을 번갈아 숙직케 하였는데, 혹은 스스로 함께 이불을 덮음으로써 성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한 다.030)≪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복고의 뜻을 품었다고까지 표현된, 좋은 가문 출신의 경대승이 무뢰배 와 다를 바 없는 사사들과 한이불을 덮고 지냈다는 사실은 주목되어 마땅하 다. 자신의 권위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임을 경대승이 인식한 결과가 아니 었나 한다. 그 역시 변화의 대세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대승은 집권과 더불어 이의민의 제거를 공언하고 나섰다. 이에 이의민은 경대승을 피해 그의 고향인 경주로 낙향하기에 이르렀다. 경대승은 또한 학식이나 용략이 없는 자들을 거부했다 하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들은 대체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서 무신란에 적극 참여하여 출세의 계기를 마련한 무인들이었다고 이해된다. 이는 李英搢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을 정도의 가문 출신인 이영진은 경대승의 집권기에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좋은 가문 출신의 경대승이 이들을 용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무신란 이후의 변화를 주도한 장본인이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경대승이 ‘弑君者’라고 이의민을 비난한 것이나, ‘학식이나 용략이 없는 자’를 거부한 데에는 미천한 출신 무인들의 정치적 진출과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그의 반감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의민이나 이영진과 같은 무인들 역시 경대승에게 호의적이었을 까닭이 없다.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무신란이 성공했고 무신정권이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신란을 부정하는 등 그들과는 판이한 정치적 성격의 소유자가 정중부의 뒤를 이어 집권한 데 대한 불만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경대승은 그들에 대한 응징의사를 표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경대승은 이의민 등에 대한 응징의사만 비쳤을 뿐 그를 제거하지는 못했 다. 그들에 대해서는 공격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소극적이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는 이의민 등이 무시못할 정도로 성장한 데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한다. 이의민과 동일한 정치적 성격의 소유자로 파악되는 崔世輔·曺元正 등이 경대승정권 아래서도 고위직을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대세는 이미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무인들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경대승은 그의 집권기에도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씩 거리로 내보내어 잠복시켰다가 유언비어를 들으면 즉시 잡아 가두어 국문하였다. 자주 옥사를 일으켰고 형벌을 사용함이 매우 가혹하였다” 한다.031)≪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그가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것은 정적으로부터의 위협이 심각했음을 알려 준다. 또한 정보원을 풀어 유언비어를 단속했다던가,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등의 행위는 그만큼 그가 집권에 자신이 없었음을 말해 준다 하겠다. 즉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미약했기에 경대승의 정치는 잔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집권은 순리가 아닌, 당시의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경대승은 30세의 짧은 나이에 일생을 마쳤다.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고 난 다음 병을 얻어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정적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의 집권 자체가 순리가 아닌 이상, 잔인한 정치만으로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무신란에 적극적이었던 賤系의 이의민이 집권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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